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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이후의 크세르크세스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

Joyfule 2016. 8. 16. 11:01

 

    

 원정이후의 크세르크세스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이란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오리엔트의 대제국(BC 550~BC 330).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F?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고, BC 700년경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가 수장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지방을 영유(領有)하여 안샨왕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현손 키루스 2세(재위 BC 559∼BC 529)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전조영(神殿造營)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그의 원정 중 마기승(僧) 가우마타는 그의 동생 바르디아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왕이 되고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였다. 캄비세스는 이 변고(變故)의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으나, 도중 시리아에서 실의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캄비세스가 죽은 뒤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같은 일족(一族)인 다리우스 1세가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는 가우마타를 죽여 국내 여러 지방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하고 북서 인도에 침입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전국토를 20수주(數州)로 나눈 행정구획을 실시하여 각 주마다 사트라프라고 하는 장관을 두었으며, 징세(徵稅)와 병역(兵役)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다. 이 사트라프제는 그 후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에서 답습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조영(造營)하였으며,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 km의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채용하여 각 역에는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시(戰時)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제국(諸國)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인을 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왕년의 지휘관 마르도니우스는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국세의 쇠미(衰微)가 뚜렷이 드러났다.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제위(帝位)를 빼앗으려 진공(進攻)해 왔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제국 깊숙이 동진(東進)하였다.

 

요원(燎原)의 불길과 같은 이 세력은 도처에서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으며, 다음해 다리우스는 베소스에게 암살되어 페르시아제국의 멸망을 고하였다. 이 싸움 이후로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Khshayarsha. 별칭은 Xerxes the Great.

  성경의 아하수에로(Ahasuerus) 왕

  BC 519경~465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왕(BC 486~465 재위, 31년간).

 

                                       개요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계승자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BC 480) 테르모필라이·살라미스·플라타이아 전투 등을 통하여, 대규모 그리스 침공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즉위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 1세와 키루스의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리우스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다리우스는 크세르크세스를 그의 형 아르타바자네스보다 더 편애해 후계자로 지명했다. 페르세폴리스 왕궁의 남쪽 현관과 트리필론(장식 계단)의 동쪽 문에 새겨진 부조에서, 크세르크세스는 후계자의 모습으로 옥좌에 앉은 아버지 뒤에 서 있다. BC 486년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35세였고, 이미 12년 동안 바빌로니아를 통치한 경험이 있었다.

 

  즉위와 더불어, 그가 가진 첫 관심사는 지난 2년 동안 반란자의 수중에 있는 이집트를 평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는 다리우스 때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재위 2년째인 BC 484년, 이집트의 델타 지방을 파괴하고, 이집트인들을 징벌했다. 이때 바빌로니아에서 반란 소식이 전해졌다(→ 메소포타미아). 그곳에서 자칭 민족주의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곧 그 후계자가 나타나 이를 계속 지도했다.

 

  2번째 지도자 샤마시에리바는 크세르크세스의 사위에게 정복되었고, 바빌로니아는 난폭한 보복을 받았다. 바빌론의 성벽은 허물어졌고, 사원들은 약탈당했으며, 마르두크 신상은 파괴되었다.

 

  이 행동들은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즉 크세르크세스는 더이상 바빌로니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리우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페르시아 제국과 사적인 관계로 결합된 왕국으로 다루었던(비록 총독령으로 다스렸지만) 반면, 크세르크세스는 강경한 태도로 행동했다.

 

  사적인 결합이라는 의제(擬制)를 일단 거부한 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단순히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바빌로니아의 왕과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뺐다.

 

  다음과 같은 비문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암시한 것은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반란일 것이다(일부 학자는 박트리아의 소요라고 주장함). "이들 나라(반란을 일으킨) 중에 이전부터 데바를 숭배해온 나라가 있었다. 나중에 내가 아후라 마즈다의 은총을 받아, 데바의 신전을 파괴하고 선언했다. '데바를 경배하지 말라!' 전에 데바를 경배하던 곳에서, 나는 아후라 마즈다를 경배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데바 신(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신)의 적으로 선언하고, 아무런 의심없이 이들 아리안족 종교의 몰락한 신들과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동일시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즉 마르두크 신상의 파괴는 위의 비문에서 언급한 데바 신전의 파괴와 반드시 관련이 있는 것인가?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다리우스보다도 더 열성적인 조로아스터교의 추종자였는가? 또는 그 자신이 참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였는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와 조로아스터교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은 난해한 문제이다. M. 몰레와 같은 학자는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때의 종교는 3가지 다른 종류, 즉 엄격한 의식의 종교, 아케메네스의 비문에서 말하는 왕실 종교,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일반 민간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對)그리스 전쟁

  다시 제국이 평온을 되찾자, 크세르크세스는 평화로운 활동에 전념하려 했으나,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전쟁을 부추겼다(→ 페르시아 전쟁). 추방된 그리스인의 강력한 파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크세르크세스의 사촌이자 매제인 마르도니우스는, 다리우스가 생전에 마라톤에서 그리스인에게 당한 모욕(BC 490)을 복수하자고 선동했다.

