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인생 역정
다윗:David(인명)
(Dauivd, David) 「사랑함」
이스라엘 제 2대의 왕(재위 BC 1060-1021, 1010- 971)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다 지파 이새의 막내 아들로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다. 고대의 전설에 따르면, 다윗의 재위는 BC 1055- 1015이라고도 한다. 그의 출생도 BC 1085년, 또는 BC 1040년(삼하 5:4에 근거)설이 있어 구구 각각이다.
다윗에 관한 이야기는
① 사무엘상 16장- 열왕기상 2장 까지와,
② 역대상 2, 3, 10-29장의 기사,
그리고 ③ 많은 시편의 표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중에서 ①은 가장오래된 것으로서 가장 신빙할 만한다. 역대서에 기록된 역사의 대부분은 직접 사무엘서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또 이외의 자료에서 인용한 것도 적지 않다. 이 책에 기록된 다윗은 이상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자로서 경신자(敬神者)의 본으로 생각한 기원전 3세기의 경건한 유대인의 마음에 그려진 자이다.
또, 시편 중 73편은 그 표제에 다윗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다윗의 생애에 일어난 어떤 특수한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시편으로 다윗의 역사, 또는 성격을 증명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다윗의 역사로서 우리가 증거할 것은 주로 사무엘 전후서(왕상 1,2장과같이)이다. 사무엘상 9-20장과 역대상 1, 2장의 기사는 가장 오래된 것이고, 가장 귀중한 것이고, 기타 저서는 비교적 만대(晩代)에 속한다고 한다. 이제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살펴보자.
(1)목동 다윗: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지냈다. 8형제 중 막내(삼상 16:10,11,17:12-14)인데, 계보(대상 2:13-15)에는 7명밖에 없다. 그 중 한 사람은 자식 없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새의 조상에 대해서는 사무엘서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룻기의 계보에 이새는 오벳의 아들, 보아스의 손자로 되어 있으며, 베레스까지 올라갔다(룻4:18-22). 다윗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섬긴 경건한 부인이었다(시 86:16,116:16). 그의 조상에 대한 기록은 아름답고 훌륭하나, 때로는 죄의 오점(汚點)도 섞여 있다(창37:26,27,38:13-29,43:8, 9, 44:18- 34, 민 1:7,수 2:121,룻 4:17-22).
소년 다윗은 혈색이 좋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삼상 16:12). 아버지의 명령으로 양을 지키고 있을 때, 덤벼드는 사자나 곰을 쳐 죽여 임무에 대한 충실성과 용기를실증했다(삼상 17:34-36). 음악적 소질이 비상하여 이 무렵 수금을 잘 탄다는 것이 알려졌고, 전술한 바와 같이, 후에는 시도 많이 썼다.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사울의 뒤를 이를 자로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였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가서 그의 아들들을 차례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시므로써, 일곱 아들은 택하지 않으셨다. 이 때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막내 다윗을 불러오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고 말씀하시니, 사무엘이 기름뿔을 취하여 다윗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그는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그러나, 이 때 사울의 적의(敵意)를 일으키게 할까봐 아무런 공적 선언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곳 장로들 앞에서 행해졌다는 점에 공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기사에 한해서는 이 기름 부은 목적이 사람들에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삼상 16:4,5,13). 그러나, 이새와 다윗에게는 말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제 1의 전기(轉機)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크게 임하셨다. 그러나, 그는 일상자기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2)사울을 섬긴 다윗: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으며, 우울병에 걸려 광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고는 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의 병이 도질때, 그의 위로가 되게 수금을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해서 가까이 모시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진언했다. 한 신하가 다윗을 추천하면서 수금을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말했다.
사울은 다윗을 불러다가 음악으로 위안을 받고, 그의 인품도 또한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드는 자로 삼았다(삼상 16:19-23삼하 18:15). 이렇게 비롯된 다윗의 새 일은 그에게 대하여 좋은 훈련이기도 하였다. 그는 군사와 정치를 배우고, 유능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궁중 생활의 좋은 면 뿐만 아니라 나쁜 면도 관찰했다.
그러나, 아직 다윗은 상루 옆에 늘 붙어 있지 않고 사울의 병증세가 나을 때는 베들레헴에 돌아와 양을 쳤다(삼상 17:15). 다윗이 집에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이 유대에 침입하여 베들레헴의 서쪽 24km 지점에 포진했다. 사울은 이스라엘 군을 이끌고 이를 맞았다. 다윗의 세 형은 이 군대에 들어가 있었는데, 종군 6주일 후 아버지는 그들의 위문을 위해 다윗을 보냈다. 다윗이 전장에 이르러 형들에게 문안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싸움을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는 자가 항오에서 나와 도전하는 오만불손한 말을 듣자, 다윗의 마음은 끓어 올랐다. 이스라엘 군은 무서워 도망쳤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는 많은 재물과 딸을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하겠다고 현상을 걸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모욕을 제거해 주시리라 확신하고, 이렇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다윗은 사울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의 결심을 표명하니, 사울은그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축복하고, 자기 군복과 놋투구, 그리고 갑옷을 입히고 칼을 채웠으나, 그는 이를 사양했다. 골리앗은 무거운 투구를 입고 있어 동작이 둔하여 접근하지 않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윗은 매끄러운 돌다섯 개와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을 대적하러 나갔다. 하나님에게 대한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대적에게 향한 것이다. 골리앗의 큰 호통과 저주에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고 말하면서, 돌을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치자, 그는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삼상 17:49).
다윗이 달려가서 골리앗의 머리를 베니 대적들은 도망치고 이스라엘과 유다 군은 대승하였다. 그는 골리앗의 머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칼은 성막에 바쳤다(삼상 17:54,21:9).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나갈 때, 또 승리자로서 돌아왔을 때, 그가 누구 아들인가라는 질문은 다윗의 가계(家系)에 대한 사울의 관심에 관계가 있었다(삼상 17:55). 왜냐하면,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는 딸을 주고, 그 아비의 집은 면세(免稅)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삼상 17:25,18:18). 사울은 다윗이 자기 사위로서 부끄러울 것 없는 가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골리앗에 승리한 것은 다윗 인생의 제 2의 전기였다.
이때부터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깊은 우정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나단은 그를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했다(삼하 18:1). 이 두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기도(企圖)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행해졌으나, 이렇다할 만족을 얻지 못했다.
다윗은 그때부터 궁중에 있게 되고, 자기의 집으로 가는 것을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그에게 겉옷˙군복˙칼˙활˙띠 등을 주었다. 다윗이 사울의 시키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잘 처리하니 왕은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다. 이렇게 그가 궁중에서 지위는얻었지만, 그의 명성때문에 사울의 질투를 받았다. 즉, 다윗이 개선할 때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 노래하며, 춤추며, 북을 치면서 환영했는데, 그들은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뛰놀며 화창했다. 이 말을 들은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다(삼상 18:6-9). 나라를 자기보다 나은 자의 손에 주셨다는 사무엘의 예언(삼상 15:17-29)이 다윗에게 실현된다고 본 사울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했다(삼상 18:10,11).
즉, 왕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피하여 실패했다. 사울은 그를 두려워하여 멀리하기 위해 천부장으로 삼았다(삼상 18:13).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은 다윗을 사랑하였다.사울은 다윗의 아내로 주겠다던 맏딸 메랍을 아드리엘이라는 자에게 주어 그 약속을 어겼다(삼상 18:17-19). 또 사울은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을 가져오면 딸을 주겠다고 말했다. 다윗도 미갈을사랑했으므로 그는 블레셋 사람 200을 죽이고 그 양피를 왕에게 바치고 사위가 되었다(삼상 18:20-27).
다윗의 평판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사울의 두려움도 커졌다(삼상18:29,30). 이렇게 되니 다윗을 없애려는 살해 의도는 공공연하게 되었다(삼상 19:1).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공공연히 내렸던것이다.
다윗을 사랑하는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려하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무슨 일이 생기면 알리겠다"고 하고 왕에게 나가서 다윗이 아무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울이 아들의 말을 받아들여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므로 다윗이 다시 왕 앞에 있게 되었다. 그 후 전쟁이 다시 일어나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무찔렀다(삼상 19:8). 사울에게 악신이 접하자, 수금타는 다윗에게 그는 또 창을 던졌으나, 이번에도 이를 피한 다윗은 그 밤에 집으로 도망쳐 갔다. 그리고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창문에서 달아 내리움을 받아 성밖으로 도망쳤다(삼상 19:17).
다윗은 그 길로 사무엘을 찾아 라마 땅 나욧으로 갔으나, 추격의 손길이 그 곳까지 미치었다(삼상 19:18-22). 그리하여 다윗은 요나단에게로 도망쳤다. 요나단은 다윗을 에셀 바위에 숨겨두고, 월삭제의 축연에 나가 다윗을 변명해 주다가 아버지 사울에게죽을 뻔 했다(삼상 20장).
(3)쫓기는다윗: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놉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왕명이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먹을 것과 칼을 얻었다. 여기서 다윗의 옛날 신앙과 용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삼상 21:1-9). 그 곳에서 다윗은 사울의 대적인 아기스에게 보호를 구하여 가드로 갔다.
