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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에 인생은 정말 짧은가?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3. 1. 4. 00:32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일하기에 인생은 정말 짧은가?



중고등학교시절 내 관념 속에 시간은 꽤 느리게 갔다. 어떤 때는 정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고여있는 시간 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일탈 된 행동들을 했다. 변두리 극장가를 순례하면서 동시상영하는 영화들을 보곤했다. 그렇다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던가 그런 건설적인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어둠침침한 극장 안의 공간에 스며들어 나를 지워버리고 싶기도 했었다. 

무교동에 있는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 이따금씩 들려서 잘 모르는 클래식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냥 겉멋이 들어서 허영으로 그런 것 같다. 싸움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셨다. 성적은 바닥이고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대학입시가 앞에 닥치고 보니까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렇다고 시간을 인위적으로 늘려 재수하기도 싫었다. 


소년 시절 내가 보기에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친구가 있었다. 아마 고등학교 일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교실의 내 뒷자리에 앉은 친구가 싱그러운 종이냄새가 나는 두툼한 노트를 펼치는 걸 봤다. 그는 첫 페이지 맨 위 왼쪽 구석에 ‘1’이라고 번호를 먹이는 걸 봤다. 그는 그 순간부터 매일 수학 문제를 두 개씩 풀기로 계획했다고 했다.

명상하듯 문제가 풀릴 때까지 보면서 그 근본 원리를 깨닫겠다고 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조금씩 실천해 나가는 것 같았다. 그 친구에게 입시를 앞두고 공부할 시간이 짧다는 건 성립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힘들지 않게 서울대학의 들어가기 어려운 과로 건너가는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신문에서 그가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했다는 기사를 봤다. 벌판을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달리는 기차같은 그의 인생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머리도 좋았다. 서울대학교 교수인 그의 아버지의 우수함을 상속받은 것 같았다. 행정관료로 시작한 그의 행진은 순항하는 배 같을 게 틀림없었다. 고등학교때 수학을 공부하듯이 그렇게 업무도 삶도 해나갈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특별한 목적이나 야망보다 뼈에 박힌 그의 생활태도가 그의 삶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 보였다. 외환위기무렵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는 실무책임자로 텔레비전뉴스 화면에 자주 나타났다.

동창들은 국장인 그가 장관이 될 거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벌판을 달려가는 기차나 순항하는 배가 지진이나 거대한 폭풍을 만나듯 인생도 그런 천재지변이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그가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이 보도되고 있었다. 외환위기의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가 구속이 되자 별별 모략적인 내용의 얘기들이 돌았다. 나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럴 친구가 아니었다. 


변호사가 된 나는 감옥 안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소년 시절부터 했던 생활패턴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자기가 정한 일들을 조금씩 꾸준해 해나가는 것 같았다. 감옥 안에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여러 사람을 보았다. 내가 알던 한 언론인은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그 기회에 못했던 독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책을 백 권쯤 선택해 매일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감옥 마루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데 교도관이 집으로 가라고 하는 바람에 독서계획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아쉬워 했다. 한 방송 인터뷰에서 가수 송창식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소년 시절부터 칠십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매일 기타연습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 인생이 짧다고들 하지만 자기가 목적으로 한 일을 성취하기에는 충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

충분한 시간을 쏟고 충분한 마음을 쏟아 일을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지 쫓겨서 해서는 안 된다. 편집 당일에 완성된 원고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서두는 사람은 무익한 일에 시간을 낭비한 사람은 아닐까. 매일 조금씩 꾸준히 일하면 평생의 일을 하는데 시간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세상에는 바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은 어쩌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많이 하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