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의 역사 3.⊙
5. 미쉬나, 탈무드 시대 ( 70-640 C.E. )
제 2차 성전의 멸망은 유다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대전환점이었다.
정치적 독립의 상실로 인하여 더 이상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 대부분의 백성을 흩어지게 했다.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있는 동안, 예루살렘의 랍비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는 중도파 바리새인들과 함께 성을 빠져 나가 야브네로 갔다. 야브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55km, 지중해변으로부터는 5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야브네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던 그는 이 곳에 학당을 세우고, 종교적 기초를 놓음으로써 유대교의 생활을 계속 이어 가려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만 행한 많은 관습과 행위들을 과감히 고쳐 나감으로써 생존의 뼈대를 세워 나갔다. 이 시기의 야부네에서의 활동은 새로운 질서의 형성으로부터 차츰 규법화로 이동하여 갔다.
제 2차 성전 시대의 사회 안에 퍼져 있던 다양한 사상들과 활동은 성전 멸망 이후 전적인 변화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산헤드린은 헬라어 시네드리온에서 온 용어이다. 본래는 '함께 앉다'이다. 이것은 일종의 지방 자치 행정 기구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 행정 기구는 예루살렘에 둔 대산헤드린의 중앙 권위를 인정하도록 설계하였다.
야브네에 설치한 산헤드린의 주요 활동은 헬라 로마 세계의 혼합된 문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유대교의 삶의 표준을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성전 멸망 이전의 유대 사회의 대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왕과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조가 사라지게 되고, 다윗왕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반한 왕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자, 미래의 희망을 이룩할 현실적인 민족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역할을 하던 것이 '나시'이다.
제 1차 유대반란이 진압된 후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로마의 주피터 신전이 건설되었으며, 일상적인 종교적 생활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제 2차 유대인의 반란이 132-135 C.E. 에 일어났으나 , 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대인들에는 보다 강력한 제재가 있게 되었고, 이들의 계속적인 정치적 혼란은 4-5세까지 이르게 된다.
6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들
'95 성경지리학 이스라엘史
유태국을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재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그 성의 파괴에 있다.
이 일이 있기 2년 전, 캐샤레이의 이방인들은 2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수천명을 노에로 팔았다.
다마스커스의 주민들은 불과 하루 동안에 만명의 유태인의 목을 잘랐으며, 예루살렘성 포위 당시에만 해도 11만 6천이나 되는 유태인의 시체가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함락 후 거의 10만명의 망명인들이 체포되어 노예로 팔렸다. 요세푸스는 백만명 이사의 유태인들이 포위 당시와 그 여파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고 추산한다. A.D 115년경에 사이렌, 이집트, 싸이프러스와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서방 세계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를 시작으로 차츰 기독교화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지위는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곳곳에서 에수의 사역과 관련된 장소를 '성지'로 규정해 나가면서,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비잔틴 세계에서 몰려 오는 많은 성지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또 많은 주요 신학적 교리가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팔레스틴에 기독교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의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유스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즉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권리와 재산 보호의 법적근거를 제거해 버렸으며, 유대교에 대한 지위를 하락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신학적 논쟁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혁신적인 조치 중의 하나는 유대법을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요시켜 나가고,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간 것이었다.
나아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성경 해석 방식에 의해 해석해 나갔다.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제국의 통치기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아샤랴, 룻다를 거쳐 614년 5월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의 친유대 정책은 3년이 채 못 되어, 617년에 역전되어 친기독교, 반유대인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처형 되고, 유대인의 지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교회는 유대인을 이집트와 주변 사막으로 추방하였으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더블어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공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은 640년에 팔레스틴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아랍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이제 수 세기 동안 새로운 '악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모슬렘의 등장은 유대인 기독교와의 갈등이나 증오심과는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유대교와의 기독교의 갈등이 유대교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 비하여, 유대교와 모슬렘의 만남과 갈등은 유일신 사상을 지지하는 두 법전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면서 이 지역의 이웃 문화에 상당한 접촉이 있어 왔다. 특히, 아랍인들과 인종적, 언어적으로 친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모슬렘의 경전인 『코란』은 유대교의 많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무하마드가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이해되면서, 그리고 그들의 신이 '유일신 알라'로 신봉되면서, 이러한 신앙을 인정 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이단'일 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다. '움마'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칼과 순교를 '움마'에 속한 자에게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이들은 모든 이슬람 제국에 퍼져 나갔으며, 특히 이들은 10세기의 예루살렘에서 금욕적이고 개인적이며 합리저긴 종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시온의 통곡자들', 또는 '장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이 또 한 차례 모슬렘의 손에 넘어간 것은,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로 온 '종들'의 후예인 마멜룩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13세기 초의 일이다. 본래 마멜룩은 이집트의 군대에서 종사하던 노예들로서, 알말리크 알사나이 무하마드가 이끄는 그들은 지배자들을 전복시키고, 남부 러시아 및 발칸 반도 주변의 새로운 노예를 규합하여 강력한 군사 봉건 제도의 정권을 이룩한 자들이었다.
1301년,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어, 카이로에있는 모든 교회의 회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 정부는 기독교인에게 파란 터번을, 유대인에게는 노란 터번을,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는 붉은 터번을 각각 쓰게 하였다. 이 시기의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그 힘이 쇠잔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악고, 욥바 등의 경우 거의 그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에는 아직까지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으나 주변 지역은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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