그러나, 이 블레셋(가드는 그 5개 중요 성읍의 하나) 왕은 그의 보호를 거부하고 오히려 붙잡았으므로(삼상21:14,시 56편표제)다윗은미치광이를 가장하여 간신히 석방되었다(시 34편표제).그는신앙을다시 찾고(시 34편)유대로돌아와아둘람 굴에 숨었다(삼상 22:1).
그러나 그의 부모는 모압으로 도망갔다(삼상 22:3,4).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사모하여 부하로 따랐다. 그 중에는 놉의 제사장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도 있었으므로(삼상 22:5,20,26:6) 신앙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다윗은 그일라의 위급함을 듣자, 자신의 위험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구출했으나, 그는 배신하여 다윗을 사울에게 내어주려고 하였다.
이 때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 위로하고 장래 다윗은 왕이 되고, 자기는 그 다음이 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갔다(삼상 23:1-18). 이 시기에 다윗은 몇 번씩이나 사울에게 목숨을 빼앗길 뻔한 아슬아슬한 일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으므로 모면했다. 그는 어떤 때는 사울의 생명을 구해 주기도 했다.
한번은 다윗과 그 일행이 동굴에 들어가 있는데, 사울이 잠을 자기 위해 그 굴에 들어왔으므로 그를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기름부은 자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일행의 결행을 만류하고, 후일에 증거로 삼기 위해 겉옷 자락만을 가만히 벴다. 다윗은 그 후 사울에게 그 옷깃을 보이면서, 자기의 살의가 없음을 사울에게 애소하였다. 사울은 일시적, 또는 감정적이나마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삼상 24장).
다윗과 그 일행은이스라엘 사람의 재산을 도적의 손에서보호해 주고(삼상 23:1,25:16,21,27:8) 그 사례로써 식물을 받았으나, 조세와 같이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발의 무례한 거절에 대해서는 하마터면 큰 피를 볼 뻔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현명한 조처로 화를 면하고 후에 그녀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삼상 25:24-34). 또 한번은 자기를 추격하는 사울과 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거느리는 정병 3,000의 진에 잠입하였다가 취침하는 사울을 죽이라는 부하를 타이르고 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서 아브넬의 불충을 책망하였다(삼상 26:5-16).
그 후에도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유대를 떠나 블레셋(가드)으로 다시 건너가 아기스 왕에게로 갔다. 그는 시글락이라는 한 성읍을 얻어 거기서 살았다. 그는 생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구원<舊怨>도 있지만) 아멜렉을 쳐서 우양을 노략질하고도 아기스에게는 유다를 쳤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또 실수를 했다. 거기서 그는 1년 4개월지냈다(삼상 27장).블레셋사람과사울이 길보아에서 싸울 때에, 다윗은 다행히 참전을 면했다(삼상 28:1,2,29장).
이 전쟁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그 부자(父子)를 위해 애가(哀歌)를 지었다(삼하 1장).
(4)유다왕으로써의 다윗:
사울의 죽음으로 다윗은 유대 사람에게 왕으로 추대되어 헤브론에서 살면서 유다를 다스렸다(삼하 2:1-10). 때에 그의 나이는 30세였다(삼하 5:4). 그리고 이스라엘의 다른 11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2년 간양 자의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이 전쟁은 이스보셋이 암살됨으로써 끝났다(삼하 2:12-4:12).
다윗의 헤브론 시대는 7년 반 계속 되었으며, 점점 강하여져 여섯 아내로 부터 여섯 아들을 얻었다. 이것은 가정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아 다윗에게 대립시킨 것은 아브넬의 소위(所爲)인데, 그는 자만하여 사울의 첩과 상통하였는데 이스보셋이 이를 책망하자 아브넬은 다윗에게 충성키로 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베냐민인을 규합하여 다윗에게 귀순하였다. 그의 태도는 야비하나, 다윗을 이스라엘 전국 왕으로 추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삼하 3:1-21).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했을 때, 다윗은 이를 슬퍼하여 장사하고 애가를 지어 부르니 전 국민의 신뢰감은 더욱 두터워졌다.
(5)이스라엘 왕으로써의 다윗:
이스보셋의 사망으로 다윗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로부터 왕으로 추대를 받음과 동시에, 왕국 확립 사업에 착수하였다(삼하 5:1-5). 당시 이스라엘의 성읍 몇 개는 블레셋과 가나안 사람에게 빼앗겼었다. 다윗은 우선 여부스사람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것을 수도로 하였다. 이 도성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경계에 있으므로 양자의 반목을 완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도성이 가나안 사람의 손에서 해방된 것은 남북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왕국의 결합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후 블레셋 사람이 두번씩이나 침입했으나, 다윗에게 완패하여 왕국은 평정되었다(삼하 21:15-22). 나라가 안정되자 다윗은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에게 빼앗겨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다(삼하 6장).이때다윗은소를잡고 전 국민과 더불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노래 부르며 춤추었다. 다음에는 예배 의식을 성대히 정하고(대상 15,16장)웅장한성전건축을 계획하였다(삼하 7장,대상17장).나라의안전을공고히 하기 위하여 또 우상 종교로부터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주변 제국과 싸워 이를 정복하여(삼하8장, 10장, 12:26- 31) 그 국경은 옛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까지 확장되었다(창 15:18).
또한 다윗은 사울의 유족을 찾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자처럼 후대하여 옛 친구의 은혜를 갚는 것도 잊지 않았다(삼하 9:9-13). 다윗 왕권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융성하였으나, 한 큰 범죄로 그의 영혼은 급전직하 흑암의 무저갱으로 떨어지게되었고, 가정은 고통 당하게 되었다.
즉, 그가 헷 사람 우리아에 대해 큰 죄를 범했는데, 이것은 대(對) 암몬 전쟁때의 일이다. 다윗이 왕궁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나 충장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목욕하는 것을 보고 음욕이 일어 불러다가 간음하여 잉태케했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일선에서 우리아를 소환시켜 그 아내와 동침시키려고 했으나,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일선 장병을 생각하고 왕의 귀가 권유를 사양했다. 다윗은 음모가 실패하자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아를 사지에 몰아넣도록 하여 죽게 했다. 그리고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였다(삼하 11장).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비유를 들어 죄를 핑계치 못하게 한 다음, 단도직입적으로 책망케했다(삼하 12장).이에다윗은즉시진심으로 회개하였다(시 51편).하나님의 징계는 일부는 직접, 일부는 이후의 사건 중에 당연한 결과로써 나타났다. 불의의 씨인 아들이 죽고(삼하 12:19) 불법적인 욕정과 복수는 그의 가족을 파괴했다. 불효한 왕자의 야심은 내란으로까지 발전하고(삼하 13-19장)이때의여파는그 후 다시 한번 세바의 반역으로 나타났다(삼하 20장).즉,이복남매암논이 다말을 욕보이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몬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 후 부왕의 용서를 받고 귀국한 압살롬은 인심을 얻어 왕인 아비에 반역했므로,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고,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러나 다윗 군과 압살롬의 군이 싸울 때에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살해되었다.
내란이 일단 끝나자, 다윗은 민심을 잘 수습하지 못한 채 환궁하였다. 국권이 회복되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병원수(兵員數) 증강을 위해 인구 조사를 하므로써 인본주의, 교만죄에 걸려 하나님의 징계를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갓을 통하여 ⓧ 3년 흉년, ⓨ 3개월 대적에게 쫓김, ⓩ 전국에3일간의 온역, 이 세 가지 중에서 택일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께 징계 받기를 원해ⓩ을 택했다. 그 결과 죽은 자가 7만 명에 달했다.
다윗의 치세는 솔로몬의 즉위 확정, 요압과 시므이에 대한 처벌 및 바실래의 후손에 대한 후대를 유언함으로써 끝났다(왕상 1장,2:1-11).
그는 40년 치리했는데, 7년 반은 헤브론에서, 33년은 예루살렘에서 하고, 71세에 사망했다(삼하 5:4,5,왕상 2:11).
결론적으로 다윗은 일찍부터 이스라엘의 가인(歌人)으로서 명성을 떨쳤다(삼하 23:1). 히브리 전설에서는 시편의 태반은 상술한 바와 같이 다윗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음악을 애호한 것, 수금을 잘 탔다는 것, 성전에서 부를 찬송가를 지었다는 것 등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삼상 16:18-23,삼하 6:5,대상 6:31,16:7,41,42,25:1, 암 6:5,스 3:10,느 12:24,36,45,46). 시편 중 73편은 히브리어의 표제로 다윗의 작품이라고 한다.
59편과 7편은 아직 다윗이 사울의 궁전에 있을 때,34˙52˙54˙56˙57˙63˙117의 각 편은 피난의 곤란한 시기에, 그리고 3˙18˙30˙51˙110편 등은 그가 왕이 되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있을 때의 작품이다. 그는 큰죄를 범하여 흑암의 시기도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였다.
그는 우리아의 일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왕상 15:5).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행 13:36). 그가 인류에게 준 감화는 너무나 크다.
그의 시편은 몇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 교회에서 애창되어 그의 영적 영향이 후대에 까지 미치고 있다. 다윗이야말로 다음에 오신 `다윗의 자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주'이신 분을 위해 그 조상들의 계보 사슬 중에서 특히 중대한 고리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마 1:1,22:4145).
<참고>
약속된 크신 임금, 즉 메시야도 역시 '다윗'이라고 불리운다(렘 30:9,겔 34:23,호 3:5). 오래전부터 메시야의 나라도 '다윗의 나라'라고 불리워 오고 있다(막 11:10).
