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2) (과정)
시오니스트들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땅에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들, 시오니즘과는 상관없는 유대인들이 서로 어울려 자신들의 문화를 이루며 대대로 살고 있었다. 종교는 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은 종교적․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정치권력에 의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이주와 토착 종족의 추방과 살해, 이어지는 대규모 전쟁과 대량 학살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한 토착 종족에게는 지배와 점령에 대한 저항과 항거의 과정이었다.
1. 이주와 추방
1904년부터 러시아에서의 학살을 피해 이루어진 이주는 이전의 이주에 비해 팔레스타인 상황에 큰 변화를
주었다.
1905년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und)이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1910년대 1만 명이었던 유대 이주민의 숫자는 1920년대에 8만 명으로 증가, 다시 1933년 25만 명, 1939년 50만 명까지 증가한다. 유대인 자본가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각종 인허가의 90%를 독점하면서 도로 건설, 사해의 광물 개발, 전기 항만을 장악하였으며 1935년에는 1,212개 공장 가운데 872개를 장악하게 된다. 아랍인들은 무장투쟁과 총파업으로 맞섰으나 영국의 탄압으로 실패한다.
1939년 9월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팔레스타인이 군사기지화 되자 유대인 소유 기업의 군수물자 생산이 증가하면서 경제적 성장과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진다. 또한 영국군으로 참전한 유대인들이 현재 이스라엘 방위군의 전신인 하가나(Haganah)1)의 주요 구성원이 된다. 영국은 유대인 이주와 토지 판매를 제한하는 백서(White Paper)를 이미 5월에 내놓았는데 이에 유대인 군사조직인 이르군(Irgun), 스턴 갱(Stern Gang) 등이 영국에 무력투쟁을 벌인다.
1946년 10월 4일 헤리 투르만(Harry Truman) 미국 대통령은 ‘욤 키푸르(Yom Kippur) 성명에서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분할과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실질적인 유대인 이민을 지원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과 입장이 달랐던 영국 정부는 1947년 2월 14일,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긴다.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나라로 분할하고,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유엔의 관리 하에 두고
인구가 적은 유대인에게 더 많은 토지를 할당한다는 불평등한 유엔의 분할안이 통과된 1947년 11월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다수인 아랍인들을
추방하기 위한 공격이 이루어진다. 아랍인과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노력과 항의를 무시한 시오니스트들은 1948년 3월
'D계획(Plan Dalet, 공식 명칭은 여호수아 Yehoshua 계획)‘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아랍인 추방과 학살2)을 벌인다.
영국군은 아랍인들의 보호 요청을 거절하고 충돌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학살에 협력한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 하루 전, 시오니스트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한다.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알-나크바(Al-Nakba)’라 불리는 대재앙의 날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날인 5월 15일, 미국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곧바로 승인한다. 이에 대응해 1948년 10월 1일 팔레스타인은 제1차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서 국가 창설을 선포하지만 국제사회는 침묵한다. 이후 1988년 11월 15일, 제19차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 90개국이 인정했음에도 이스라엘과 열강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2. 전쟁과 학살
이미 살고있던 사람들의 영토를 유엔과 서구 열강의 지원을 등에 업고 더 많이 차지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스라엘은 분할안에서 팔레스타인들에게 주어졌던 영토마저 전쟁과 추방을 통해 점령해 나갔다.
①1948년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의 아랍연합국들은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군사력에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경쟁이 될 수 없었다. 1948년 5월 중순, 아랍군의 병력은 25,000명 이하였음에 비해 이스라엘군 병력은 35,000명, 7월 중순 65,000명, 12월 96,441명으로 늘어난다. 영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비행기 조종사, 통신 전문가 등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이스라엘은 체코슬로바키아 등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수입한다.
결국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8%를 차지할 수 있었고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관리하도록 휴전협정이 맺어진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 인구의 80%이상(약 75만 명)이 추방된다. 아랍인들이 떠난 땅은 ‘소유자 부재지’로 처리되어 유대인 이주민의 점령촌이 되었고 추방당한 사람들은 아랍 주변국가에서 난민이 되었다.
②1956년 2차 중동전쟁
이집트와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인도양 지역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와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철수하였다.
③1967년 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6일 전쟁, 또는 6월 전쟁으로 불린다. 이집트가 티란 해협으로 이스라엘의 선박이나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행을 금지하자 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이집트)와 골란고원(시리아), 팔레스타인의 가자와 서안을 차지하면서 예루살렘 전체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영토를 모두 점령하였다.
그 결과 1차 중동전쟁 때 가자와 서안으로 피난갔던 난민 중 19만 명이 다시 난민이 되었고, 서안과 가자에 원래 거주하던 20만 명도 난민이 되었다. 서안과 가자는 이스라엘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보여준 우세한 무력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부터 전폭적인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④1973년 4차 중동전쟁
이집트와 시리아가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과 벌인 전쟁. 초기에는 아랍국가들이 우세하였으나, 미국이 이스라엘에 막대한 무기원조를 제공하면서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 없이 전쟁이 끝났다.
⇒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년)
4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내세워 협정을
진행하였으나 정작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협정 내용이 진행되었다. 이집트는 이 협정을 통해 시나이 반도를 되찾았고,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아랍 국가에게서 국가로서 공식 인정을 받았다. 양 측은 서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의 부담을 덜게 된 것이다.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는 각자의 이득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이 평화협정으로 이스라엘 수상 베긴과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협정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군사위협 걱정없이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1980년 7월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하는 기본법 제정
.1982년 6월 레바논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PLO를 파괴하기 위해 레바논 남부를 침공. 공격 2개월 만에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가 7,000명이 주변 아랍 국가와 아프리카 등지로 쫓겨남.