 

  감동 잘하는 성격인 크세르크세스는 측근들의 압력에 약했다. 그는 전쟁을 위해 3년에 걸쳐(BC 484~481),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꼼꼼하게 추진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때의 전쟁준비를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병력은 모든 속주로부터 징집되었다. 군대의 병참선 역할을 위해 해군이 만들어졌다. 왕이 이 계획에 쏟은 아낌없는 배려를 볼 때, 그가 이 전쟁을 결코 작은 싸움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원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후세에 많은 설명이 있었는데, 경제적인 목적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그리스는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군주 절대주의의 표현으로 보인다.

 

  크세르크세스의 성격은, 나중에 그리스의 전설에서 왜곡되었지만, 결코 어리석거나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G. 글로츠에 의하면, 그는 비록 분별있고 똑똑했지만, "신권(神權)에 의한 군주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를 신성모독과 같이 귀찮아했고……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었으며, 젊은 열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태함에 빠져 있었고, 자기가 싫어하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군대의 선두에 서서 사르디스를 출발한 그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2개의 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폭풍이 다리를 날려버렸고, 크세르크세스는 그 벌로 바다를 채찍질하도록 했다.

 

  다리가 다시 만들어진 후, 그는 7일 동안 군대의 해협 이동을 감독했다. 군대 수를 헤로도토스는 500만 명이라고 했지만, 700~800척의 배가 동원된 것으로 보아 현재는 36만 명으로 추산한다. 거대한 토목 작업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길을 놓았다. 악티움의 이스트무스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파서, 험준한 아토스 산을 피해갔다.

 

  그렇지만 이같은 대규모 병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적지에 대한 정보 부족이 원인이었고, 그리스인의 민족적 감정이 나타난 것도 한 이유였다.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둔 후(BC 480년 8월의 테르모필레 전투등),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를 점령하고, 9월 21일 아테네를 약탈했다.

 

  그러나 9월 29일 그가 먼저 싸움을 건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했다. 병참을 보급할 함대를 상실하자, 군대는 퇴각해야만 했다. 테살리아에 마르도니우스를 남겨두고, 그는 아시아로 다시 건너왔다. 479년 8월 27일 플라타이아 근처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는 전사했고, 이때문에 점령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13년을 끌었지만, 그때 이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로 철수

  이때의 패배를 현대 역사가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몰락의 시작으로 간주하지만, 당시로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패배에 불쾌해진 크세르크세스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 틀어박혔다. 이때부터 일찍이 무거운 과세로 긁어모은 막대한 자원과 부를, 그는 방대한 건설계획을 추진함으로써 더욱 소모시켰다.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는, 다리우스 때부터 대규모의 단일화된 계획에 따라, 아파다나의 거대한 테라스(청중 홀), 궁전인 트리필론, 보물창고 등이 이미 건축되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가 왕이 되었을 때, 아파다나의 외벽에 법랑 벽돌이 붙혀짐으로써 다리우스의 궁전은 완성되었다. 이때 그는 또다른 기념물, 즉 자신의 궁전을 세웠다.

 

  다리우스의 궁전 남동쪽에 그것과 매우 비슷한 설계로 자신의 궁전을 세웠고, 또한 고고학자들이 *하렘이라고 부르는 신비로운 건물을 세웠다(크세르크세스의 보물창고로 보이는 작고 똑같은 방들이 줄지어 있음). 그리고 일백열주(一百列柱)의 홀, 즉 알현실이라는 홀 건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시에는 단지 벽면의 기단과 포장공사만 끝났다(벽면들과 이 거대한 다주 홀의 장식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완성되었음). 이러한 건축물들의 양식은 다리우스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보다 더 화려하고 거대화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의 만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리스에서 귀환한 뒤 그는 하렘에 칩거했고,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음모 속에서 그는 사실상 하나의 볼모에 불과했다.

 

  그는 왕비가 요구하자 자기 형제의 전가족을 제거했다. 그러다 465년 그 자신이 장남과 함께 그의 대신 아르타바누스가 포함된 궁전의 살인집단에 의해 쓰러졌다. 다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