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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교리(상)

Joyfule 2016. 9. 16. 11:23

 

   이슬람교 교리(상)

 

 

이슬람교(아랍어: الإسلام al-islām 듣기 )또는 회교(回敎)는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며 '알라'를 단일신으로하는 종교이다.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 '신'이라는 뜻이며, 불교와 그리스도 신앙과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란 뜻은 "복종 · 순종"이란 뜻이다. 이슬람을 믿는 신자남자일 경우에는 무슬림이라고 하고 여자일 경우에는 무슬리마라고 한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쿠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아랍어: جبريل)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1]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하는 수니파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다. 수니파는 전체 무슬림 인구의 80-90%를 차지하며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2][3][4][5] 발칸 반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수니파 내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타종파 간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이 있다.[6]

 

 

이슬람의 휴일[편집]

  • 이슬람 신도나 국가는 금요일이 휴일이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금요일 (금요성일)을 일요일로 보아 모든 병원, 약국, 가게 등이 문을 닫고 쉰다.

용어의 정의[편집]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

  • 이슬람: 흔히 “이슬람교”라고 불리는 종교의 이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중국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며 이는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7] 이슬람은 복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간혹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믿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표기는 인정되지 않는다. 알라를 유일신으로 하는 종교다.
  • 무슬림: 이슬람에 복종한 자, 곧 이슬람을 믿는 이슬람 신자를 가리킨다. 여자는 무슬리마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쿠란
  • 쿠란: 이슬람의 경전 이름이다. “읽다”(아랍어: 카라아)의 동명사로서 그 뜻은 “읽기”이다. 이는 무함마드가 받은 첫 계시가 “읽어라! 창조주이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기존에는“코란”이란 표기가 많이 쓰였다. "꾸란"은 틀린 표기법이다. (쿠란 항목 참조)
  • 라술룰라(rasūlu-llāh): “성사(聖使)”라는 뜻으로 이슬람에서는 주로 무함마드(영어로는 마호메트)를 가리킨다. 성사는 “알라가 보낸 사람”을 뜻하며, 이는 예언자보다 격이 높다. 예를 들면; 이브라힘, 무사, 이싸 그리고 무함마드이다.
  • 이만: '믿음"이라는 말인데 이슬람의 믿음은 행위와 직접 관련된다. 대개는 “여섯 가지 믿음”을 가리킨다.
  • 이슬람의 다섯 기둥: 대개는 “다섯 가지 의무”를 가리킨다. “다섯 기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편집]

무함마드 이야기[편집]

무함마드의 유년시절[편집]

메카의 위치

 

이슬람의 성지(聖地) 메카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옛날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에비온파, 마르얌파, 네스토리우스교(경교) 등 마이너리티 기독교 신자들이 로마교회의 탄압을 피해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였기에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꾸라이쉬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하심가에는 압둘 무딸립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압둘라였다.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중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는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와 할아버지 압둘 무딸립에 의해 자라다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부 딸립에 의해 양육된다. 삼촌 아부 딸립은 가난했는데다 딸린 식구들이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 아부 딸립을 따라 시리아 지방으로 무역 대상을 떠나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네스토리아(경교) 수도사를 만나게 된다. 바히라라는 캬라반을 타고 가는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하였다.

카디자와의 결혼[편집]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마이너리티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비교인들도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종교적인 영감을 주었다. 신성한 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을 행하던 것은 사비교의 종교적 영향이다. 유대인들과 마이너리티 기독교 신자들의 영향으로 일신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카바 신전에는 360개의 우상들이 존재했는데 그 우상들은 '알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알라'라는 호칭은 이슬람에서 매우 중요한데 아랍어로서 '하느님'을 뜻한다. 즉, 이 세상의 절대적인 존재 "신"을 의미한다. '알라'는 이슬람에서 유일한 숭배의 대상이다.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딸립을 생각하며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딸립의 소개로 부자였던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무함마드의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현재의 시리아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정직성과 신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 25세 카디자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카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알리를 입양하였다.

무함마드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으나 무함마드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다. 네 명의 딸은 잘 성장하였으나 그의 아들들이 유아 때 계속 사망한 것이다. 당시 아라비아 사회는 건장한(몸이 크고 굳센) 남자가 대상무역을 떠나 성공하는 것이 영웅시 되던 때였기에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하였다. 무함마드의 부와 명예로 인해 사람들은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인 부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함마드는 히라산 동굴에서 첫 계시가 임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와 죽은 듯 했는데 부인이었던 카디자가 무함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삼촌이자 에비온파 기독교인이었던 와라까 븐 나우팔에게 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까는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말하였다. 카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삼촌이 말한 것을 모두 알려주었고 그의 예언자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무함마드)는 이슬람에서의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 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단일신 알라(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단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카바 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메디나로의 피신[편집]

메디나의 위치

무함마드는 AD 619년에 큰 슬픔을 얻게 된다. 첫 무슬림 신자이자 자신의 큰 후원자였던 부인 카디자가 죽은 것이다.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던 삼촌 아부 딸립도 그 해에 세상을 떠난다. 무함마드는 고통속에서도 줄어들지 않는 박해와 핍박에 대항하기 위해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로 결정, 자신의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와 결혼을 추진한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가 50이었고 아이샤의 나이가 9살이었다.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이를 피하여 622년 메카 북방 약 400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 행을 이슬람에서는 ‘히즈라("이주")’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말이 멈춘 수하일의 과수원 땅을 사서 최초의 사원과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씩 알라(하나님)는 위대하다고 암송하며 절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선지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아라비아 부족의 통일을 꿈꾸기 위해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지 않는 형태의 이슬람교 조직 체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즉 제정일치의 사회를 무함마드는 추구했다.

메카정복[편집]

AD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카바 신전을 순례하러 가기로 결정한다. 그해 3월은 아랍에는 신성한 달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메카의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전쟁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2년에서 10년까지의 평화조약을 요구하고 무함마드는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2년 후 AD 630년 1만명의 무슬림은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메카로 향하였고 결국 메카로의 무혈 입성을 이루어낸다. 메카로 입성한 무함마드는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쳤고 무슬림들이 따라 외쳤다.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다 부숴버렸고 유일신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포를 했다. 그때 메카의 모든 집에 있던 우상들이 다 부숴졌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보름을 지내고 메디나로 돌아와 이듬해 아라비아 북서쪽 타북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AD 632년 무함마드는 메카카바 신전을 참배하고 메디나로 돌아오던 중 심각한 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 사후[편집]

정복전쟁[편집]

아랍 제국("칼리파 시대")의 영토
622-632: 무함마드 시대의 영토
632-661: 정통 칼리파 시대에서 확장된 영토
661-750: 우마이야 칼리파조에서 확장된 영토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파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 이라크 · 북부 메소포타미아 · 아르메니아 · 이란 ·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Poitiers)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 강의 싸움에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가 이끈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750-1258) 초기 100년간은 칼리파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 튀니스 · 중앙아시아 · 이란 동부 ·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파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820년의 아바스 왕조(750-1258)와 세계의 제국들: 아바스 왕조이슬람의 황금 시대(9-11세기)를 열었다.

투르크의 이슬람화[편집]

가즈나 왕조(963-1187)의 최대 판도
1300-1683년 동안의 오스만 제국(1299-1922)의 판도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 산맥 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가즈나 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2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비잔틴 정복[편집]

이와는 달리 셀주크 제국과 교체된 오스만 제국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 제국(330-1453)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 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 인도네시아 ·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