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둘째 시험(인망의 유혹)
둘째번 시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다.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쳤다 하여 사탄이 영원히 물러가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성이 뚜렷이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그의 일생에 한번만 찾아오지 않았다. 여러차례 찾아와서 현세적인 찬란하고 황홀한 광경으로 그를 매혹 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다니 웬말입니까? 선생님 하는 제자 한 사람은 이렇게 간곡히 애원했다.(마16:22) 여기에서도 현세적인 아름다움과 안일로 그를 시험하였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외치셨다.
이 시험이야 말로 모든 긴장들이 무력하게 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와같은 시험은 다시 갈보리 산상에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참을 수 없는 인간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을 때[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27:40)는 조롱이었다.
시험에 져서 물러간 사탄은 그 한번에 물러가지 않는다. 기회만 있으면 꼭같은 시험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서 누가복음 기자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라가니라] (눅4:13)고 기록했다. 이렇듯 반복되는 시험은 사탄의 가장 유능한 무기이므로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이 둘째의 시험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주야로 그의 지상생활의 사명과 그것을 이룩할 방법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비지식으로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를 보내심을 안다. 그러나 이 맡겨주신 사명을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을까?그는 자신의 설교에 대한 반응을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무리에게 과연 납득이 잘되겠는가? 그 말씀의 반응이 효과적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책임감이 무거웠을 것이다. 어느 길이 보다 효과적일까? 그가 상상의 날개를 이리 저리 펴고있을때 선뜩 나타난 존재가 사탄이다. 그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예수에게 보다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호언장담하였다. 하필이면 단조롭고 심심하고 무미건조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겠는가? 보다 극적인 장면,휘황찬란하고 매력적인 장면이 있지 않겠는가? 누가 보고 들어도 모두 감탄할만한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계속적으로 속삭이면서 사탄이 그에게 제시해준 드라마틱한 방법 그것은 매우 높은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뛰어 내려도 머리털 한오라기 상하지 않는 기상천외의 모험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노우]하고 거절하셨다. 왜냐? 그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대로[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마4:7)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 사실로 인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선회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과 강한 몸에 도전의 화살을 날리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를 예수님은 하실 수 없었던 그것이 곧 죄이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사탄의 말대로 효과적인 인망을 얻을 수 있었을까?지극히 적은 한 영혼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일이 뛰어 내린 직후에는 굉장한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수갈채가 그들의 영혼과 예수를 영원토록 맺어 주는 줄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사건에 대하여 갈채를 보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상상할 수 있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중심인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도록 충격을 주는데 있다. 고로 뛰어 내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사람의 저급한 감정 민족이나 감상적인 인상을 주기를 즐겨 하시는 이는 결코 아닐. 갑자기 공중에서 큰소리로 그의 말씀을 전하고, 하늘의 발들을 갑자기 정지시키기도 하고 하늘에서 큰 불이 쏟아지게 하고 자연의 모습을 돌변시키는 따위의 신기한 행동을 하여 사람들의 인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조차 그런 방식으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종교에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와 같은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헤롯의 정신이었다(눅 23:8).
끝으로 한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결코 인간의지의 자유를 거스리려 하시지 않았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를 현장에서 꺾어버리는 행위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신앙고백은 이런 표적을 시도하여 강제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만일 그가 자기의 진실한 사랑과 선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사탄의 요구대로 요술을 부리고 기술이나 연기로써 구원사업을 성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 사업은 어디까지나 진실한 일이다. 이 일을 완성시키는 방법도 진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자기 의지로 결정지어서 예수님에게로 온다는 일만이 진실한 일이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리로 들어가리라](계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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