.1982년 9월 친 이스라엘 성향이며, 그리스도교 마론파의 리더였던 레바논 대통령 당선자가 암살되고, 레바논의 그리스도교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촌 두 곳, 즉 샤브라와 샤틸라에서 벌인 학살을 지원. 3일 동안 2,000~ 3,0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학살당함.
3. 팔레스타인의 저항
1)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
①파타
파타(FATAH)라는 말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뜻하는 아랍어 표기의 약자로 1959년 야세르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들이 쿠웨이트에서 만든 조직이다. 주로 해외에서 망명 정부 형태로 혁명운동을 지지해왔고, 이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생기면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속한 가장 큰 조직이 되었다. PLO의 상징적인 인물를 꼽는다면 아라파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친서방 팔레스타인인들과 손을 잡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압바스(현 파타 지도부)이다. 1990년대 들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생긴 뒤 2006년 1월 총선 때까지 자치정부의 집권당이었으나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등 조직 내부의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결국 2007년, 6월 선거에서 하마스에게 패배했다.
②하마스
하마스(Ḥamās: Ḥarakat al-Muqāwamat al-Islāmiyyah)는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며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난 1987년 성직자인 아메드 야신 등이 결성한 정치조직이다. 이슬람 종교를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1970년대 전까지 눈에 띄는 정치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점령의 상황에서 유대 이민자들에게 차별받는 아랍인들의 교육과 의료 등 사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1996년 최초로 실시된 팔레스타인 총선은 기만이라며 거부하였다가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 참여해 62.6%의 득표율로 총 132석 중 74석을 장악하며 제 1당이 되었다.
2) 저항의 확대
①1987년 1차 인티파다
이스라엘 군대가 탱크를 운반하던 중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 대열을 덮쳐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지자, 수십 년 동안 쌓여왔던 점령에 대한 불만이 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으로 번져갔다. 가자지구에서 시작된 인티파다(민중 봉기)는 곧 서안지구로 확산되었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 양심수 석방, 난민귀환, 자치권, 독립국가 등을 요구하면서 대중 집회와 총파업, 세금거부 등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스라엘은 통행금지조치와 학교 폐쇄, 무력 진압, 가택수색, 폭행 등으로 저항을 억압하였다. 인티파다 1년 동안 3만 명의 팔레스타인이 체포되었고, 2000년 2차 인티파다 전까지 1천명이 넘게 살해되었다.
⇒ 오슬로 협정(1993년)
1987년 1차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은 무력만으로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새로이 필요한 것은 소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통해 팔레스타인 민중을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은 PLO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오슬로 협정을 통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일부 지역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의 잠정 자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치가 가능한 지역의 면적은 서안과 가자 전체의 1/20도 안 되는 면적에 불과했고, 점령촌 지역에는 유대인 안전을 이유로 이스라엘군이
재배치되었다. 저명한 이스라엘의 비둘기파로 불리는 역사학자 슐로모 벤아미(Shlomo Ben-Ami)는 이스라엘 안보 장관으로, 에후드 바락크
정부에 몸 담기 직전 한 학술 저서에서 “사실상 오슬로 협정은 신(新) 식민주의, 즉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에 영원히 의존하는 삶이란 전제
위에 설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거의 전적인 의존을 강요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할 수
있다.
◎ 오슬로 협정에 따른 서안지구의 지역 구분
A 지역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행정과 보안을 완전하게 관할하는 지역(서안의 2%)
B 지역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관할 지역이지만 보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협력하는 지역(서안의 26%)
C 지역 이스라엘이 완전화게 행정과 보안을 통제하는 지역(서안의 72%)
②2000년 2차 인티파다(알 아크사 인티파다)
2000년 9월 28일, 당시 이스라엘의 극우 정당 리쿠드 당의 당수였던 샤론이 이슬람 3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것을 샤론과 당시 정치인들이 계산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항의 시위가 일었고 이스라엘 군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오슬로 협정 이후 심화된 빈곤과 이스라엘의 도로봉쇄, 점령촌 건설 등에 대한 분노가 샤론의 오만한 행동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조직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탄압에 맞선 무장투쟁을 벌였고, 팔레스타인 밖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저항하는 국제적인 연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져 이스라엘을 압박하였다.
백인 중심의 미국 건국사가 당시 수천년 동안 그곳에 살고있던 인디언의 학살사인 것처럼 역사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다른 것에서 나아가 그에 대한 판단과 비판을 해야 한다. 몇 백년이 지난 후에 인디언에 대한 학살과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잘못이었음을 후대가 인정했지만 현시대에 그러한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서는 유사한 차별과 억압, 살해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세계 7위에 이르는 군사비 지출과 미국의 막강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50년이 넘는 동안 죄없는 다른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하고 잔인하게 추방, 학살하였으며 그것에서 나아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인 양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유대인의 근면성과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언론과 활자매체, 영상매체를 통해 강력하게 홍보하고 선전하고 있다.
인종주의에 바탕한 이러한 오만과 인류에 대한 무례는 자국의 구성원에게조차 학살의 주체가 되게 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사회 내부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억압으로 나타나 인간성과 민주주의를 질식시킨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중립적 시선’이라는 게 가능할까. 한 발
떨어져 냉정하게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 보았다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온다. 현 시대 우리의 눈앞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을
우리는 객관적 시선으로, 관찰적 시선으로만 볼 수 있을까.
[글 작성에 참고한 자료]
안영민, 『자기 땅에서 추방당한 자들-이스라엘의 건국과 식민주의 비판』,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8.
타리크 알리, 『근본주의의 충돌』, 미토,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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