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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눈동자 / 정목일

Joyfule 2014. 7. 25. 10:50

 

 

 

유월의 눈동자 / 정목일


유월은 일 년의 중심, 어느새 한가운데로 들어와 버렸다. 햇볕은 쏟아지고 나무들의 신록은 짙어가 몸맵시를 내는 성숙한 여인이나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티 샤스를 입은 청년이다.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초여름, 초록 화살 같았던 보리가 누릇누릇 변해가는 것을 보고서 구름 속에서 종달새가 거꾸로 떨어지며 “빗쫑- 빗쫑- ” 하며 다시 투스텝으로 날아오른다. 노을이 땅에 내려온 듯 자운영 꽃이 들판을 물들이는 유월이면, 천지에 색깔들이 숨을 쉬는 소리가 들린다. 보리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들판을 벼에게 물려주려 한다. 비어있는 논에 물이 채워지고, 모내기를 끝낸 논들도 뛰엄뛰엄 보인다. 계절은 본격적인 영농철로 접어든다.

푸릇푸룻, 푸르스레, 푸르무레하던 나무들은 성숙의 빛깔로 푸르딩딩, 푸르죽죽- 어린 티를 벗고 의젓하고 늠름해진다. 유월엔 모든 게 안정을 찾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어리광을 부리고 귀여움을 독차지할 때를 지나, 제 몫을 감당해야 할 때가 왔다. 성장의 가지를 마음껏 벌려서 안정과 균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볕을 견디고, 장마를 이기고, 태풍 속에도 꺾여 지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온 힘을 모아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고 뿌리를 확고히 할 시기다.

유월이면 가끔 진주시 이반성면에 있는 경남수목원에 가본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 진성IC에서 빠져나와 마산 방면으로 난 국도를 따라 9㎞쯤 가다 보면 경남도수목원이 보인다. 남부 지역 최대 수목원답게 56만㎡(16만 9000여 평)에 보유 식물이 1700여 종에 달하는 거대한 자연학습장이다.

유월의 숲은 은총이다. 오월처럼 현란한 신록의 향연은 끝나고, 제 각각의 능력과 생명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유월의 숲은 안정을 찾은 모습 속에 평화를 안겨준다.

유월은 흔들리지 않는 안정의 미와 성숙이 자리 잡고 있다. 평온 속엔 긴장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유월의 숲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새싹의 신비나 신록을 찬미할 시간은 지났다. 나무들마다 혼신의 힘으로 보다 많은 햇빛을 얻으려고 하늘로 치솟는다. 안정을 취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중이다. 숨 막히는 생존경쟁의 처절한 혈투장이 숲이다. 살기 위해선 영역을 확보해야 하고 햇빛을 더 받기 위해 쟁탈전을 펼친다. 물을 흡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마을에 있었으면 거대한 정자나무로 우뚝 설 느티나무가 나무틈새에 끼여 가녀린 몸으로 햇빛을 받아내려고 치켜 오르고 있다. 다른 나무들에 치여서 햇빛을 받지 못한 나무들은 연약해 쓰러질 듯하다.

숲에 사는 짐승, 새, 곤충들도 자신의 영역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숲의 평화는 숨 막히는 공포와 긴장의 한낱 위장에 불과하다. 생명체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약육강식의 벗어날 수 없는 먹이사슬 구도 속에 놓여있다. 유월의 숲이 위대해 보이는 건 생명체들이 각기 최선 최상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이다. 생존경쟁 속에서도 견제와 균형, 조화와 질서를 보이고 있다.

초록의 희망을 이고 / 숲으로 들어가면 숲으로 들어가면
뻐꾹새 / 새 모습은 아니 보이고/ 노래 먼저 들려오네
아카시아꽃 / 꽃 모습은 아니 보이고 / 향기 먼저 날라오네
나의 사랑도 그렇게/ 모습은 아니 보이고
늘/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네

이해인 시 ‘유월의 숲’ 일절

유월을 읊은 시인의 시엔 사랑과 은총과 서정이 넘쳐흐른다. 유월의 성숙과 미소를 보여준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유월, 파라솔을 든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어느 날 홀연히 선 그라스를 낀 경쾌한 차림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낭만의 달이다.

유월은 우리 민족에게 잔인한 달이다. 궁핍의 상징이던 ‘보릿고개’의 달이요,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상처와 악몽을 남긴 6.25전쟁, 민주화를 위한 유월항쟁이 일어난 달이다. 초록으로 뒤 덮인 산하는 핏자국이 선명하다. 유월엔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으며,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역사의 되풀이가 있게 해선 안 된다. 유월의 향기와 성숙과 풍요로운 서정으로 유월에 흘린 피와 상처와 아픔을 닦아내고 치유해야 한다.

장미, 모란이 오월에 피기 시작하지만, 절정의 아름다움을 보일 때는 유월이다. 정원엔 흑장미, 담벽엔 줄 장미, 들녘엔 들장미라 불리는 찔레가 향기로운 유월-. 들판은 모심기가 끝나 초록으로 채워지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정감 있게 들려온다. 숲에선 여름을 알리는 매미소리가 우렁차다.

유월은 만물이 햇살을 듬뿍 받아들이고 한 낮은 길어져 일하다 졸음이 오면 낮잠도 즐길 수 있는 달, 옥수수에 수염이 나는 달이다. 기지개를 활짝 펴고 내일을 향해 성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축복의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