즉, 거기서 주님은 '다윗의 위'에 앉아 다스리며(렘 22:2,4),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계 3:7). 이 모든 표현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한량없으신 자비를 말하며(사 55:3,삼하 7:12), 곤고한 날에 이스라엘의 의지와(시 89:3,4,20,35,49,렘 23: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행 2:29)을 말하며, 특히`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마 1:1,막 10:47,눅 20:41)으로도 발견된다.
바벨론의 포로 이후 메시야의 내림의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야를 다윗의자손으로서 다윗의 왕국을 재현할 이상의 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삼하 7:12,13,사 9:7,16:5,렘 23:5,30:9,겔 34:23,24,37:24).
이와 같은 배경에서 메시야는 다윗의 가계(家系)와 연결되는 관계상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의 칭호이다. 마태의 계보(마 1:1)는 물론 바울도 로마서 1:3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혈통(씨)에서 나셨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칭한 일은 없지만, 최후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부르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으셨다(막 10:47). 메시야인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에는 계보 이외에도 이 호칭이 눈에 띄게 많다(9:27, 12:23, 15:22, 20:30, 31, 21:9, 15).
또, 주의 통치에 대하여 예루살렘 거민 중에서 가장 약한 자가 그날에는 다윗과 같게 된다는 예언도 있다(슥 12:8).
참조 : 성경 인명 사전
다윗의 주변 사람들
사무엘 상(上)을 자세히 살피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인물들이 기록된다. 엘가나 가문과 엘리 가문, 엘가나의 아들 사무엘과 엘리의 두 아들들 그리고 다윗과 사울 왕 등등이다. 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고 그리고 다른 종말을 맞았다.
이 차이는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하느냐 즉 언약의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 여부에 있었다. 이에 대해 사무엘서 자체가 이렇게 증언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절 하반절)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원인임을 이 인물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사무엘서는 또 다른 관계를 은근히 강조한다. 그것은 다윗과의 관계였다. 사람들이 다윗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달라졌다. 이들 관계를 살핀다면 신약 시대 신앙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구약 시대 다윗과 이스라엘 사이 관계는 신약 시대 부활 전후(前後) 예수님과 교회 사이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다윗이 구약 시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모형(模型)이었다면 예수님은 신약 시대 원형(原型)으로 참 그리스도이다. 시편은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6-12절)
구약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전기(傳記)가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이유이다. 이 교훈을 위해 다윗의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자 한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
사울은 벤냐민 지파 출신으로 기스의 아들이었다(삼상9:1-2절). 처음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 그는 너무나 부끄러워했다(삼상10:22-23절). 이 때 공식적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잠잠했다(삼상10:27절).
얼마 후 사울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승전(勝戰)했다. 이 때 사울이 어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비웃던 사람들을 죽이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11:13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울 왕은 변질되었다. 블레셋이 공격하자 다급한 나머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왕인 사울이 직접 하나님께 드렸다(삼상13:8-9절). 그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13절). 이를 안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13:13-14절)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였다. 외면적으로 사울이 왕이었지만 사실적으로는 하나님이 왕이었다. 그러므로 왕이라 해도 사울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군왕의 덕치(德治)가 아닌 하나님의 법에 근거를 둔 법치(法治)에 철저한 하나님 나라였다. 이 법치를 거부한다면 왕이라도 폐함을 받았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이 후에도 사울 왕은 법치보다 자신에게 의존되는 덕치를 시도했다. 이런 시도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세상 나라 또는 인간 나라로 만들려는 것과 같았다. 이를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세워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면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불경건한 의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났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는 아말렉을 전멸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목축들을 살렸다(삼상15:8-9절). 그 이유는 백성의 인기를 탐함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21절). 이를 안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절)
법치를 버리고 덕치를 택한 사울은 완전히 폐함을 받았다. 이 후에 사울은 더욱 더 이스라엘을 자기 개인 가문의 왕국으로 알고 처신했다. 이 때문에 자신보다 더 유능한 다윗이 나타나 백성의 칭찬과 인기를 얻자 그를 죽이려 했다(삼상18:7-9절).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할 목적으로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더 유능한 하나님의 종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 그는 기꺼이 물러날 마음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모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오히려 변호하며 보호하려 하자 노하며 이렇게 말했다.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삼상20:30-31절)
요나단은 사울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문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아는 요나단은 끝까지 아버지를 거역했다. 요나단은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불의한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달랐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는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 후 발생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패전했고 함께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겉으로 보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사이 어떤 차이도 없었다. 외면적인 결과로 의인과 악인 사이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이다. 기복주의 신앙은 이 점에서 잘못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믿음을 소유한 의인의 죽음이었다면 그의 아버지 사울은 악인의 죽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아들로서 마지막까지 아버지 사울과 함께다.
요나단은 효도로 나타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절)의 소유자로 그 시대의 의인(義人)이었다. 사랑을 버린 믿음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럽기 때문이다(고전13:3절). 여기 사울과 요나단 사이 또 다른 대조가 나타난다. 이들은 같은 가문에 속했지만 다윗에 대한 믿음 여부에 따라 서로 완전히 달라졌다. 다윗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같은 식구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또 다른 교훈이 있다. 불신앙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인간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이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이 점에서 사울은 목회에 성공한 후 교회를 자기의 개인 기업처럼 취급하는 목회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나님의 부름으로 세움 받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목회에 성공했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것으로 착각한다.
사울 왕의 경우처럼 이들도 세상의 명예, 재물 그리고 권세에 대한 탐욕이 거부하지 못한다. 이것이 결국 불신앙의 원인이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를 더 사랑한다. 그리고 구약 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심판이 당장 시행되지 않아 더 담대하게 이들은 행동한다. 그러나 앞으로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클지 이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도 참으로 불행이다.
그리고 사울은 그 당시 정권을 잡은 지도자였다. 그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직접 다윗을 핍박했다. 이것은 참 메시아인 예수님이 자신의 시대 권력을 잡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과 아울러 동족(同族)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예언한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포도원으로 상징된 유대 나라를 이미 사유화하는 불경죄를 지었다(마21:33-40절). 이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더 핍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넌더리 나는 현상은 오늘날의 기독교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진다. 이를 본 일부의 신자들은 기독교를 탈퇴하고 순수하게 예수님의 제자로서 신앙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오늘의 기독교 교회가 신부의 권위가 지나쳤던 중세 카도릭 교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보여지는 이런 현상은 예수님 재림까지 기독교 교회에서 계속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요나단 같은 의인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목회자와 그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동참하지 않는다. 이들이 교회 안에서도 핍박을 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들은 교회가 위기를 맞아도 끝까지 교회에 남아 교회를 위해 변함없이 헌신한다. 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위해서도 말이다.
다윗을 따른 비류(匪類)들
다윗이 사울 왕에 의해 핍박을 받으며 고난 당할 때 그와 함께 한 자들이 400명이 되었다. 이들은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 그리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삼상22:1-2절). 그는 이들의 장관이 되었다.
사울은 벤냐민 지파라면 다윗은 유다 지파였다. 사울이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유다 지파 출신을 분명히 억압했을 것이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주로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빚진 자들과 마음이 원통한 자들도 합류했다. 사울의 통치 아래 고난을 당한 무리들일 것이다.
사울 왕으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다윗은 비슷한 어려움을 당하는 무리를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이들도 다윗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에 있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이들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 흔히 단합이 잘 된다. 이들은 다윗을 잘 섬기며 서로서로 잘 도왔다. 그러나 이들 사이 어떤 이해관계가 생기면 이들은 쉽게 갈라지고 분열할 수 있었다. 이 때 다윗을 따르는 무리 중 진실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다윗은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블레셋 왕에게 자신을 의탁해야 했다. 이 때 시글락이라는 마을을 얻었다(삼상27:6절). 어느 날 블레셋이 사울 왕을 공격하려 했다. 이 때 다윗도 할 수 없이 블레셋 군대와 함께 했다. 이 틈을 노리고 아말렉 사람들이 여인들과 아이들만 남아 있었던 시글락을 공격했다. 성을 불 태우고 다윗의 부인들을 비롯한 여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끌고 갔다.
나중 이를 안 다윗의 수하들이 비통한 마음에서 다윗을 돌로 치려 했다(삼상30:6절). 이들은 무리 중 다윗을 전적으로 믿지 않은 악한 자들이었다. 다윗을 따르는 무리 중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이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사울 왕의 압박을 받게 되어 할 수 없이 다윗에게 붙어야 했을 것이다. 다윗은 알면서도 이들을 받아주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서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힘 입어 용기를 얻었다(삼상30:6절 하반절). 그리고 아말렉 군대의 뒤를 따라 가 승전과 그 결과 얻은 탈취물로 인해 즐거워하며 술에 만취한 군대를 공격하여 물리치고 잃은 사람들과 탈취 당한 모든 물건들을 되찾았다. 이 뿐만 아니라 이 위에 더 많은 탈취물을 얻었다(삼상30:16-20절). 다윗은 이 탈취물들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들에게도 공평하게 나누어 주려 했다. 이 때 악한 자들과 비류들이 일어나 다윗의 제안에 반대했다(삼상30:22절).
