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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유월 - 한기홍

Joyfule 2005. 6. 26. 14:56


유월 - 한기홍  
왠지 조급한 마음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창문을 힘껏 열어 젖혔다. 
마치 냉수라도 벌컥 들이 키고 싶은 이 갈증과 희원은 무엇 때문일까. 
아! 창 밖 대지에는 찬연한 빛이 온 누리를 감싸고 있다. 유월이다. 
유월… 청산녹수의 계절이요, 어느 구중심처 별당아씨가 은밀한 규원(閨怨)을 풀고
 선뜻 섬돌을 디딜 것 같은 만화방창의 시절이다. 
만물과 인간들이 마침내 흐드러져
 ‘여기서부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느니’ 라고 낭송한 
우스 루지아다즈의 경탄처럼 하늘과 땅, 바다가 껄껄 웃는 통쾌의 계절이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유월의 상큼한 대기가 몰려와 내 폐부를 채운다. 
아 아 육신에 쌓인 세월의 갑(甲)들이 녹아내리고 전신에 새로움이 충전되고 있다. 
집 앞 오래된 붉은 벽돌 담장에는 오월부터 낭자한 염문을 뿌리고 있는 
장미송이가 탐스럽고, 손바닥만한 엽록(葉綠)에 그리움을 총총히 피워내고 있는
목련나무는 봄보다 의젓하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햇살은 작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문득 이층 창 밑, 옆집과 경계한 좁다란 골목에 왠 꼬마가 뛰어들었다. 
예닐곱 살은 되었을까. 동그랗고 하얀 얼굴엔 장난 끼가 가득한데, 
까만 눈동자가 골목 그늘에서도 물방개처럼 굴러간다. 
귀엽기 짝이 없는 녀석은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바지를 훌러덩 내리면서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공교롭게도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창문 바로 아래여서 
녀석의 앙증맞은 고추가 환히 보였다. 
이런 소피를 보려는 구나!.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이 지퍼를 내리는 곳이라 
평소 지린내가 솔솔 풍겨오는 곳이다. 
나도 모르게 뭐라 제지하려다가 빙긋 웃고 말았다. 
녀석의 천진난만에 망각되어가는 내 유년의 뜨락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코흘리개 시절 언젠가 나도 동네 담벼락에 갈짓자 그림을 그리면서 소피를 보다가, 
어른들에게 고추를 잡힌 채로 경을 친 추억도 있었지. 
황토 흙 담장에 샛노란 오줌줄기를 뿌리면 초가집 마당 남새밭에 황금고추가 열리는 
환상에 젖기도 했지. 맞아. 저 녀석의 풋풋한 고추는 장차 이 땅 유월을 빛낼 
황금고추가 될 것이니…. 흐뭇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니, 
어? 금세 시원스레 분출될 걸로 기대하던 꼬마의 소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얼핏 옥상에 흙 상자를 만들어 심어놓은 고추 묘(苗)가 생각났다. 
엊그제 하얗게 핀 고추 꽃을 완상하면서 파란 고추가 탐스럽게 열리기를 고대했었다. 
하얀 고추 꽃을 보면 불쑥 떠오르는 분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문인으로서, 
칠순의 연세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계신 이의웅(李義雄) 시인이다. 
시인께서 발표한 시 ‘하얀 감자 꽃을 보면’에서 나는 향수와 교합된 진한 그리움을 
감동으로 심안에 새겨 넣었었다. 
감자 꽃과 고추 꽃은 크기는 다르지만 형과 아우처럼 닮은꼴이다. 
하얀 감자꽃을 
뉘릿뉘릿 삶은 감자를 보면 
가슴 가득이 물기가 스민다 
서너 개의 삶은 감자가 뼈와 살이 될 리 없건만 
먹어라 먹어라 하시다가 눈물 훔치시던 어머니 
하얀 감자꽃을 보면 뭉게구름 소낙비 내린 후 
파란 하늘 무지갯빛으로 가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북돋운 이랑사이 
주절이 쏟아지는 감자 같은 
북돋운 이랑사이 주절이 쏟아지는 사랑의 샘물 같은 
어머니 생각이 난다 
지금은 흰 구름 너머 저편 하늘에 
날 위해 으깨어진 감자의 넋으로 
하얀 감자꽃으로 가신 사랑의 어머니 어머니 

[이의웅 . 하얀 감자 꽃을 보면 . 2001.7.20] 
그때였다. 잠간 동안의 그윽한 상념을 깨뜨리는 귀여운 음성이 들려왔다. 
“쉬이 쉬… 쉬이” 
창문 밑 골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꼬마 녀석은 잔뜩 힘이 들어 간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입으로 연신 쉬 쉬를 연발하더니 이윽고 힘찬 소변을 내갈기기 시작했다. 
소변을 볼 때마다 꼬마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다독거리면서 불러주었을 소리를 
자기 입으로 부르며, 소변을 보고 있는 기특한 아이에게 말할 수 없는 정감이 솟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녀석의 둥그런 오줌줄기에 대고 탄성 비슷한 소리를 같이 지르기 시작했다. 
“쉬이… 쉬이 쉬이” 
꼬마는 어리둥절하면서 고개를 들어 창문 위 불청객을 보고는 허리를 빼며 잠시 
난감한 표정을 보이다가, 놀랍게도 활짝 웃으며 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쉬이 쉬이…. 곧 오줌은 멈췄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나또한 손까지 흔들며 같이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유쾌한 장면이었다. 
아이와 어른이 서로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며 소피를 찬미하는 정경이라니. 
그러나 그도 잠시, 녀석은 용변을 끝내자 까르르 웃더니 바지를 올리면서 
도망치듯 뛰어가고 말았다.
녀석의 순진무구한 행동에 얼이 빠진 듯 오줌 자국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잇몸 사이로 흘리는 소리는 여전히 쉬이 쉬 소리였다. 
기분 좋은 한편의 시(詩)를 토해낸 기분이 되었다. 
시인 R . 부리지스는 ‘모든 인생은 즐겁지, 유월이 오면’이라고 노래했다. 
창밖에 펼쳐진 세상은 분명 시인이 낭송한 유월이 틀림없다. 
(2005 . 6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