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학 핸드북 - 제3장 랍비유대교
힐렐과 샴마이: 이 둘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로 대조되는 인물들이지만 함께 거론된다. 탈무드는 힐렐 학파 (베이트 힐렐)와 샴마이 학파 (베이트 샴마이) 사이에는 300개가 넘는 차이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힐렐 학파가 더 우세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랍비 힐렐은 바벨론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와서 그는 나뭇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토라를 배웠다.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토라학교에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학교는 등록금 제도를 없앴다고 한다. 그는 매우 친절했고 신사다왔고, 사람들을 애정을 갖고 대했다. 미쉬나에 있는 피르케이 아보트(조상들의 윤리)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이 실려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하겠는가? 만약 내가 오직 나만 위한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힐렐은 학교 조직망을 만들었다. 랍비 샴마이는 기술자였다. 그의 사상은 엄격함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탈무드에 따르면 어떤 이방인이 샴마이에게 가서 “만약 당신이 내가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에 토라를 모두 설명해 준다면 나는 유대교도가 되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샴마이는 막대자를 휘둘러서 그를 쫓아내 버렸다. 이 사람은 힐렐에게 가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힐렐은 이런 말로 그를 감동시켰다. “당신이 싫어하는 일은 이웃에게도 하라고 하지 마시요. 이것이 토라의 전부요. 나머지는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그러므로 가서 토라를 공부하시요.”
요하난 벤 작카이: 이 사람은 힐렐 학파의 마지막 랍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혜의 아버지’이며 ‘모든 학자들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전통에 따르면, 벤 작카이는 주후 68년 로마장군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유대인들과 로마군대 사이를 중재했다고 한다. 이때 예루살렘은 열심당원들이 장악하고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다. 벤 작카이는 이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헛소문을 내고 관에 들어가 누웠다. 제자들은 그 관을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 관에서 나온 작카이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로 갔다. 그가 곧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황제가 되면 야브네(지금의 르호봇 근처)의 한 장소에 토라를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게 해달라고 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황제가 되자 벤 작카이를 위해서 야브네에 장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예시바(학교)는 존속되었고 이 예시바는 수 세기 동안 유대학 연구의 요람이 되었다.
아키바 벤 요셉: 가난한 목동이었던 랍비 아키바(주후 15-135 )가 랍비유대교의 위대한 학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는 미쉬나의 석의방법론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전통을 성경의 본문과 연결시켰고 많은 자료들을 정리해서 조직화했는데 이것이 훗날 ‘미쉬나’가 되었다. 랍비 아키바는 로마에 항전한 바르 코크바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로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랍비들의 공개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바르 코크바가 로마군에 의해 토벌되자 아키바도 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예후다 하 나시: 유대인 공동체의 대부인 랍비 예후다 하 나시(주후 135-219)는 히브리 사상만큼 헬라사상에도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키바의 작품들을 기반으로 미쉬나를 조직화하고 집대성했다.
라쉬 (쉴로모 이츠하키): 북프랑스 포도밭 지대에서 라쉬(주후 1040-1105)는 바벨론 탈무드와 성경의 주석을 썼다. 라쉬는 수많은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체계화하고 탈무드와 성경의 본문에 지혜롭게 연결시켰다. 일반인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웠다. 그의 이런 노력은 훗날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큰 유익이 되었다. 인쇄술이 서구에 퍼진 후 거의 대부분의 인쇄된 탈무드에는 라쉬의 주석이 많이 채택되어 있다. 라쉬의 주석은 유대인들의 성경공부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어 있다.
람밤 (마이모니데스; 랍비 모쉐 벤 마이몬): 무어인의 땅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람밤(주후 1135-1204)은 본디 의사였다. 그는 스페인,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무어인의 땅을 돌면서 살았는데 자주 박해를 받았다. 그는 카이로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였다. 또한 그리이스 사상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람밤은 평이한 언어로 보편적인 유대사상을 정리했는데 그가 쓴 ‘미쉬네 토라’는 유대인들 율법책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대 유대인들에 의하여 저주를 받기도 했는데 탈무드 대신에 미쉬네 토라를 강조해 탈무드 공부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람밤은 유대인의 13개 신앙원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시각에서 유대교 교리를 정리했다. 이것이 유명한 613개 조항이다.
람반 (나흐마니데스; 모쉐 벤 나흐만): 람반(주후 1194-1270)은 당대 최고의 할라카 학자였다. 그 이전의 람밤처럼 람반도 스페인 태생이며 의사였다. 이성적이었던 람밤에 비하여 람반은 신비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성경 주석들은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에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공격적으로 비난을 퍼부은 사람이었다. 1263년 스페인 왕 야이메 1세 앞에서 개종한 유대인인 파블로 크리스티아니와 벌인 논쟁이 잘 알려져 있다. 람반은 초기 시온주의자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수 있다. 그는 민수기 33장 53절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고 그곳에 사는 것은 율법이라고 말했다. 또 “이스라엘이 거룩한 땅을 점령하고 있는 한, 지구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람반은 그의 말 때문에 스페인에서 추방되었고, 이스라엘 땅에 가서 살았다. 십자군운동 때였다. 이스라엘 땅이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파괴된 땅이라도 복된 땅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곳에서 1270년에 죽었다. 람반을 부레슬로프의 랍비 나흐만과 혼돈하지 말라.
바알 쉠 토브 (베쉬트; 이스라엘 벤 엘리제르): 바알 쉠 토브(주후 1700-1760)는 근대 하시딤의 창시자다.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책을 한권도 쓰지 않았다. 랍비 유대교는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무식한 농민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기도를 강조했고 율법을 순종할 것과 개인적인 신비한 체험을 강조했다.
브레슬로프의 랍비 나흐만: 바알 쉠 토브의 손자인 랍비 나흐만(주후 1772-1810)은 브레슬로버 하시딤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브레슬로프는 랍비 나흐만이 그의 말년을 보낸 우크라이나의 마을 이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브레슬로프가 히브리어 브리스 레브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 의미는 ‘마음의 언약’이다. 그는 즐겁게 행복 하게 살 것을 강조했다. “행복해 지는 것이 위대한 율법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람반과 혼동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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