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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Joseph ben Mattathias)

Joyfule 2017. 12. 14. 12:47

 

 

  요세푸스(Joseph ben Mattathias) 

 

 사제요 군인이요 학자였던 요세푸스(Joseph ben Mattathias)는 제사장 가문인 마타디아스와 왕족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예수의 활동시기 몇 해 후이며 유대 땅을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을 당시인 37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이며 사두개인(Sadduccee)으로 태어났다. 그는 너무나 영특해서 16세에 이미 모든 것을 배웠고 그것들의 진실을 알기를 열망했다. 그는 사두개파와 엣세네파(Essenes) 그리고 바리새파(Pharisees) 중 어디를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이 세 파들에 대해 공부했으나 아무런 만족도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3년 가량 밴누스(Bannus)라는 이름의 은자와 함께 사막에서 거주하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바리새파가 되기로 선택하였다.

 

 그는 64년에 네로 황제에 의해 인질로 잡혀있던 여러 사제들의 석방을 중재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것은 난파의 위협을 불사하는 대단히 모험적인 항해였다. 그와 사제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라는 로마의 집정관 게시우스 프로루스(Gessius Florus)에 대한 봉기의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요세푸스는 게시우스 프로루스가 그래도 온건한 인물이며, 혁명의 결과는 절망적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로마주둔군에 의해 전멸되다시피 했던 젤롯당(Zealots)과 시카리파(Sicarians)로 불리는 민족주의 그룹에 속하는 이들의 봉기가 갈릴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들 혁명가들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전의 관료들은 요셉을 갈릴리로 보냈고 베스파시안의 지휘를 받고 있던 로마 군대가 주둔한 근처에 저항 조직을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에서 유일한 군사지도자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미 기샬라의 요한(John of Gischala)이라 불려지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시민군을 조직해놓고 있었다. 두 지도자는 서로의 불화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로마군과 싸우기보다는 서로의 갈등를 조정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로마군의 첫째 공격목표인 세포리(Sepphori)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장악하는데 실패했다. 67년에 그들은 세포리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 당하고 요세파타(Jotapata)에서 포위되었으며 베스파시안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받았다.

 

 유대전쟁사의 저자인 요세푸스 자신은 이들 방어자들의 운명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동굴에 숨었고 항복하기보다는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여가면서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은 자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운명적인 제비뽑기에서 요세푸스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택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마지막이 어떠했음을 알리고 유대전쟁의 경과를 남기기 위한 신적인 간섭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결하지 않고 로마군에 투항하였다.

 

 베스파시안에 의해 투옥된 요세푸스는 자신을 예언자로 소개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강림을 언급한 것으로 믿고 있던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라는 민수기 4:17-19의 예언을 베스파시안에게 적용하며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울 통치자가 유대인이라고 누가 말하였는가?"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는가?"라고 간언하며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단언하였다.

 가울과 스페인에서 네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며 진압되었다. 한편 사람들은 "검을 닮은 혜성"이 하늘에 멈춰있는 것을 관찰했다. 요세푸스는 십자가처형 대신에 구금되었다.

 

 네로는 69년 6월에 죽고 69년 1월에 네로를 린치했었던 갈바(Galba)가 그의 계승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황제가 되려는 자가 둘이 있었는데 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비텔리우스(Vitellius)와 오토(Otho)가 그들이었다. 오토는 패배했고 비텔리우스가 등극했지

만 극히 명망을 얻지 못한 황제였다. 이것은 베스파시안이 바라던 바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요세푸스의 예언은 69년 7월에 사실로 드러났다. 요세푸스는 석방된 것은 물론 로마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이집트인 아내를 맞이하였다. 동족을 배신했던 요세푸스는 비록 생명은 부지 햇으나 로마인들의 신임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투스의 반년 가까이 걸린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있었을 때 그는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의 보호와 신뢰 아래 그의 통역관으로서 그가 유대 민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력하고, 예루살렘의 봉기자들에게 투항을 설득하였다. 이리하여 이전에 유대인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는 플라비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Titus Flavius Josephus)라는 로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배신자로 여겨졌던 요세푸스의 설득은 이전의 연적 기샬라의 요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혁명가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결국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의 멸망을 지켜본 목격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요세푸스는 티투스의 아들들인 히르카누스(Hyrcanus), 유스투스(Justus), 아그립바(Agrippa)가 태어난 로마로 동행했다. 로마에서 그는 전쟁의 목격자로서 전쟁사를 기술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작업은 얼핏 사실적으로 정확히 기술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또한 그의 후원자에게 아첨하는 내용으로 기술했고 로마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다른 지방들에게 경고는 내용으로 기술하였다. 그는 처음에 자기의 모어(母語)인 아람어로 썼고 그후 제국에서 널리 사용되던 헬라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이 작품은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후이며 그의 나이 40세 가량이었던 AD78년 경 출판되었다.

 

 그 후 요세푸스는 헬라어를 공부하여 비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역사와 유다이즘(Judaism)을 설명하는 대량의 저술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유대인의 문화와 성서가 다른 어느 것들 보다 유서가 깊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작품은 [유대 고대사](the Jewish Antiquities)로 불렀다. 대략 이 책의 절반 가량은 히브리 성서를 재인용한 것이고 이전의 역사가들보다 중간기의 역사를 더욱 많이 다룬 것이었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대략 56세였던 93년 혹은 94년에 출판되었다. 이 외에도 자기의 출생과 삶을 자세히 기술한 [자서전](autobiography), 자신이 66-74 AD에 직접 경험한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인의 봉기의 역사를 다룬 [유대 전쟁사](Jewish War), 유다이즘에 대한 로마인들의 공격에 답하는 [아피온에 대한 유다이즘의 변호](apology of Judaism Against Apion)를 저술했다.

 

 98년에 베스파시안 가문의 마지막 황제 도미티안(Domitian)이 살해당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더 이상 보호될 수 없었다. 권력의 변화가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 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죽음은 도미티안이 죽고 난 후로 추론된다.

 요세푸스는 우리가 가진 1세기의 유다이즘의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춘 유일한 자료이다. 이들 저술들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현대 유다이즘의 시작과 유대인의 역사, 그리고 신약성서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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