이 사실은 놀랍다. 성경 자체가 다윗의 고난 중 그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 악한 자들과 비류들이 있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여기 비류는 다윗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할 수 없이 일시적으로 다윗에게 연합한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이들은 지금 고난 당하는 다윗이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란 믿음 하나로 똘똘 뭉쳐진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
그럼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자신의 불의(不義)로 인해 사울 왕에 의해 처형될 것을 알고 다윗에게 도망 쳐 할 수 없이 합류한 자들이다. 다윗에 대한 믿음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형편상 일시적으로 따르긴 하지만 혹시 다윗이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을 없을 것이다.”
기독교 교회 안에도 이런 신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신앙의 동기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들은 일시적으로 교회의 적을 둔 다. 이들이 이해 관계에 따라 민감하게 행동하는 이유이다. 때때로 이들로 인해 교회가 시끄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고 이들이 말하는 한 기독교 교회는 이들을 강제적으로 내보낼 수 없다. 이 때 이들의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여부는 둘째 문제이다. 이를 교회는 판단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신앙 고백의 진실성을 알 뿐이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교회의 약점이다. 예수님이 말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이 사실은 잘 증명된다(마13:28-30절). 어디서나 알곡과 가라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구약 성경은 신약 성도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이들 때문에 다윗 왕국이 무너진 적은 없었다. 하나님 나라는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 30배, 60배 그리고 100배 번성한다(마13:23절).
다윗의 아들들
암논은 다윗의 장자였다(삼하3:2절).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 고난을 당할 때부터 다윗을 따르며 열심히 섬긴 이스르엘 출신 아히노암이 헤브론에서 난 아들이었다. 장자(長者)는 아버지의 능력이며 기력(氣力)의 출발로써 그 영광은 탁월하다(창49:3절). 그런 탁월한 영광을 암논은 출생 때부터 가졌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그리고 아버지 다윗을 생각하며 암논은 경건하게 처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지위와 영광은 때때로 불완전한 인간으로 하여금 조심성 없이 즉 불경건하게 행하게 만든다. 암논은 자기의 이복 동생인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미모가 불러일으킨 욕정 때문에 사랑했다(삼하13:2절).
공식적인 절차를 취했다면 얼마든지 그녀를 정식 부인으로 그는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압적으로 여동생을 취했다(삼하13:10절). 단순히 정욕을 채울 대상으로 보았다. 한번 불 타기 시작한 욕정은 그를 기다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설사 실수와 잘못을 범했어도 그는 동생 다말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해야 했다. 그러나 욕심을 채운 후 그는 다말을 몰인정하게 버렸다. 이것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더 나빴다(15-18절).
왜 그랬을까?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자신도 아버지 뒤를 이어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믿음과 신앙이 그에게 전혀 없었다. 늘 아버지 다윗 옆에 가까이 있어 이런 믿음을 얼마든지 공유(共有)할 수 있었지만 그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인 아버지와 그의 왕자라는 사실이 주는 세상 영광과 지위 그리고 명예만 탐함으로 그만 영적 눈을 상실했다. 그 결과 힘으로 자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으려는 세상 나라 왕들의 작태를 보였다. 결국 그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벌거벗은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법치보다 군왕의 덕치를 선택했다.
이 점에서 그는 에서처럼 배고품을 면하려고 장자직분을 팟죽 한 그릇에 판 에서와 같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자기 집 터에 감추어져 있음도 모르고 다이아몬드를 구하려 먼 나라로 간 사람과도 같다.
암논은 성욕으로 인해 망하는 과정 중에 있는 목회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왕자라는 신분이 즉 목회자라는 영광스런 신분이 욕정을 자제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껏 채우도록 돕는다. 성직(聖職)에도 이런 위험스런 면은 얼마든지 있다. 이들은 일시적인 성욕에 사로 잡혀 영광스런 소명과 사명 그리고 앞으로 받을 찬란하고도 영원한 상급을 버린 불쌍한 자들이다. 목회자가 자기부정에 남달리 노력해야 할 이유이다.
다윗의 삼남 압살롬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여동생 다말의 치욕을 안 그는 참으며 앞으로 복수할 기회를 찾았다. 암논은 다윗에게 사랑을 받는 장남이었 때문이다(22절). 속으로 칼을 품은 체 아무렇지 않게 형 암논을 대했다(삼하13:20절). 같은 집안에 이런 형제들이 함께 살았다. 2년 뒤 압살롬의 집에서 양 털을 깎는 좋은 일이 생겼다. 이 때를 이용하여 압살롬은 왕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했고 이 때 암논을 죽였다(27-29절). 그리고 도망쳐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다(37절).
그는 복수의 화신(化神)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왕자라는 영광스런 신분도 기꺼이 무시해 버릴 수 있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과 다윗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압살롬의 복수 행위도 믿음의 부족에서 나왔다. 아버지 다윗과 그 사역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처럼 힘으로 악(惡)을 악(惡)으로 갚으려 했다. 아니면 아버지 다윗에게 요청하여 암논이 다말을 정식 부인으로 취하도록 상고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해도 아버지의 인격과 선함을 끝까지 믿고 그는 기다려야 했이다. 자녀로서 가문의 가장(家長)에게 순종해야 했다.
더 나아가 그는 다윗의 하나님이 공의로운 신(神)임을 믿었어야 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며 자신의 경건에 더욱 힘써야 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생한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늘 복수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다윗 가문의 왕자들끼리 피를 부르는 정말 부끄러운 비극과 불행이 일어나도록 스스로 자청했다. 아버지 다윗과 그를 세운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압살롬은 이방 나라의 왕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바른 믿음만이 성도들로 하여금 악을 선(善)으로 갚도록 돕는다. 압살롬에게는 이런 믿음이 없었고 그 결과 실족했다. 아니면 지나친 복수심이 믿음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목회자들 중 자신에게 도전하는 신자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일일이 억압하려 한다. 특히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일수록 그렇다. 자신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그는 사전에 성도들을 양육시킨다. 한국 신자들은 이를 카리스마로 보며 좋아하는데 이런 카리스마는 목회자를 독제자로 만든다. 카리스마가 목회자로 하여금 스스로 멸망의 길를 가도록 만든다.
나중 아버지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하고 복권시켰다(삼하14장).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이용하여 나중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역모(逆謀)하여 정권을 빼앗으려 했다(삼하15장). 이로 보아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양 털 깎는 날 초청한 것도 이런 역모의 의도를 숨겼을 것이다(삼하13:24절).
이런 왕자의 난은 이방인의 왕국에서 자주 목격되는 현상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불경건한 사건이 다윗 집안에서도 발생했다. 그것은 압살롬이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믿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아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믿음만이 이스라엘을 달리 보게 만들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에게도 이런 불경건이 발견되었다. 다윗이 노년(老年)을 맞았다. 그러나 왕위 계승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만 아도니야를 시험했다. 이 유혹이 심했던 아유는 장남 암논과 삼남 압살롬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남 길르압(또는 다니엘)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인물이거나 또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무능하거나 약한 형이었을 것이다. 아도니야는 자연적 서열에 의해 자신이 왕위의 적합한 계승자라고 스스로 여겼다.
이런 잘못된 판단이 그로 하여금 인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도니야는 늙은 아버지 다윗의 퇴위할 시간이 가까움을 알고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 했다. 이를 위해 스루야의 아들 모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자기 편에 끌어들였다(왕상1:7절). 그리고 자기 집에서 왕위를 선포하기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아버지의 신복들을 초청했다(9절).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는 아버지 다윗과 다윗의 후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으로부터 사죄를 받았다(38-53절).
아도니야는 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영화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목회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성스런 목회는 이 세상에서 존경과 명예와 권세를 누리도록 기회를 준다. 이 때문에 목회자들도 이를 거부하려는 자세와 노력을 항상 견지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목회자는 세상의 명예와 존경과 권세를 달리 본다. 이 세상에선 이런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보며 지금 이곳에서 이것들을 얻으려고 추구하지만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앞으로 얻을 영원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오히려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을 거부한다.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 되려는 미련이 아도니야에게 계속 남았다. 이런 숨은 의도가 선왕인 아버지 다윗의 첩으로 미인인 수넴 여인 아비삭을 부인으로 달라는 그의 요청으로 그만 밖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했다. 그의 요청은 동생 솔로몬의 왕위를 여전히 찬탈하려는 음모를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왕상2:22-23절).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발견된다. 아도니야는 장남 암논과 삼남 압살롬의 불경건한 삶과 그들의 결말을 자신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이들의 죽음은 그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만 이방 나라의 왕자들처럼 아버지 왕권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했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욕심은 분별력과 판단력을 앗아간다. 그도 이스라엘과 다윗 왕국이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맡은 사명이 무엇인지 몰랐다. 당시 주변 왕들과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왕자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그도 매우 즐겼다. 암논이나 압살롬처럼 다윗의 아들들이었지만 아도니야도 아버지 다윗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데 실패했다. 아니면 권력에 대한 욕심이 그의 믿음을 갉아먹었다. 그가 실패한 주요한 원인이며 이유였다.
신약 시대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영광에 맞춰 스스로 낮아진 삶을 사는데 실패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스런 신분에 따라 개인 욕심을 탐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도 늘 성공만을 추구하게 만드는 형통 신학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 신학은 치우친 잘못된 가르침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늘 지혜를 얻는 일에도 실패하게 만든다.
