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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 2. 유대인의 역사

Joyfule 2016. 6. 12. 00:16

 

 

 

유대인

2. 유대인의 역사[편집]

고대 이스라엘의 구성 민족인 '헤브라이(히브리)'인은 이집트 국내에 거주중이던 외부 유입민들의 집합에서 시작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조는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능력을 발휘해 고위직에 오른 요셉이 이후 친지들을 불러들인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이후 모세에 의해 이탈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구성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추측 가능하다. 

이들이 집단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수가 지나치게 팽창하자 이집트 당국에서도 억제 정책을 펼치게 되고, 이에 대한 돌파구로서 집단 이탈을 제시한 것이 이집트 왕족이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헤브라이 인에서 찾은 인물인 모세. 유태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단군 수준의 위인이라면 모세의 위치는 가히 세종대왕 이순신을 합친 것 쯤은 된다. 이들에게 최초로 집단적 주권의식을 주입시키고 자립의 길을 처음으로 이끈 인물이기 때문. 이들은 모세의 지휘 하에 이집트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이 정착할 만한 지역을 탐색하는 것과 동시에 이동 경로에 있는 토착 세력들과 경쟁을 펼치며 수십 년 정도 떠돌게 된다. 그러니까 성인 남성만 수십만명 규모의 전투난민집단

여호수아 모세 사후에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지휘하여 가나안 일대를 침략해 정복했고 기원전 10세기경엔 익히 아는 다윗 왕과 솔로몬왕의 시대로 이스라엘의 전성기였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고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만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오해하는데 팔레스타인은 고대부터 다민족 지역이었다. 성경에만 기록된 것이라 확실성이 부족하지만 유태인 자체가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이주민족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주하기 이전에 이미 가나안족, 헷족, 히위족, 브리스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여부스족 등 원주민 일곱 부족이 살았으며, 전쟁을 통해 원주민을 복속시키고 유태인들이 지배민족으로써 팔레스타인에 자리잡은 내용이 씌여져 있다. 원래 부터 유태인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유태인의 도래 이전에 이미 선주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을 보면 블레셋인과 히브리인들이 싸우는 영토 다툼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로 비유되어 나온다. 구약에는 여러 이민족들을 유태인들이 절멸시키고 땅의 주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종의 신화이자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며, 실제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사마리아인, 블레셋인, 암몬인, 모압인 등 여러 민족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과 섞여 살고 있었다.

당시의 군장국가체제에서 민족개념이라는 것은 지역에 따른 부족개념이었다. 당시의 가나안(Canaan)지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레바논, 시나이반도, 요르단 서부를 통칭하는 개념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민족들의 이름은 단순한 가나안 민족의 여러 부족개념으로 봐야한다. 한국 고대국가 시대에 부여, 고구려, 예맥, 신라, 백제, 가야 등의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혼재했던 개념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언어들은 북서셈어계에 속하는 언어로써 모두다 친연관계에 있었다. 가나안 지역과 페니키아 지역은 서로 많은 지역을 문화적 교집합으로 갖고 있는데,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 사마리아어, 모압어는 서로 매우 가깝고, 아프리카아시아어족 가나안어파의 하위 어군으로 상호 방언관계를 이룬다. 

자신이 유태인이기도 했던 '블랙 아테나'의 저자, 마틴 버낼 교수는 유태민족과 주변민족과의 관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히브리인과 페니키아인이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진지한 언어학자라면 두 언어를 가나안어의 방언으로 함께 취급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다"라고 '블랙 아테나'에서 이야기한다. 즉, 언어학적으로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는 알파벳의 표기가 다를 뿐, 한 쌍으로 묶인다는 것이다. 세르보크로아티아어의 관계를 연상해보면 된다.

