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세계 유랑과 유대교 3.
d) 유대교 역사
ㄱ)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경~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경~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ㄴ)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 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640경~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모슬렘 시대는 가온(Gaon 뛰어난 자. 6세기 -11세기)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빌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 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빌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이집트 출신으로 바빌론의 수라에서 가온으로 임명된 사디야 가온(Saadyah ben Joseph 882-942)은 유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유대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문법, 사전 편집, 시, 주석, 기도문, 달력 제정의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성경의 아랍어 번역이며 주석인 '타프실'(Tafsir)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 학자에게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 (Solomon Ibn Gabirol c.1021-1056)은 네오 플라톤 철학자로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바빌론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시적 철학 작품인 '고귀한 왕관'(Keter Malkhut)은 운율이 있고 모든 절이 성경의 구절로 끝나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찬양하는 성가이다.
이성에 근거한 사디야 가온의 철학은 마이모니데스 (Moses ben Maimon 1135-1204,보통 Rambam으로 부름)가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모슬렘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 팔레스타인으로 전전하다 이집트에 정착했다.
'미시네 토라'(Mishneh Torah, 토라의 반복1166-1176)는 지금까지의 할라카, 율법의 집대성이며, '모레
네부킴'(Moreh Nevukhim, 당황한 자들을 위한 안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
그의 이성에 대한 우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조화는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 후 그의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불살라졌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학자에게
철학적인 근거와 영향력을 줌으로 해서 그에 반대하는 논쟁은 끝을 맺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정립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유대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 보통 Rashi로 부름)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빌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통치하에서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모슬렘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ㄷ)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권)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 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슈)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주석은 너무도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월 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년 6월 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년 2월 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월 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년 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년 9월 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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