신앙 삶을 살다 보면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생기며 여러 가지 영적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형통 신학의 영향으로 이들은 부정적인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육적으로 아직도 이 세상에서 남아 훈련을 받아야 할 불완전한 존재임을 잊은 결과이다. 이들의 신앙 삶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지장을 주거나 방해한다. 이런 신자들도 결국 다윗의 왕자들처럼 실패한 삶을 살 것이다.
다윗의 왕자들은 다윗의 대신들이었다(삼하8:18절).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이들은 가졌다. 목회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신하들이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억제할 수 없는 성욕과 복수심(지나친 자존심, 권위 의식) 그리고 권력욕 때문에 스스로 영광스런 기회를 버린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다. 결국 자기부정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만이 성화(聖化)를 통해 영화(榮華)에 이르게 한다.
다윗의 주변 사람들
다윗의 신하 요압
요압은 유다 지파 출신으로 다윗의 여동생 스루야의 차남이었다(대상2:15-16절). 그는 사울 왕에 의해 고난을 당할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다윗을 따랐다(삼상26:6절). 유다 지파도 할 수 없이 버린 다윗을 그가 따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가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나 확신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윗의 가까운 인척으로서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할 수 없어 다윗에게 합류했을 것이다.
그는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충성하며 헌신했다. 온 이스라엘의 초청에 따라 다윗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여부스인들이 시온 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 성을 요압이 제일 먼저 점령했고 다윗의 약속대로 그는 다윗의 첫 번째 군대장관이 되었다. 이 산성은 나중 시온 성 또는 다윗 성이라 불렸고(삼하5:7절) 이 성을 요압이 또한 중수(重修)했다(대상11:8절). 이 성은 다윗 왕국을 세우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렇게 요압은 다윗 왕국을 세우는 일에 있어 일등 개국 공신이었다.
사울 왕의 죽음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유다 지파 이외 지파들을 다스렸다. 이 때 다윗을 대표하는 요압의 군대와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의 군대 사이 싸움이 있었다. 그의 동생 아사헬이 희생을 당했지만 이 중요한 싸움에서 요압이 승전했다(삼하2:14-17절). 그는 갓 탄생한 다윗 왕국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동족에게 알렸다.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전하여 다윗의 이름을 날려주었다(삼하10:13-14, 12:26, 왕상11:15-16, ) 전쟁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놀라운 신앙 자세가 그에게 엿보인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라10:12절)
그리고 암몬 자손의 왕성인 랍바를 점령할 때 그 영광이 자신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한 요압은 이렇게 다윗에게 보고했다.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삼하12:27-28절) 그는 대단히 충성스런 신하임에 분명했다.
그는 다윗의 비위도 잘 맞추는 지혜와 지략을 지닌 신하였다. 압살롬이 왕자의 난(亂)을 일으키고 도망갔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함을 알고 그를 다윗에게 데려다 주었다(삼하14장). 이를 위해 그가 쓴 꾀는 그가 대단한 지혜의 소유자임을 증명하고도 남았다(2-3절). 다윗도 이를 잘 알았다(19-20절).
아주 중요한 사실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 압살롬의 반역에 그가 동참하지 않고 처량하게 도망 갈 수 밖에 없었던 다윗을 끝까지 따랐다는 것이다(삼하18:1,2-5절). 압살롬과의 개인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어 아주 쉽지 않은 처지에 놓였지만 요압은 변함없이 다윗에게 충성했다. 이 점에서 그는 다윗의 아들들과 달랐다.
압살롬의 난이 진정되는 과정에서 다윗에게 충언을 하여 자칮 분열될 수 있는 이스라엘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요압이 또한 했다(삼하19:5-7절). 압살롬의 난이 진정된 후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난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 때도 이를 평정하는 일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삼하20:20-21절). 이 공로로 그는 이스라엘의 온 군대장관이 되었다(23절).
그리고 이후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라고 잘못 명령했을 때 다윗에게 불순종함으로(대상21:6절)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삼하24:3-4절).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용맹한 장군이면서도 지략(智略)을 겸비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다윗에게 충성했다. 하나님의 말씀도 믿고 지키려는 진지한 신앙 자세도 보였다.
이런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신자들은 교회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 교회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앞장 서서 일하고 목회자에게 충성하는 신자들이다. 이런 신자들을 목회자들은 너무나 좋아한다. 그리고 이들은 점점 신뢰를 얻으며 더 많은 일을 맡는다. 이들의 헌신과 충성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기여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자신의 재능이 지나치다 보니 다윗에 대한 믿음보다 자신을 더 신뢰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 주는 자신의 재능에 도취되어 자기 만족을 위해 다윗을 열심히 따른다. 다윗이 그를 신뢰하여 계속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윗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면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이 요압에게 보였다.
여기 긍정적 면은 다윗에게 지극히 충성했다는 것이라면 부정적인 면은 다윗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불충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이 온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고자 했다. 다윗을 만나 합의한 후 합의 사항을 이행하려고 돌아갔다. 이를 알게 된 요압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그를 죽였다(삼3:27절). 동생을 죽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일등 공신이 되는 것을 그가 막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나중 이를 안 다윗은 노했고 그를 저주하기까지 했다(28-29절).
요압이 개인의 복수심과 공명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 되는 중대한 일을 그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소문이 난다면 온 이스라엘이 같은 복수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윗에게 복속하기를 꺼릴 것이다. 이로 보아 그는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개인 일을 더 앞세운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아브넬이 다윗을 위해 큰 공헌을 세운다면 자기 위치가 약화될 것을 염려하여 사전에 제거했을 것이다. 이 역시 하나님 나라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운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했다.
다윗에게 불순종하는 사건이 또 있었다. 압살롬의 난이 진정될 때 다윗은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안전이 염려되어 장군들에게 그를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명했다(삼하18:5절). 이를 알면서도 요압은 긴 머리 때문에 나무에 걸려 꼼작 못하는 압살롬을 무자비하게 죽였다(삼하18:14-17절).
압살롬이 살아있다면 자신의 출세에 방해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 모른다. 일단 아버지의 신뢰에서 벗어난 압살롬은 앞으로 다윗의 2인자가 될 수 없음에 분명했다. 그렇다면 과거 그와의 맺은 긴밀한 관계가 오히려 요압의 장래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이렇게 판단한 요압은 사전에 장애물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반역한 원수이지만 아들이기도 한 압살롬을 또 다시 용서하고 받아드리려 했을 것이다. 다윗의 이런 마음을 알았다면 신하인 요압은 당연히 압살롬을 살려야 했다. 다른 한편 다윗의 그런 마음은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반역자를 철저히 복수하는 그런 이방 나라와 같지 않음을 보이려는 경건한 의도를 숨겼을 것이다.
오랜 동안 다윗을 핍박한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이 오히려 그를 슬퍼한 일을 요압은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이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완전히 다름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였던 요압은 이를 배우고 실천해야 했다. 그는 이런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는 또 다시 다윗을 거역했다. 압살롬의 난이 진정된 후 세바의 난이 발생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윗은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웠다. 아마사는 요압의 어미인 스루야의 동생 아비갈이 낳은 아들이었다. 아마사는 요압처럼 다윗의 조카로 이종 사촌 형제였다. 그러나 아마사는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군대장관이기도 했다(삼하17:25절).
그렇다면 그런 아마사를 왜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다윗은 세우려 했을까? 요압이 그 동안 자라 세력이 너무나 막강했다(삼하3:39절 참조). 이제 다윗도 어쩔 수 없을 정도였다. 그를 견제시키려면 어떤 대안이 필요했다. 아마사는 이런 목적으로 세워졌다. 요압이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그는 세바의 난을 진정하는 과정에서 아마사를 다윗 몰래 제거했다(삼하20장). 그렇게 그는 평화의 시대 불필요한 피를 두 번씩이나 흘리는 살인을 저질렀다. 대안이 사라지자 다윗은 할 수 없이 그를 군대장관으로 다시 세웠다(23절).
요압은 자신의 출세를 막는 자라면 자신의 혈족이라도 무자비하게 제거할 수 있는 준비가 늘 되어있는 군인이었다. 그 동안 그의 악행들은 오히려 출세와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요압은 이에 맛들였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언젠가 반드시 오는 결정적인 계기에 비극을 맞을 것이 분명했다.
다윗도 노년에 이르렀다. 이를 본 요압은 다윗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권세와 영화를 보장받고 싶었다. 이를 위해 요압은 다윗의 넷째 왕자인 아도니야를 선택했다. 이 당시 다윗의 아들들 중 그가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다. 장남 암논과 삼남 압살롬은 이미 죽었고 차남 길르압은 그렇게 적합한 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군인인 요압의 눈으로 보기에 다섯째 솔로몬은 넷째 아도니야에 비해 문약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 때쯤 아도니야도 왕권에 대한 욕심을 내며 자연스럽게 요압을 만났고 제사장 아비아들을 끌어들여 아버지 다윗의 뜻도 모르면서 왕위를 선포하려고 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한 요압의 후원과 제사장의 승인만 있다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다윗이 쥔 왕권은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아도니야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실수와 잘못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에 근거를 둔 하나님 나라임을 잊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과 선택이 없다면 다윗의 혈통적 후손이라도 마음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일부로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폭력을 이용해서라도 왕권을 강탈하려 했다.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물론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아도니야의 일로 인해 요압도 죽임을 당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는 저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좇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좇았음이더라”(왕상2:28절) 그의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성경은 잘 설명한다. 그는 다윗에게 최선의 충성을 보였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였다. 결국 다윗에게 보인 충성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 거짓된 것이었다.
