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안개와 함께 춤을
납빛으로 가라앉은 드넓은 바다 저편에 화물선 한 척이 유유하게 떠 있다. 바닷가에는 이따금씩 짙은 안개가 흐른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다. 옥계해변에 작은 단독 주택을 사서 그곳에 십사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홀로 고독을 견디며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그에게 호기심이 일어 바닷가 까페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가 흔쾌하게 응했다.
“어떻게 적막한 옥계 해변에 자리를 잡았습니까?”
내가 묻기 시작했다.
“도시가 싫었죠. 그래서 한적한 옥계 바닷가 마을로 내려와 삼십평짜리 작은 집을 샀죠. 가격도 얼마 되지 않아요.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니까 돈이 남아돌아요. 경험이 없으니까 농사지을 밭은 사지 않았어요.”
“노년의 긴긴 시간을 어떻게 보냅니까?”
“내 나름대로 혼자 노는 방법 다섯가지를 강구했어요. 첫 번째 놀이는 ‘나드리’라고 이름 붙였어요. 차를 몰고 한 두시간 거리의 동해바다를 오르내리는 겁니다. 북으로는 고성이고 남으로는 영덕 울진까지죠. 새파랑길을 오르내리면서 굉음을 내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고 하얗게 햇빛이 들끓는 수평선도 보고 하얗게 피어오르는 구름이나 밤바다위에 번들거리는 띠를 만드는 달을 즐기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두번째 놀이는 그렇게 다니면서 산책과 온천욕을 즐기는 겁니다. 값이래야 서울 변두리 공동목욕탕 요금밖에 되지 않아요.”
그의 말을 공감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있는 셈이다.
“세번 째는요?”
내가 모르는 즐거움을 찾는 게 나의 일이기도 하다.
“커피로스팅과 핸드드립을 배워서 실행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우리 집을 드나들게 하고 저는 그 사람들에게 공짜 커피를 제공하는 겁니다. 귀촌 생활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사교적인 기술로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을 엽니다.”
“그 다음은요?”
“시간 여유가 생기니까 저는 논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공자님이 원래 공부하는 게 인생 세 가지 낙중에 하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학자들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 논어를 제 마음대로 다르게 해석해 보기도 합니다. 즐거움으로 하는 거니까요. 예를 들면 공자님은 육십에 이순(耳順)이라고 했어요. 예를 들면 남이 나를 뚱보라고 놀려도 그건 내가 건강하다는 걸로 듣는 거죠. 여우라고 해도 그걸 내가 총명하다는 뜻으로 바꾸어 듣는 거죠. 나쁜놈이라는 욕도 내 귀를 통과하면 칭찬으로 바뀌는 게 이순(耳順)이라고 해석합니다. 저는 그걸 어떤 소리를 듣는 마음의 귀가 완전히 바뀐다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다섯번째 낙은 뭡니까?”
그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보통사람이 아닌 정신세계를 가진 것 같았다.
“한시(漢詩)를 짓고 있죠. 시경을 보고 당나라때부터 전해오는 시들을 틈틈이 공부하고 시를 짓기도 하고 있어요. 칠언 절귀를 짓는데 처음에는 자연을 내면화한 경치를 묘사하죠. 다음 연은 정(情)을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의미를 가해야 하는데 아직 서투르죠.”
그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조용히 그의 다음번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바닷가에는 해무(海霧)가 끼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해변을 걷다보면 사람의 모습을 한 안개가 다가와 나를 감싸 안고 춤을 추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우리 집 이름을 무율제(霧律齊)라고 지었어요.”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인디언 추장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안개와 함께 춤을 추는 존재였다. 젊은 사람들이 비싼 집값 때문에 도시에서 주변으로 쫓겨나고 있다. 정년퇴직을 한 노인들이 병과 죽음이 무서워 대형병원이 있는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노인이 되면 도시라는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해 주는 것도 괜찮은 게 아닐까. 도심에 있으면 쓰레기가 되지만 숲속이나 바닷가에 살면 신선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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