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 정도 쯤이야
차를 타고 가면서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가수 김수철씨의 강연을 무심히 듣고 있었다. 나의 뇌리에는 작달막한 남자가 커다란 기타 뒤에서 양다리를 앞뒤로 활짝 벌리고 폴짝 뛰던 광경이 남아 있다.
“벌써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지 오십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그 세월 동안 매일 두 시간 이상 기타 연습을 해왔습니다. 나이 먹은 지금도 합니다. 향상을 위한 게 아닙니다. 유지하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심지가 들어있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너무 가벼웠던 것 같다. 그의 강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어요. 돈이 안 나오더라도 한가지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가수가 돈이 없다고 해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되죠, 저는 평생 국악도 공부했어요. 돈을 생각하면 물 안나오는 우물을 판 거죠. 그래도 나중에 임권택 영화감독을 만나 ‘서편제’라는 영화의 음악을 맡았어요. 전 국민에게 우리의 국악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죠.”
그의 말을 들으면서 김수철이라는 가수에게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걸 이해할 것 같았다. 무대에서 즐겁게 뛰노는 것 같은 그의 현상만 보고 그 뒤의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한 나의 가벼움이 느껴졌다.
한 유명한 화백의 변호사가 되어 자연스럽게 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됐다. 그는 평생 드로잉연습을 안 한 날이 없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 자그마한 들꽃이라도 피우려면 인내하면서 자기를 괴롭혀야 하는 것 같았다. 예술가 만이 아니었다. 내가 존경하는 일본의 현자는 죽을 때까지 매일 성경을 보며 연구했다. 매일 매일 베를 짜나가듯 반복된 행위를 일생 계속하는 건 인내를 요구한다. 자연스럽게 ‘이 정도 쯤이야’하고 틈을 내 쉬면서 느슨해 지는 게 인간이다. 그런 이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정도 쯤’이라는 틈의 넓이와 의미가 인생에서 갈림길이 되는 것 같다. 내가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 싫증이 나면 ‘이 정도 쯤이야’하고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했다. 그런 다음 날이면 노는데서 온 피곤 때문인지 정상궤도로 진입하지 못하고 또다시 소설을 뒤적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나 뿐 아니라 고시낭인들에게 ‘이 정도 쯤이야’하는 자기변명이 병균같이 내면에 붙어있기도 했다. 그렇게 자위하며 불편한 일을 피하다가 늙을 때까지 불편한 채로 남게 되는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삼십년 가까이 고시원의 한 평짜리 방을 벗어나지 못한 고시낭인도 있었다. 몰두해서 삼사년 공부하면 합격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이 정도 쯤이야’라는 지뢰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사법시험의 면접관이 되어 검사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친구가 성의로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어떻게 하겠나?”
“성의라고 하시는데 약간이라는 정도 쯤이면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쯤이라는 걸 금액으로 말한다면 얼마나 될까?”
“월급 정도 쯤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일년이면 수천만원이 될텐데 그걸 그 정도쯤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가요?”
그가 순간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살다보면 ‘이 정도 쯤이야’하고 스스로에 대해 관대해 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거대한 성벽의 돌 하나를 뽑는 것과 비슷한 건 아닐까. 당장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쯤이야’할 때마다 돌들이 뽑혀져 성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어느 순간 급하게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성공은 자기에게 엄격하고 자기를 불편하게 해야 오는 게 아닐까. 굳이 성공하고 싶지 않으면 자신에게 관대해 지면 된다. 그런 성공도 그 순간순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미완의 연속이었다. 미완을 미완이 아니도록 하면 또 다른 미완이 생겼다. 인간의 일생은 그 미완의 상태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하든지 한 걸음 한 걸음 매일의 생활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닐까. 정말 중요한 건 목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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