요압처럼 다재다능한 목회자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이들은 목회에 성공한 유능한 목사들이다. 이들은 작은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능력이 발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큰 것을 선택하고 그 겨로가 많은 유익을 얻으려 한다. 그 영광과 영화가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충성은 주님을 위한다기보다 자기 만족을 위한다. 목회가 성공해야 자신의 능력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목회자들에게 발견되는 특징은 삼손처럼 자기부정(自己否定: self-denial)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능함이 결국 이들을 서서히 파멸로 인도한다.
그리고 신자들 가운데서도 유능한 제직들이 발견된다. 이들은 성공한 목회자에게 지극히 충성한다. 큰 교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고 그 결과 칭찬과 명예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도 결국 자기 만족을 위해 교회에서 충성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권력 이동이 생기면 이들의 자세도 하루 아침에 달라진다. 계속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후임자에게 더 가까이 한다. 전임자에게 충성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탐심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춘 후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열심히 충성하는 목회자를 비롯한 제직들은 큰 교회에 얼마든지 있다. 때때로 이런 교인들이 교회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아주 혼란스럽게 만든다. 교회에서 인정받은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그리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를 피하려면 다재다능한 제직일수록 개인 욕심이나 탐심을 버리는 자기부정에 더 힘쓰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해 관계를 극복하고 어떤 여건에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따르도록 늘 훈련시켜야 한다. 일단 욕심과 탐심에 사로 잡히면 헛것이 진짜처럼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를 비롯한 신자들은 양들처럼 근시안이라 자기 마음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을 진짜로 믿는다. 이렇게 욕심과 탐심은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 자기부정이 신앙 삶에서 중요한 이유이다.
결론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다윗을 단번에 알아보는 영적 안목(眼目)이 있었다(삼상18:1-4절).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다윗에 대한 행태를 본 후 하나님이 아버지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을 알았다(삼상20:15절).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여 그와 계속 언약을 맺은 이유였다(삼상18:3, 20:16절). 요나단은 벤냐민 지파 출신으로 다윗을 대적해야 할 집안에 속했다. 그러나 다윗을 사랑하고 보호하려 했다.
사무엘서에서 지적하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다윗의 적들은 외부보다 내부에 더 많았다. 다윗을 따른 자들 가운데 악인들과 비류들, 요압 장군 그리고 다윗의 왕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윗과 늘 함께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이 누구이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세상 나라의 왕들처럼 권력자와 성공자로 알고 따랐다.
이 점에서 이들은 솔로몬과 잘 비교된다. 솔로몬은 자신의 출생 배경을 어릴 때부터 들어 잘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해했다. 그가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전혀 별볼일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그가 출생할 때 하나님이 준 ‘여디디야’란 이름이 잘 증명했다(삼하12:25절).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믿고 하나님이 알려주기까지 믿음을 갖고 인내로 기다렸다. 그의 인내는 열매를 맺었다. 마침내 아버지 다윗의 뜻에 따라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왕상2장). 그러나 그의 형들은 자기 마음대로 다윗이 가진 왕권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진실한 믿음은 그 대상을 참으로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충분히 기다리도록 돕는다. 그러나 믿음도 둘로 나누어진다. 거짓이 없는 것과 거짓 있는 것(딤전1:5절).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만이 참이다. 사울 왕, 다윗을 따른 비류들,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며 왕권을 차지하려다 실패한 다윗의 왕자들과 요압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지 믿음을 소유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이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왜 그런가? 믿음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사랑은 진실한 순종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사랑과 믿음이 결여된 이들은 다윗을 세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 또는 순종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의 실패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불순종의 원인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그리고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를 더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욕심이나 탐심을 버리지 못했다. 이것은 이들의 믿음이 겉으로는 진실하게 보였지만 거짓으로 포장된 이유였다. 그 결과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놓은 후 세상 나라를 택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통해 구현되었다.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이면서도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일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을 위하는 일이 세상 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을 부인하면 하나님 나라를 부인하며 세상 나라만 택하게 된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렇게 영생을 누리도록 약속하는 하나님 나라와 점점 더 멀어진다. 불신자들의 사고와 삶의 방법인 이분법(二分法)은 비성경적이며 진실한 신자들에게는 틀린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잘못된 이분법에 따라 산다. 이들은 세상을 피하며 사는 신앙 삶이나 세상을 즐기며 사는 신앙 삶, 둘 중 어느 하나를 보여준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전자는 세상을 피하기만 하기 때문이며 후자는 세상에 파묻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유일한 주권자인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불신자들이나 거짓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이 사상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준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함으로 하나님이 받을 영광을 찬탈한다. 이것이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롬11:36절) 맞는 삶과 윤리를 살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이야말로 거짓 없는 믿음의 증거로 영생에 이르게 한다.
교회 주변에 다양한 신자들이 있다. 양적 성장론자들은 이 모든 이들을 신자들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구약 시대 거짓이 없는 믿음의 눈으로 다윗을 본 무리만 진실한 신자들이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와 만물의 주인이 된 예수님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예수님을 거짓이 없는 믿음의 눈으로 보는 신자들만이 진실하다. 그러므로 믿음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을 소유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기독교 교회는 잘 가르쳐야 한다.
참으로 성경 기록 방법은 기이하다. 다윗을 따른 무리 가운데 진실한 신자들보다 진실하지 못한 신자들의 기록이 더 많고 길다. 요압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다윗이 고난을 당할 때부터 다윗이 죽기까지 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스승을 배반한 가롯 유다와 흡사하다.
다윗 주변에 진실한 신자들도 있었다. 밧세바의 전남편인 헷 사람 우리아, 압살롬의 난으로 인해 도망할 때 그를 도와준 신하들인 후새(삼하15-16장),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삼하17:27절) 등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요압에 비하면 아주 짧다. 이들은 다윗의 고난 때부터 따랐던 요압과 달리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을 믿음으로 따랐다.
구약 성경의 이런 기록 방식은 신약 시대 출현할 교회에 알곡만 아니라 가라지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을 것임을 예언해 준다. 목회자들도 제직들로서 다윗을 따르던 신하들과 같다. 이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진실한 자들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이 더 많을 수 있음을 구약 성경은 암시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소수의 의인들에 의해 결국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數)만 강조하는 양적 성장론은 비성경적이다. 목회자를 비롯한 성도들은 거듭난 신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항상 염두에 두고 신앙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 성경을 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신약 성경에서 원리적으로 설명된 교리들이 구약 성경에선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잘 설명되기 때문이다. 윤리적 관점이나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구약 성경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 때 구속사적인 관점이란 구약 성경의 기록에서 앞으로 올 메시아가 누구이며 무엇을 한 분인지 찾아내려는 자세를 뜻한다. 구약도 전적으로 예수님을 예언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처럼 구약 성경도 모형인 그리스도들을 어떻게 구약 성도들이 믿었느냐에 따라 구원과 생명이 좌우된다고 말한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베들레헴에서 메시야 탄생을 예언한 선지자 미가
김성만 편집
1. 인적 사항
① 미가는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인가?'라는 뜻.
② 유다와 블레셋 가드 국경 사이의 시골 가드모레셋 출신(미 1:1, 14).
③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남유다의 선지자.
④ 남유다 제11, 12, 13대 왕인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
⑤ 소선지서 미가서의 저자(미 1:1).
2. 시대적 배경
미가 선지자가 활동을 하던 당시, B.C.735-690년경 팔레스틴 지역은 북방의 신흥 제국인 앗수르의 본격적인 남진 정책으로 인하여 국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던 때이다. 즉 디글랏 빌레셀 3세(B.C.745-727년)로부터 시작하여 살만에셀 5세(B.C.727-722년), 사르곤 2세(B.C.722-705년), 산헤립(B.C.705-681년) 등이 남․북이스라엘 두 왕국을 끊임없이 공격해 왔으며, 그 와중에 북왕국이 B.C.722년에 멸망하고, 남왕국은 B.C.701년 산혜립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에 위기에까지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에 미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3. 주요 생애
4. 성품
① 남․북왕국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함을 강하게 질타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담대하게 선포한 것을 볼 때 에국심이 뛰어나고 매우 담대한 자(미 1:1-16).
② 동족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자신의 옷을 찢어 내어 던지기까지 애통할 만큼 깊은 동정심과 영혼에 대해 뜨거운 사랑의 소유자(미 1:8).
③ 자신의 유익에 따라 권세 자와 부자에게 아첨하며 그 메시지를 달리했던 동시대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를 위하며 자신의 유익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민족의 죄를 지적한 것을 볼 때 정의롭고 진실하며 긍휼이 충만한 자(미 3:1-12).
④ 자신의 권능, 공의, 재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있음을 단언할 정도로 신념과 확신에 찬 자.
5. 구속사적 지위
① B.C.700년경 이미 메시야가 탄생하실 것을 정확히 예언한 선지자(미 5:2).
②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최초의 선지자(미 3:12).
③ 국가 권세 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및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다가 그들에게 거짓 선지자로 배척 당한 참선지 자(미 2:6).
