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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왕정시대

Joyfule 2013. 11. 11. 00:25

 

 

이스라엘의 왕정시대

 김 수 복

 

 

1. 왕국 건설의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의 부족동맹은 약 200년간 존속한 끝에 불레셋족의 침입으로 마침내 붕괴되었다. 강력한 군사적 전통과 우세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불레셋 전사들은 이스라엘에게 전례없이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였다. 과거의 적들과는 달리, 그들은 인근한 몇몇 부족들에게만 관계되는 한정된 위협이나 몇 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일격에 물리쳐 버릴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불레셋족의 팽창정책은 팔레스티나 전역을 정복 목표로 삼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처참한 곤경에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공동으로 대처해야 했다. 이 처참한 곤경을 알려주는 전승은 꽤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일명 '계약의 궤' 설화로 전승되는 이 부분은 '계약의 궤'가 불레셋족에 의해 약탈됨으로써 이스라엘의 치욕이 시작된다.

 

  불레셋족의 도시들은 그들이 본래 차지했던 영토의 최북단에 있는 아벡이라는 곳에서 그들 모두의 세력을 규합해서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중심지를 향하여 돌격해 갔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중심지를 향하여 돌격해 갔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상비 군대가 지닌 무장과 전술을 격파할 만한 아무런 준비와 여력이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없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적군의 손에는 우리를 구해내실' 야훼의 계약뿐 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로에 가서 야훼의 계약의 퀘를 싸움터로 옮겨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은 나타나지 않았고 승리 대신에 그들에게 온 것은 처참한 패배였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리멸렬하고 '계약의 궤'를 모시고 있던 엘리가는 망하였으며 '계약의 궤'도 블레셋족에게 노획되었다.
뒤이어 실로도 점령되었으며 부족동맹의 성소는 파괴되었다.

 

  블레셋족과 암몬족은 에집트를 대신해서 근동에서의 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하였으며 그들은 이것을 끌고갈 만한 정치적, 제도적, 경제적 장치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군대를 쉽게 결집시킬 수 있는 중앙집권적 왕정이 시작되었으며 강력한 군사장이 최고의 통치자롤 자주 뽑혔다. 그들은 또한 강력한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를 생산하는 데 능숙했다. 무기는 철의 특성에 의해 그 성능이 뛰어났으며 지세가 허용하는 곳에서는 이미 병거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철제 생산은 불레셋의 군사적인 우월성뿐만 아니라 경제와 상업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을 마비시킨 우월성을 의미하였다.

  이같은 곤혹스런 시기에 부족들을 다스리고 있던 판관들은 이 상황에 대처할 만한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들의 단결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훈련도 안되어 있고 장비도 보잘것없었다. 이와 같이 강력한 적과 정면으로 맞서 전투를 벌일 가망은 거의 없엇던 것이다. 왜냐하면 부족동맹의 조직은 두드러지게 표면화된 원심작용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 조직은 순수한 야훼 신앙을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다. 또 한번도 전이스라엘을 설득하여 일치된 공동행동을 취하지 못했으며, 또 내란을 유발하지 않도록 부족들 사이의 과열경쟁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부족동맹은 거의 200년이나 존속되었다. 그 이유의 일부는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위급한 사태들이 대부분 국지적 성격을 띤 것이어서 소규모의 몇몇 부족들의 결집으로써도 그러한 사태에 대처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또한 그 동맹이 분명하게 정의된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지파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그밖의 분약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이 동맹조직을 창설케 했던 야훼와 맺은 계약의 정신을 더할 나위 없이 잘 구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판관시대의 전기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의 통일국가를 창건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가나안의 도시국가체제를 모방하려는 수단을 쓰지 않았다. 실상 기드온이 왕정을 거절한 이야기와 요담의 풍속적 만화(판관 9:7-21)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왕정을 머리 속에 떠올려 생각하는 것조차 저주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불레셋족의 침략으로 결정적인 위기가 닥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상태는 무한정으로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각 지파들의 결집으로써도 대처할 수 없는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웃 민족들의 상황은 이스라엘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동부 요르단의 에돔인들, 모압인들, 그리고 암몬인들은 벌써 지파의 군주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왕이 다스리는 국가로 결합되어 있었다. 불레셋 사람들 또한 그들의 도시군주를 가졌는데, 이러한 통치자들은 에게 민족들과 비슷한 유의 독재정치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도시국가들은 강력한 동맹을 맺었다. 페티키아인들은 연합하지 못한 도시국가들을 결속시켰다.

 

  그러나, 띠로와 시론과 비블로스는 이방 통치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경제교역을 신장시켰기 때문에 강력한 국가들이 되었으며, 중심권력은 왕들에게 있었다. 이웃 나라들의 이러한 실례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자신이 이러한 국가들의 힘을 피부로 느겼을 때,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결국 실로에서 야훼의 거룩한 '계약의 궤'를 불레셋족에 빼앗김으로써 부족동맹은 깨지고 정치적 세력이 결집하고 민중을 다스리는 기술이 세련되며, 일가를 향한 충성심이 강요되기도 하는 시대에-이것은 일면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상당힐 배치되기도 함-접근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