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복음을 전하십니까?
우찌무라 간조
명예를 위한 전도
어떤 그리스도인은 명예를 위하여 전도를 한다. 인생 50에 공이 없으면 부끄럽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공을 세우고자 한다.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할 힘도 없고, 천하의 관심을 집중시킬만한 재능도 없으며, 재물의 힘으로 재벌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유명한 전도자가 되어 천하를 유세한다면 그러한 성공이야말로 대정치가나 장군에게 비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들 수 있는 전도자!
혼탁한 정치계에 뛰어들어도 분주하기만 했지 얻는 것은 거의 없다.
어쩌다가 우주의 한 귀퉁이를 들여다 보고서 학문가로 자처해도 손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그러나 비록 가난할지라도 선거 시절이 되면, 정치꾼들은 유명한 전도자의 위력을 알아 준다.
대개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부류의 전도자들이었다.
프랑스의 리쉐리아나 마자렝 같은 사람들도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명예를 위하여 종교 개혁의 검을 들었다고. 사실, 전도심과 명예심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매우 구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명예, 사람이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예도 적지 않다.
사람은 반드시 진리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에서 비롯된 전도심과 명예심에서 비롯된 전도심을 구별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사람의 일은 백년이 지나지 않으면 그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분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으며, 양은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의 음성을 구별한다.
성실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으며, 간사한 사람은 어떤 것이 간사함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간사한 자들에게 존경받는 것, 바로 이것이 그가 간사한 인간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어떤 전도자 주변에 간사한 자들이 모여 있는가?
그가 간사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라.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는 사람은 모략과 책략이 빠르고 강하다.
이에 반하여 성실과 곧은 마음은 곧바르게 말하고 곧바르게 행함으로써,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이익을 추구하고,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의를 추구한다.
명예를 원하는 자는 이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곧바른 길을 걷는 자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일편단심이 있다.
명예를 쫓는 자는 어떤 말을 할 때에 먼저 상대방의 지위나 성격을 살핀 후에 말하고, 곧바른 원칙을 따르는 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할 뿐이다.
명예를 위하여 전도하는 자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날 경우 한마디 조언을 하고는 식사와 잠자리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지만,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가련한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구제되기까지 불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명예를 생각하는 자는 부자를 즐겨 방문하며 허식으로 가난한 자를 찾아보지만, 곧바른 생각을 가진 자는 가난한 자를 즐겨 돌아보고 부자 만나기를 꺼려한다.
명예를 찾는 자는 자신의 경쟁자의 몰락을 기뻐하지만, 곧바른 마음을 가진 자는 원수의 실패에도 눈물을 흘린다.
명예를 위해 사는 자는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자를 좋아하고 강직한 자를 싫어하지만, 곧바른 원칙을 따라 사는 자는 맹종을 미워하고 강직을 존중한다.
명예심은 전도 사업을 요란스럽게 치장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부류의 욕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많은 원수가 생긴다.
교회 안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위대한 무사는 자신보다 강한 적을 존경한다.
우에스 겐신은 자신의 정적인 다케다 싱겐의 죽음을 듣고 금식하며 통곡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은 그렇지 않다.
정적은 원수를 용서하지만, 종적은 결코 자신의 경쟁자가 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 것이 교회의 실상이다.
사회적인 죄인은 용서받아도 종적은 용서받지 못한다.
국사범은 감형될 수 있어도, 종적에게는 오직 중형이 있을 뿐이다.
타교파의 목사에게는 관용을 베풀지만, 같은 교단의 목사에게는 결코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무신론자들은 관용으로 대할지라도, 같은 교회의 종적에게는 결코 압박의 손을 늦추지 않는다.
속좁은 종교인은 자신의 경쟁자인 종적을 땅 끝까지 쫓아가서 그를 치욕의 수렁에 밀어 넣고서야 마음을 누르러 뜨리는 것같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여, 그대의 종적이 그대를 꺼꾸러 뜨리기 전에 명예심을 버리라.
교회 안에 감도는 살기를 피하고 싶은가?
그대의 명예심을 버리라. 비록 명예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라도, 교회는 드러나는 사람을 싫어한다.
마호멧이 메디나로 피난간 것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형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교회의 정신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대종교가는 명예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마틴 루터나 낙스가 세상에 나온 것은 스스로의 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누가 교계의 시끄러운 싸움과 뒤에서 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질투를 감당할 것인가?
명예를 쫓는 자여, 하나님이 그대를 사랑하니 그것으로 만족하는 정신으로 살라.
여러 사람들 앞에 그대의 누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 하라.
이것이 참 전도 정신이다.
교회에서 자신의 명예를 세우려고 하는 자는 아직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지를 모르는 자이다.
다시 말하지만, 명예를 얻고자 하거든 교회 안에서 일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에게 교회 전체의 질투가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명예를 세우려거든 차라리 의회나 정치계로 가라.
그 곳에선 명예를 세운다고 해도 세상이 그대를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총탄과 폭연 속에서 군인의 명예를 세운다면, 세상은 오히려 그대를 존경할 것이다.
그대, 미련한 자여, 왜 교회에서 명예를 세우려고 하는가?
그대는 지금 미련의 극치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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