④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에 대한 강한 탄핵과 책망을 통해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미 1:1, 9-16; 대하 29:5-11).
⑤ 장차 메시야의 도래로 인해 실현되어질 참 평화와 정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미 4, 5장).
⑥ 억눌린 자들의 친구요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대언자.
6. 평가 및 교훈
① 미가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로써 끝나지 않고 그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미 2:1-11), 그 이유들은 마치 물질만능과 명에, 야망, 향락 제일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불의에 전혀 휩쓸리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미가의 모습은 동일한 세태 속에 처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② 미가는 종교 생활과 의식은 있으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이 없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헛된 신앙을 책망한다. 실로 진실함과 통회하는 마음이 없는 형식주의적인 신앙 생활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오직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일이다(미 6:6-8).
③ 미가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처럼 남유다도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선민의 회복에 대한 강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미 2:12, 13). 이러한 확신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과 자기 백성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때때로 여러 가지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미가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천국 축복을 소망하는 가운데 능히 이를 극복하는 신앙인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7. 핵심 성구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3:8).
바울의 일생 간략 정리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행9:1).
*참고도서 :「바울」 박용우 저, 서울서원 출판,
◑ 바울의 간략한 연대기 및 성경기록
주후 5년 경, 길리기아 다소 출생(많은 학자들이 바울의 출생을 주후 9년 경으로 봅니다.
그러면 아래 연대표가 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래 표는 주후 5년 출생으로 보고 작성한 것임)
① 28세 -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성도들 잡으러 가다. 바울이 회심한 것은 아마도 주후 33년경으로 생각된다.
② 28~31세 -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지낸다(갈 1:17~18).
③ 31세 - 아라비아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방문.
-15일 동안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다(갈 1:18~19).
-처음에 바나바 외에는 그를 믿지 않았다(행 9:26~27).
④ 31~39세 - 그 후 고향 다소로 돌아간다. 거기서 8년 정도 지낸다(갈 1:21).
--8년 후, 바나바가 바울의 고향 다소까지 찾아가서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온다(행 11:25~26).
⑤ 39~40세 -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사역(행 11:26).
--바울이 회심 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공식적 사역까지 약 11년이 걸렸다.
⑥ 41세 - 부조를 걷어 바나바와 예루살렘 방문(행 11:30).
--이 때(갈 2:1)에,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그러니까 28세 때 방문 후, 부조 들고 다시 방문하기까지 14년 걸렸다고 했으니,
성경에는 다소에서 지낸 기간이 정확하게 8년이라고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궤적을 전체적으로 조사해 보니까, 다소에서 8년 지낸 결과가 나온다.
⑦ 41세 -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옴(행 12:25).
⑧ 41~43세 - 제1차 전도여행(약 2년5개월, 행13~14장)
이방인의 회심문제로 예루살렘 공회 참가, 3번째 예루살렘 방문.
(44~45세) 안디옥에서 약 2년간 체류한다(행 14:28).
⑨ 45~48세 - 제 2차 전도여행(약 3년, 행15:36~18:22)
데살로니가 전후서 기록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의 서두에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들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멤버들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쓰여졌다고 본다.
⑩ 48~52세 - 제3차 전도여행(약 5년, 행 18:23~)
* 에베소에서 (행19:1~19:끝) 갈라디아서 기록, 고린도전서 일부를 써서 보냄(고전 16:8).고린도전서 나머지 써서 보냄
고린도를 두 번째 다녀 옴(에베소에서), 고린도후서 일부를 써서 보냄
* 빌립보에서(행20:3~6, 또는 마게도냐) 고린도후서 나머지 써서 보냄(아마도 빌립보에서)
* 고린도(가이오의 집)에서 로마서 기록
* 예루살렘 4번째 올라감(행21:17~)
⑪ 52~54세 -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2년 보냄(행 24:27).
⑫ 54세 - 로마로 떠남(호송됨) 주후 59년 8월
...주후 60년 봄, 로마 도착...
⑬ 55~56세 - 2년간 로마에 가택연금(1차 투옥)
-옥중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기록
⑭ 57~61세 - 로마에서 석방 후(주후 62년경).
-약 4년간 전도여행(그레데, 밀레도, 에베소, 드로아, 마게도냐, 니고볼리)
-마게도냐에서 디도서, 디모데전서 기록
⑮ 61~62세 - 드로아에서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됨, 주후 66년 늦은 봄.
-디모데후서 기록(로마 감옥에서, 2차 투옥)
-로마에서 순교함 주후 67년 6월경
◑ 인간적 바울 이해(참고사항. 사실 확인은 미정인 글이다)
▲바울의 외모
바울의 외모에 대해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바울과 테크라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 이라는 외경이다.
거기 3장에, 바울과 초면인 오네시포루스가 길에 서서 디도가 알려준 설명에 따라, 행인들 중에 바울을 찾고 있었다. 그(오네시포루스)가 바울이 오는 것을 보니, 키는 작고, 머리는 대머리이며, 다리는 안창 다리이며, 풍채는 고상하고, 눈썹은 양쪽이 서로 붙었고 매부리코에, 은혜가 충만하고, 어떻게 보면 사람 같고, 어떻게 보면 천사의 얼굴을 가졌다.
▲바울의 이름
이 책의 저자는 사울과 바울의 이름 변화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인데, 바울은 사울의 ‘로마식 발음’이라는 것이다. 로마세계에서 전도할 때, 로마식 이름을 쓰는 것이 더 편리했을 것이다.
▲바울은 훌륭한 사업가, 경영인?
현재 비시디아 안디옥의 박물관장으로 있는 고고학자 위날 데미르는 바울을 훌륭한 ‘사업가’라고 평했다. 그 이유는, 바울은 남달리 여행을 많이 하고 자기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의 경비까지 자기가 부담한 것은 당시에 엄청난 경비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당시 바울의 고향 길리기아 지방은, 흑염소 털로 만든 ‘길리기움’ 이라는 유명한 천막의 원산지였으며, 유대인은 생계를 위해 자식에게 한 가지씩 기술을 가르쳐주는 전통을 볼 때, 바울은 어려서부터 이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것 같다.
이 천막은 당시 고가품이었고, 동시에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주는 사업이었다. 성격상 누구에게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바울을 볼 때, 자기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여행경비를 부담한 것을 보면, 바울은 사업적으로도 성공한 사업가이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다.
또한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로마 총독 벨릭스도 돈 받을 것을 기대해서 그를 자주 불러 얘기했고(행 24:26) 로마에 호송된 후에도, 가택연금 상태였지만 2년 동안 세를 주고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이 있었다(행 28:30).
또한 바울은 경영인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전도 여행을 통해 수많은 개척교회를 설립하고 적임자를 선택해서 세우고 자신이 직접 못 갈 때는 특사를 보내어 돌보았다(관리했다).이렇게 볼 때, 바울은 인사관리에도 능숙한 경영인이었다. 선교 전략적으로 가야할 곳, 만나야 할 사람 등은 빼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로마로 갔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된다.
▲가말리엘 문하 시절
원래 바울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주후 5년경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했다. 예수님이 주전 4년경 출생했다고 보면, 거의 10살 차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가 헬라어에 능통한 이유는 다소(외국)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는지, 유대교에 열심이 있었는지 예루살렘에 유학 가서, 가말리엘 문하생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 활동을 하던 기간(주후 26~29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학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직접 뵙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글에 언급이 없는 것을 보니... 그래서 사울이 맨 처음 등장하는 곳이 행 7장의 스데반 순교 때였다
바울 연대표
AD 4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 / 베냐민 지파 /로마 시민권 획득 / 8일 만에 할례
AD 10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바리새인이 됨 / 장막 만드는 업
* AD 32 다마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남. 눈이 멂.
다마섹 - 선지자 아나니아 만남 / 아레다 왕이 죽이려고 함 / 광주리 탈출
아라비아 3년 체류
AD 35 예루살렘 15일 체류 - 예루살렘 1차 방문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초대 예루살렘 교회 감독)만 봄
다소 --> 안디옥 1년(바나바가 다소로 가서 초빙 : 최초로 기독교인 호칭).
AD 36 예루살렘 2차 방문, 바나바 동행 "구제문제"
AD 48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 안디옥 --> 실루기아 --> 구브로 --> 살라미 --> 바보(섬 총독 서기오 바울의 영향을 받아 바울로 개명) -->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 엘루마를 만나 소경으로 만듦 --> 밤빌리아의 버가 ( 마가 요한은 안디옥으로 돌아감) --> 비시디아 안디옥 --> 루가오니아의 두성{이고이온 --> 루스드라(나면서 앉은뱅이로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줌} --> 더베(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려쳐 거반 죽게함) --> 루스드라 --> 이고니온 --> 비시디아 안디옥 --> 비시디아 --> 밤빌리아 --> 버가 --> 앗달리아
AD 49 안디옥 1 년 체류 (갈라디아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 할례에 관한 다툼과 논쟁을 벌임
AD 50 예루살렘 공회 참석 (3 차 방문 WITH 바나바와 디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연설(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편지를 안디옥, 수리아, 길리기아 지방으로 보냄). 유다 바사바와 실라와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옴.
