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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세상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3. 1. 3. 00:52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오해의 세상



마을 길에 경운기를 걸쳐두고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방해하던 사람이 재판에 회부 된 적이 있었다. 자기가 필요한 때 조합이나 이장이 농기계를 제대로 빌려주지 않아 화가 나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마을 사람을 증인으로 세웠다. 증인이 재판에 나오지 않자 그는 담당변호사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증인이 안 나왔으니까 변호사 잘못이네유. 만약 무죄가 안 나오면 판사 놈이 잘못한 거구 나를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한 검사는 죽일 놈이쥬. 마을 이장부터 전부 나쁜 놈이유. 조합도 엉터리예유. 나 다 고발할 거유.”​

그는 독특한 종류의 다른 인종 같았다. 그런 사람이 우리 사회에 섞여있다. 그런 외눈박이들의 오해는 피할 수 없다. 오래전 이런 일이 있었다. 독이 오른 두 여자가 사무실을 찾아와 내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놓고 소리쳤다.​

“집행유예가 뭡니까? 집행유예가”​

변호사인 나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었다. 대학생인 그 집 딸이 밤이면 지도교수에게 저주를 퍼붓는 협박문자를 끝도 없이 보냈다. 대학 게시판에도 익명으로 욕과 모략으로 그 교수의 명예를 훼손했다. 정도가 너무 심하니까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검찰은 기소했다. 우연히 그 사건을 맡았다. 나는 나름대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교수가 동기를 유발한 점을 찾아 지적하기도 했다. 나름 성실하게 변론문을 작성했다.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다. 변론문을 본 피해자측인 그 교수의 변호사로부터 “명문을 쓰셨구만”하는 야유를 받았다. 그 교수의 동료들로부터 ‘돈 밖에 모르는 변호사놈’이라는 욕과 빈정거림을 받았다. 힘들게 변론을 하고 간신히 집행유예라는 최선의 판결을 받았다. 성공한 변호였다. 그러나 그 여대생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교수의 건방을 딸이 지적해 문자로 보냈는데 뭘 잘못했느냐는 것이다. 딸이 잘했다는 인식이었다. 그 엄마가 다시 나에게 강요했다.​

“잘못했다고 진술서를 쓰세요. 그리고 공증하세요.”​

그 정도면 더 이상 상대할 가치는 없지만 내가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여기 사무장이 간첩질을 했어요. 변론서를 수시로 그 교수한테 빼돌린 것 같아요. 그리고 변호사 당신도 그 교수와 야합을 한 게 틀림없어. 같은 법조인이니까.”​

그 여교수가 판사출신이라는 게 그런 망상의 원인인 것 같았다. 그 정도 망상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대책도 없었다. 그냥 오해의 폭풍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엄마와 딸은 내가 상대방과 야합을 했다면서 대한변협에 진정을 했다. 그리고 검찰청에도 고소장을 내고 방송국을 돌아다니면서 고발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나를 얘기하고 다녔다.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온 사무장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일곱 시간이나 꼬박 조사를 받았어요. 사건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경위를 듣고 진술조서를 꾸미느라고 그랬어요.”​

그 다음이 내 차례였다. 나는 조사를 받고 답변서를 작성하는데 변론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했다. 얼마 후 문화방송 텔레비전의 유명 고발 프로그램 진행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사라는 그 여자가 자기 딸의 억울한 사정을 고발하겠다고 방송국을 찾아와서 계속 변호사님을 욕하기에 부득이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드렸습니다.”​

“재판기록을 가지고 왔던가요? 그걸 먼저 보셔야 사건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실 건데요. 제 답변은 주관적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방송국 측에서 재판기록을 보자고 했더니 말만 하면서 기록을 절대 보여주지는 않아요. 저희도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송을 하시더라도 나중에 그들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저처럼 당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와 야합했다고 프로그램 진행자들을 괴롭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말씀을 들으니까 저희도 불안해지네요. 찾아온 그들 집념이 보통이 아니던데.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제 곧 교회를 시작하려고 한다고 그래요. 세상이 전부 사탄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래요.”​

외눈박이들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세상이 오해로 가득 찾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진리 어떤 사람도 오해를 받는다. 예수도 오해를 받았다. 세상 사람뿐 아니라 제자에게도 오해를 받았다. 그는 지금도 오해를 받고 있다. 우리가 설사 완전한 사람이 되고 완전한 진리를 전할 수 있다고 해도 세상의 오해는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분은 침묵하며 십자가를 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