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왕정시대
김 수 복
2. 통일왕국시대
(1) 사울 통치시대(B.C. 1030-1010년)
1) 사울의 선출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왕정의 첫번째 통치자는 베냐민 지파 출신 사울이었다. 달갑지 않았으면서도 왕정으로의 이행 자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엇던 것은 순전히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공통적으로 처했던 처참한 고통에서부터 출발한 것 같다.
급격히 강성해진 인근 부족들의 잦은 팔레스티나 위협은, 현실적으로 그에 맞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카리스마적 인물을 자연히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염원으로부터 출발한 왕국 초기에 관한 서술은 의외로 사제이며 판관이었던 사무엘에 관한 것이다. 그는 세속적인 우두머리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토이자)로 나타나며, 또 판관으로 여겨졌다. 그에 대한 전승은 꽤 상세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야훼로부터 물려받은 거룩한 전통을 지키려는 일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또한 야훼의 명에 의해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조금 후에 사울의 반대편의 중심을 이룬 후기의 사무엘로서는 - 출발부터가 그러한 귀결은 -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무엘은 기도를 통해 불레셋을 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늙었을 때 두 아들을 판관으로 임명하고 백성을 다스리게 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 사무엘과는 달리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올바르게 내리지 않아 곧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되었다. 강한 군사력과 통치권일 없는 판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백성들의 요구에 사무엘은 분노하고 왕정의 폐해를 들며 반론하였지만, 곧 야훼의 명에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왕을 세웠으니 그가 사울이다.
역사적인 정세에 의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왕정의 초기 형태의 담당자였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방법으로 적드러의 곤경에서 벗어나야 하는 정치적인 필요성은 너무나 급박했다. 또한 달갑지 않으면서도 왕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야훼로부터 거룩한 계약의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노예살이를 한다는 것은 백성의 신앙과 야훼의 명예와도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2) 사울 왕권의 성격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 사건과 여러 가지 사정에 대해서 전승이 알려주는 부분은 상당히 미약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그 왕권과 사울의 국가형성이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는 데 있다.
사울의 국가는 최소한 이념적으로는 군사적인 우두머리로 구성된 고대 종족동맹이었다, 거기에 따라 사울의 왕권은 카리스마적 지휘권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의 찬성을 통하여서만 항구적인 제도로 견고해질 수가 있었다. 따라서 사울은 야훼로부터 기름부음받는 자로서 합당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사울 왕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적들을 방어함으로써 세워지고 결성된 군사왕국이었다. 그 왕국은 이스라엘으 군대를 통일된 지휘 아래에서 통괄하고 이스라엘 지역을 소유하여 종주권을 요구하는 이웃 나라들을 방어해야 했다.
사울 왕정은 독특한 점이 많았다. 그것은 확실히 가나안이나 블레셋의 봉건적 도시국가의 체제를 모방하지 않았다. 비록 에돔이나 모압 또는 암몬의 민족적 왕국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빌려 왔을지는 몰라도 그 왕정은 여전히 이스라엘다운 특징을 지닌 독특한 체제였고, 처음에는 가급적 옛 질서를 벗어난 변화는 피하려고 하였다.
사울 왕국은 부분적으로 초기 지파 통수권을 승계했으며, 부분적으로는 가나안과 고대 중동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대 중동의 주변 세계에서는 왕에게 기름붓는 종교적인 예식뿐만 아니라 신적 생명력과 권위, 그리고 천부의 직능에 대해 사상도 유래하고 있다. 사울의 자질은 다른 유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도 역시 야훼의 기름부음을 통해 전권자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전권은 통치자를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만들었다.
사울 왕국은 그래서 매우 왕조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합법성을 인정했으며 누구도 그를 반역하지 못하였다. 그에 반해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사울 왕가의 배신자로서 권력을 찬탈했다고 생각하였다(2 사무 16:8).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의 내부 구조를 별로 변화 시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어쩌면 그는 그런 변화를 바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부족동맹 체제는 과거와 다름없이 남아 있었고 행정기구나 관료제도는 전려 발달하지 않았다. 사울 이후의 왕들에 비해서 그는 왕궁을 짓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죽을 때까지 자기 천막(요새)을 지켰다.
물론 젊은 군인들을 모아 직속으로 장기복무를 시킨 듯한 사울의 예외적 조치에서 상비군제도와 군사적 귀족정치의 발단을 엿볼 수는 있으나 사울의 경우, 이러한 조치는 단지 그 시대가 요했을 군사적 필요성에서 취했을 뿐 그 이상의 뜻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울이 수행하였던 최초의 전투는 암몬인들과의 전투였다. 이 전쟁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는 토대가 되었다.
길르앗과 야베스에서 전령자들이 상황이 위급함을 알려왔을 때 사울은 야훼의 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독 황소의 각을 떠서 각 지방에 돌려군사를 동원했다. 군대 소집은 성공적이었고, 암몬의 군대는 참패당하여 흩어졌다. 그럼으로써 정세는 근본적으로 달라졌고 동부 요르단의 이스라엘의 모든 소유는 다시 복구되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가 자기를 따랐기 때문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잘 훈련된 군대로, 언제나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중무장을 갖춘 보병으로 형성되었으며, 게다가 주로 용병들로 이루어진 불레셋군에 비해 이스라엘의 군대는 아직도 새로운 철제 무기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무기 사정이 형편없이 나빴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며 농부들과 목동들이 일시적으로 모여 전투 주비를 하는 실정이었다.
사울은 항상 전투 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상비군을 만들었으며, 군사적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모색하였다.
3) 다윗의 등장과 사울의 종말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됨으로써 자신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멍에를 지게 되었다. 그의 지위는 카리스마적 자질을 극적으로 한번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무서운 긴장으로 그를 짓눌렀다.
불레셋족의 위협은 사울의 평생 동안 따라다녔다. 사울은 이따금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 위협을 종식시키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각 지파들이 이스라엘 전통 속으로 다시 회귀하고자 했고, 그들은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제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큰 타격은 사무엘과이 결별이었다. 잦은 외침과 내부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던 사울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고립감 때문에 사울의 노년은 거의 광적이었다. 그의 종반기에 접어든 시기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영웅을 맞아 환호하게 되어, 사울은 그 영웅을 이방의 적보다도 더욱 증오하고 배척하였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고, 반대세력 또한 늘어 갔다. 상대적으로 그의 강한 적수(?) 다윗은 영웅의 자리를 굳혀갔다.
결국 사울의 일생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종결되었으며 평생 동안 전투에서 얻은 영토들은 그 집권 초기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어쩌면 헛되어 살고 싸웠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어찌 헛되이 흘러가겠는가. 그가 시작한 왕정은 그 뒤를 이은 다른 왕들에 의해 계속해서 이스라엘인을 통치하는 데 유효했으며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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