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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일용잡부를 해 보며

Joyfule 2024. 6. 27. 18:44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일용잡부를 해 보며  

 

나는 요즈음 동해항이 내려다보이는 해안로의 얕은 언덕에 집을 사서 수리하고 있다. 실버타운의 다음 코스로 인생의 마지막을 그 집에서 보내고 싶다. 동해안을 종단하는 해파랑길 옆이다. 인부들을 불러 함께 일하고 있다. 방구들과 벽지를 뜯어냈다. 수십년 묵은 미세한 분말 같은 먼지가 피어오른다. 매캐한 먼지에 재채기와 콧물이 흐른다. 본드로 접착시킨 벽지가 어떻게 단단한지 매달려도 안 떨어질 정도다. 뜯어낸 것들을 마대자루에 담으면 러시아인부가 그걸 메고 밖으로 내간다.

인력소개소를 통해 조적공을 구했다.

건재상에 가서 벽돌과 몰탈용 시멘트를 샀다. 조적공이 드럼통을 반쯤 자른 통에 시멘트 가루와 물을 붓고 스큐류가 붙은 도구를 넣어 반죽을 만든다. 나이 칠십 가까운 조적공은 평생 그 일을 해왔다고 한다. 한칸 한칸 성실하게 벽돌을 쌓아 올린다.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벽돌의 양은 얼마나 될까? 성채 하나는 되지 않을까? 사람이 평생을 한 가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돈과는 관계없이 그것 만으로도 값진 일이 아닐까. ​

점심시간 조적공 영감과 러시아 청년 인부와 함께 근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떡 만두국을 시킨 후 내가 러시아 청년 인부에게 물었다. ​

“어디서 왔어요?”​

“블라디보스톡에서요.”​

긴 속눈썹이 눈 위쪽으로 올라간 백인이다. 더 이상의 말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이번에는 조적공영감에게 물었다. ​

“말이 안 통하는 데 어떻게 러시아 인부 일을 시키죠?”​

“말이 안 통해도 손짓 발 짓으로 다 돼요. 우리나라 젊은이 중에는 조적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공사장 잡부 일을 하겠다는 사람도 없구요. 그냥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살고 싶어 해요. 이제는 일하려는 우리나라 청년이 있어도 나는 안 써요. 힘도 없고 불성실하니까.”​

연기같이 피어오르는 검은 먼지 속에 있어 보니까 일하기 싫어하는 걸 알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 편하고 좋기만한 일자리는 없다. 어떤 직업이든 애로가 있기 마련이다. 며칠 전 한 지방신문의 편집국장을 하던 사람이 공사판 일용잡부가 된 얘기를 유튜브를 통해 봤다. 노동자가 되니까 조직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어 좋다고 했다.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서로 잠시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관계라는 것이다. 일이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지방도시에서도 일용잡부의 경우 하루 일당이 십육만원이다. 이십일만 일해도 삼백만원이 넘는다. 흙벽돌을 쌓는 기술만 있으면 하루에 삼십만원이고 아파트 공사장에서 한 달을 꼬박 일하면 천만원 가까이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임금의 상승으로 블루칼라와 화이트 칼러의 구분이 없어진 것 같다. 기술 하나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냉기를 어떻게 막을까 궁리했다. 산속의 절들을 보면 잘 지었어도 겨울이면 비닐을 문과 벽에 치는 걸 봤다. 집 전체의 벽을 불에 타지 않는 스트로퍼로 붙이고 그 위에 세라믹 소재의 칠을 오미리 두께로 바르기로 했다. 칠이지만 타일을 바른 것 같이 보이는 최근의 공법이라고 했다. 서울의 기술자들과 계약했다. 그들이 내려와 며칠간 작업을 하는 걸 지켜보니까 프로였다. 뒷정리도 깔끔했다. 그들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작업복을 벗고 깨끗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기가 주차해 둔 곳으로 갔다. 그들이 타는 차들이 놀랄 정도로 고급이었다. 장인들의 지위가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 같다. 블루칼러가 화이트 칼러를 압도하는 시대가 온 것 같았다. 아니 그 분류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 ​

서초동의 나의 사무실 근처에 용접공 출신 젊은 변호사가 있다. 용접공을 하면서 돈을 벌어 로스쿨을 다녔다고 했다. 그는 알고 보니 변호사보다 용접공의 수입이 더 좋았다고 했다. 손녀와 손자가 학원에 다니고 공부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려면 든든한 기술 하나가 더 나은 삶의 방법은 아닐까. 오래전 죽은 한 양복장이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열일곱살에 양복점 점원으로 들어가 가위를 만지기 시작했다. 장인 기질을 타고 났는지 그는 ‘몸에 맞는’것보다 한 품격 높은 ‘마음에 맞는’양복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가위 하나로 일가를 이루면서 오십칠년간 양복점을 했다. 그는 죽기 전날 양복점을 물려받을 아들에게 단골손님 이름을 대며 “그 손님 앞자락이 편하게 놓이게 바느질을 잘하라”고 기술자의 길을 가르쳤다. ​

우리는 하늘의 그분으로 부터 한가지씩은 먹고 살 재능을 받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남들이 가는 길을 생각없이 따라가지 말고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