또한 팔레스타인은 지리적인 교통 중심지이다. 그래서 문화적으로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수메르 문화, 이집트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그리스), 히타이트, 앗시리아, 로마, 아랍제국, 여러 투르크제국 및 유럽 십자군 등의 지배를 받았다.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혈연적 관계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애초부터 여러 민족들이 어울려 살았을 뿐만 아니라 역내외의 다양한 문화들이 오고가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던 문화적 교통로이기도 했던 다민족-다문화 지역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하여 쇠락과 부흥을 거듭하던 중 아시리아(이스라엘)와 신바빌로니아(유다)에 패망당하기도 했다. 이후 로마에 의해 합병되어 서기의 기점(실제 연도는 역산상의 오류로 조금 차이가 있지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기에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다. 예수가 죽은 죄목 역시 명목상 '로마에 대한 반체제 책동'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로마에 대해 독립을 요구하는 자주세력과 로마에 협력하는 기득 고위계층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는 기득권층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려하면[11] 당시 유대인 사회 내에서 독립에 관하여 사회적 갈등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로마를 상대로 두 번째로 독립전쟁을 벌였다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개털리고 마지막 보루였던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하다가 로마군이 총공세를 펼치자 독립군 전원이 자결하였다. 이후 로마는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였다. 이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로마 지배하에서 디아스포라를 당해서 전세계로 흩어졌다는 상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문화평론가 김갑수 교수의 견해에 따르자면 실제로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져서 유대인이 전세계에 흩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강제적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문헌기록은 전혀 없다. 오직 그에 근접한 기록으로는 AD 135년에 반란전쟁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전역도 아니고) 단지 예루살렘에서만 쫓겨났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그 기록도 아주 소략하다. 그 기록이 맞다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를 풀어본다면 여러 차례 유대인 반란에 진절머리를 앓던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반란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은 지금과는 달리 매우 작은 성곽도시였다. 성곽만 보면 불과 1~2㎢에 불과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반란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반란의 중심지였던 성이 진압군에게 파괴됐다. 전쟁터였던 성이 불바다가 되고, 폐허가 되는 일은 다반사이지 않은가? 유대인들은 폐허가 된 도시에 살 수 없고, 학살도 피할 겸 시골로 피난갔을 것이다. 반란의 중심지였기에 로마 정부가 당분간 접근금지 봉금령 따위를 내리는 것도 상상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봉금령이 과연 영원히 지속될까?

그 어디에도 봉금령이 언제까지 유지되었다는 것도 밝혀져 있지 않다. 시간이 흘러 몇 년이 지난 후, 복구된 다음엔 인근의 유대인이 또 들어와 살았을 것이며, 그리고 설령 그 봉금령이 있었다고해도 고작 작은 읍성 수준의 도시 하나만 폐쇄되었다고해서, 유대인들이 갑자기 전세계로 퍼질 수는 없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전인 BC 1세기부터 큰 규모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 곳곳에서 여러 언어를 사용하며 살았다는 기록은 무척 많다. 

또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원래 '그리스인이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유대인들도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까 그것도 함께 포함해서 '한 민족이 여러 장소에 흩어져서 사는 것'을 가리키게 된 단어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강제적인 디아스포라는 낭설이자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강제적인 디아스포라가 없었는데, 유대인들이 이렇게 전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대인들에겐 애초에 디아스포라가 없이 그냥 자발적인 이민만이 있었다. BC 1세기경에 벌써 이집트 등에 유대인 공동체들이 존재했다. 특히 당시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 공동체가 무척 커서 인구의 40%가 유대인이었다.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던 AD 2~3세기에 로마시내 곳곳엔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게토가 존재했다. 또한 유태인들 외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도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또한 앞서 짚었듯이 신약성경의 각 기록에 의하면 레반트(레바논, 시리아), 갈라티아, 에페소스(터키), 테살로니카(그리스) 등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단에게 전도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참고로 초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새로운 한 분파로써 시작했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부터 시작했으며, 특히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유태인 집단이 지중해 권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전파가 용이했다는 점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왜 유태인들이 이른 시기에 그렇게 다양한 장소에 살았을까?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앗시리아, 히타이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뒤를 이은 로마제국까지 다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다민족국가들이었다. 또한 유태인들은 당시 중근동의 공용어였던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했기에 다른 지역의 정착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붕괴후 잠시 들어섰던 유대독립국가는 BC 66~61년에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으로 무너지고, 팔레스타인은 새로운 패자인 로마제국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이 로마를 싫어해서 유태인 독립국가를 열망했건 어쨌건 간에 그들은 로마제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제국의 특징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는 다민족국가로써 민족을 차별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로마인이 황제가 된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였다.

현대의 미국이나 브라질같은 거대한 다민족국가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드넓은 미국 곳곳에 한국인들이, 흑인들이, 백인들이 퍼져서 살아간다. 특히 백인들은 아예 혼혈이 되어서 원래의 민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 불과 200여년 동안 벌어졌다. 로스앤젤레스에는 한국인들의 거대한 디아스포라가 존재할 정도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섞이고 섞여서 그렇게 유태인들이 로마라는 자기 나라의 곳곳에 시나브로 이주하게된 것이다.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했고, 동로마제국은 1453년에야 멸망했다. 400~1000여년이면 충분히 유태인들이 그렇게 많은 곳에 퍼져 살 수 있다. 유태인들만이 곳곳에 이주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대의 그리스인이나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도 그렇게 지중해 전역에 퍼져살았다. 고대의 지중해는 하나의 커다란 경제적 권역을 이루고 있어서 권역내에서 교류가 잦았던 점도 큰 요인이다. 

