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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그 집 - 박경리

Joyfule 2008. 5. 7. 03:21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 '현대문학' 올 4월호 발표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턱, 걸린다.
    (중앙일보 2008. 5. 6. 기사글 
    <창작 열정 반세기...한국문학의 극점을 이루다' 타계한 작가 박경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