또한 유대인과 페니키아인의 동질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는 방언 수준의 차이밖에 없다. 히브리 문자는 BC 2세기에 사라졌고, 페니키아 문자는 BC 1세기경에 사라졌다. 두 문자가 사라진후 두 언어는 각각 같은 계통인 아람어에 흡수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일찌기 이집트 제4왕조인 BC 26세기~BC 24세기때부터 이집트와 상거래를 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동지중해권역의 무역중개인이었고, 스페인, 튀니지, 아나톨리아 등 지중해 연안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유대인과 페니키아인 사이에는 언어적 차이가 거의 없었고, 서로가 비슷한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페니키아인은 북서부 해안가 가나안인으로 보고, 히브리인은 남동부 산악지대 가나안인으로 보면 쉬운 비유가 될 것이다. 고대부터 지중해 연안은 무역에 따라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권역에 많이 진출했고, 히브리인들도 페니키아인으로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이 후 많은 유대인이 중동이나 유럽으로 퍼졌는데, 대부분 이민한 사회에 녹아들어가지 않고 자신들 고유의 전통과 종교를 지키면서 살아갔기 때문에 배척을 당했다. 제대로 된 일조차 구하지 못했기에 대부분 금융업에 종사했고, 이는 고리대금업을 금하는 기독교 사회 안에서는 더욱 배척받고 미움받는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농사도 지을 수 없었고 조합에 가입할 수 없어 상업도 공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리대금업밖에 없었다.


 

중세 유럽의 유대인. 유대인들은 저렇게 뾰족한 모자를 유대인이라는 징표로 쓰고 다녀야 했다. 

평민과 돈 갚으라고 하는 유대인, 그리고 짜증내는 기사(...)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증오하고 멸시했다. 성경에서 예수의 사형이 결정될 때 유대인들이 외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가 가장 유명하고 악랄한 구절. 십자군 전쟁 때도 지나가는 길에 유대인들이 있으면 그냥 쳐죽이고 재산 빼앗는 일은 예사였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사악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또한 이런 증오가 투영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와 열두 사도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예수가 구원의 첫 대상으로 삼은 것 역시 유대민족이었다는게 아이러니.

현재 재정적인 문제로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지원하는 단체의 상당수가 개신교 계열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분리시킨 신약에서도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것과 그들을 향한 신의 사랑과 계획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교리적으로나 성서적으로나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적대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차라리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빠르다. 

그런데 고리대금은 오히려 기독교가 더 심했다.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 기독교인보다 너그러웠다고 할 정도이니.[12] 근데 뭐 당시 기준으로 말하자면 '기독교'란 한국에서 '검은머리'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표현이다. 극소수 유대인이나 기타 종교인이 있는 거고 기독교는 그냥 '일반 국민 기본값'인 셈. 결국 '고리대금업자는 종교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독한 놈' 이란 이야기.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활동한 유대인 철학자, 랍비이자 살라흐 앗 딘의 주치의였던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권에 비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덜한 편이었다. 사실 집시라든지 쿠르드족의 예를 보듯 단지 나라없는 떠돌이 민족에다가 거주하는 지역사회에 동화되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에 박해당한 것이지 예수를 죽였다던가 하는 건 일종의 핑계일 뿐이다. 게다가 중세의 유대인 학살과 탄압은 유대인들한테 금전적인 빚을 많이 지다보니 빚갚기 싫어서 저지른 것이다. 

18, 19세기 들어 소위 '이성의 시대'가 열리자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감소하였으며 동시에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8세기 들어서 유대인들도 지역사회에 활발하게 융화되어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도 여러 음모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 재벌이 된것도 19세기 초반이며,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성공회로 개종한 유대인 정치인인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를 정도였다. 딱히 따로 말하지 않아도 당시 전분야에 걸쳤던 유럽계 유대인들의 눈부신 활약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살아남아 결국 홀로코스트가 일어났고, 5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다고 추산된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19세기에 대두한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가 기독교로부터 반유대주의의 바통을 물려받았다는 데에 있다. 순혈을 국가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자국내의 유대인들의 성공을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것. 겉으로는 다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소련이나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에서도 유대인들에 대한 대접은 '전세계를 주무르는 무자비한 자본가'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웃기게도 자본주의의 수뇌부인 거대 자본가들도 유대인들을 사회주의자라고 여겨서 좋은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13].

원인이 어쩌든, 홀로코스트를 보면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한 건 나치는 유대인이 수전노에 고리대금업자라는 이미지로 선전했는데 나치 집권 후 그런 소리 들을 만큼 부자인 유대인들은 유럽을 떠났지만[14], 돈도 부족하고 힘없던 유대인들은 남아서 다 수용소로 끌려갔다. 돈이 웬수다

20세기초 영국은 시오니즘의 대두를 지켜보고 유대인들에게 영국령 우간다 땅을 내줄 테니 거기서 나라 만들어라고 제안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영국령 우간다 계획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