**바울의 2 차 전도여행 : 마가 요한의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짐
바울과 실라 :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 / 바나바와 마가 : 구브로섬
더베 --> 루스드라 (디모데 만남. 외할머니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 아버지 헬라인) --> 성령이 아시아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아니함 --> 부루기아 -->밤빌리아 --> 무시아 앞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나 예수의 영이 불허) -->드로아 --> 사모드라게 --> 네압볼리 --> 빌립보 (마케도냐의 지경 첫성) -->두아디라성 출신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남 /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줌 -->암비볼리 --> 아볼로니아 --> 데살로니가 (야손의 집에 유함) --> 베뢰아 -->아덴 --> 감독 : 디오누시오 / 에피쿠로스 학파 및 스토아 학파와 논쟁
AD 52 고린도 1 년 6 개월 체류 : 데살로니가 전·후서 기록
이달리아에서 온 아굴라(본도 출신 유대인)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만남 -->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이 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송사 풀려남 -->겐그리아 (서원한 것이 있어 머리 깍음) --> 에베소 --> 가이사랴
AD 54 예루살렘 4 차 방문 --> 안디옥 : 바울의 3 차 전도 여행
다소 --> 이고니온 --> 에베소 --> 3 개월간 회당에서 강론 : 고린도전서 -->비방을 피해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 합 2년 체류 --> 앗소 -->드로아 --> 마케도냐의 빌립보 (고린도 후서) --> 베뢰아 --> 헬라의 고린도 (3 개월 : 갈라디아서) --> 수리아로 가고자 했으나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어 마케도냐로 감 --> 베뢰아 --> 데살로니가 --> 빌립보 --> 드로아 (7 일간 유함 : 유두고 사건) --> 앗소 --> 미둘레네 --> 기오 --> 사모 --> 밀레도 --> 고스 --> 로도 --> 바다라 --> 베니게로 가는 배에 승선 --> 구브로를 왼쪽에 --> 두로에 상륙(7일간 유함) --> 돌레마이 (1일) --> 가이사랴
AD 57 예루살렘 5 차 방문(클라디우스 리시아스가 체포함)
가이사랴 (2년 투옥 : 벨릭스와 보르기오 베스도를 만남 : 로마서 작성) --> 시돈 --> 무라 --> 니도 --> 그레데 (살모네.라세아.미항) --> 멜리데 --> 수라구사 --> 레기온 --> 브디올 --> 압비오 저자 --> 삼관 --> 로마
AD 62-64 로마 1차 구금
옥중서신-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골로새 교회 감독)서·빌립보서 작성
AD 64 구금에서 풀려남
에베소 --> 마케도냐(디모데전서) --> 그레데(초대 감독 : 디도) -->스페인(cf.롬15:28) --> 니고볼리 (디도서) --> 드로아에서 체포
AD 66 로마 2 차 구금(디모데후서)
로마 서부의 OSTIAN WAY 에서 참수됨
* 바울연대표와 서신서 재정리
AD 5 탄생 (추정)
회심
AD 35 스데반 순교 (행 7:57-60)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남 (행 9:1-19)
AD 35-38 아라비아 체류 (갈 1:17)
AD 38 예루살렘 교회 방문 [바나바가 사도들에게 소개] (행 9:26-29)
AD 38-44 다소 / 안디옥 [바나바가 불러와 동역] (행 9:30, 11:25-26, 갈 1:21)
AD 44 예루살렘 교회 구제금 전달 / 교회 박해 경험 (행 11:30-12:25)
1차 선교여행 [with 바나바] (행 13:2-14:28)
AD 46-48 키프로스 ? 살라미, 바보 [with 마가]
갈라디아/비시디아 ? 안디옥, 이고니온
루가오니아 ? 루스드라, 더베
밤빌리아 ? 버가
AD 49 안디옥
갈라디아서
AD 50 예루살렘 회의 / 안디옥 (행 15:1-29)
2차 선교여행 [with 실라] (행 15:40-18:23)
AD 50-52 수리아, 길리기아
루가오니아 ? 루스드라, 더베 [with디모데]
마케도니아 ? 빌립보 [with 누가, 디모데]
데살로니가, 베뢰아 [with 디모데]
아가야 ? 아테네 [without 실라], 고린도 [with 디모데] 데살로니가전후서
아시아 ? 에베소 [with 브리스길라, 아굴라]
3차 선교여행 [with 디모데, 누가, etc.] (행 18:23-21:17)
AD 53-57 갈라디아, 부르기아
아시아 ? 에베소/두란노 서원 [with 디모데, 에라스도] 고린도전후서
마케도니아, 아가야 [with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로마서
무시아 ? 드로아 [with누가 / meets 에베소 장로들]
예루살렘 도착 [with누가, 디모데, 가이오, 두기고, etc.]
AD 57-59 예루살렘/가이사랴 구류 (행 21:27-26:32)
AD 59 로마 압송/몰타섬 조난 (행 27:1-28:16)
AD 59-61 1차 로마 구류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4차 선교여행
AD 62-67 마케도니아, 크레타 (딛 1:5), etc. 디모데전서, 디도서
AD 67-68 2차 로마 구류 / 순교
“신앙있는 남자라면”… 마부를 남편으로 섬기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정동길을 따라 서대문 쪽으로 600m쯤 걸어가면 아담한 팔작지붕 대문이 나온다. 옛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 전신) 교문이다. 사주문(四柱門) 양식의 이 문은 일제 강점기 일본풍으로 교란됐다가 제 모습을 찾은 게 1999년이다. 1890년 전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문 앞에 비석 하나가 서 있다. 허리춤 높이의 이 돌에는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階下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말을 탄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서 내리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서원 입구에는 반드시 이런 하마비가 있었다. 배움의 자리에 들어갈 터이니 말에 내려 옷깃을 여미고 말을 삼가라는 의미가 담겼다.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명성왕후의 영어통역관이 되고자 찾아온 김 부인에게 선교사가 영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됐다. 메리 스크랜턴(1832~1909) 여사가 설립한 첫 근대식 여성교육기관이 이화학당이다. 이화학당 두 번째 학생은 가난한 어머니가 딸을 양육할 수 없어 맡긴 별단이, 세 번째는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버려진 꽃님이다. 그리고 네 번째 학생은 훗날 우리나라 첫 여의사가 되는 박에스더(본명 김점동·1877~1910)이다.
김점동은 이화학당에서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고 김에스더로 불렸다. 마부(馬夫) 박유산(1868~1900)과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르는 서양의 방식에 따라 박에스더로 살았다. 박유산은 본래 이름이 박여선이었으나, 선교사들이 영어로 발음하면서 박유산으로 굳어졌다고 ‘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 저자 이강렬이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인 첫 유학생사를 다뤘다.
여의사 박에스더와 마부 박유산.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마부가 어떻게 당시 최고 엘리트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을까. 마치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재벌집 딸과 그 집 운전기사의 사랑을 다룬 아침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에스더의 아버지 김홍택은 서울 정동에 사는 양반으로 딸만 넷을 두었다. 김홍택은 선교사 아펜젤러에게 고용돼 신문물을 익혔으며 그 영향으로 큰딸 에스더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둘째 김마리아를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전신), 넷째 김배세는 정동여학당 후신인 연동여학당에 보낼 만큼 열린 인물이었다. 셋째는 일찍 시집갔다.
열 살 소녀 에스더에게 선교사와 서양식 문물의 경험은 신비로웠을 것이다. 1890년 10월 의료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이화학당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은 에스더가 자신들을 보고 놀란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에스더는 코가 큰 우리 얼굴에 놀랐으며, 난로를 보고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우리들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게 됐다.’
로제타를 만난 에스더는 그의 지도 아래 한국인 첫 여의사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888년 로제타 일기의 한 대목이다.
‘폭풍우가 심했던 어느 날 밤. 에스더는 빗소리를 들으며 주님께서 노아의 방주 때와 같이 인간의 죄를 홍수로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다. 이 기도 가운데 심적 변화를 일으킨 에스더는 매일 밤 소녀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열 살에 입학한 에스더는 ‘폭풍성장’을 했다. 1891년 1월 올링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 로제타의 조수가 돼 평양으로 내지 의료선교를 떠날 정도로 신앙심과 실력을 갖췄다. 로제타는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1892년 결혼했다. 그리고 부부는 관서지방 선교를 위해 평양에 부임했다.
박유산은 몰락한 지방 훈장의 아들이었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이나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버지의 근심을 샀다. 무엇보다 주유천하하길 좋아했다. 그는 어느 날 윌리엄의 마부로 고용됐고 그를 따라 말고삐를 붙잡고 전도여행을 다녔다. 윌리엄은 결혼 전 정동 선교부와 평양을 오갈 때 약혼녀 로제타를 이화학당에서 만나며 사랑을 키웠다.
박유산은 윌리엄 홀의 선교사역을 보고 신앙을 가지게 된다. 방황하던 그의 삶은 병든 자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가 정성스럽게 치료해 주는 선교사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고민했고 그 중심에 예수가 있음을 알았다.
신분 뛰어넘는 사랑, 서울 ‘선교부’ 정동길
하마비가 있는 정동길은 요즘 가로수마다 새순이 돋고 꽃이 핀다. 이 길을 이화여고 창덕여중 예원학교 학생들이 등하교한다. 120여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박유산이 정동길 하마비 근처에 윌리엄을 내려주고 말고삐를 매고 있을 때 에스더는 이화학당에서 의학수업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나라 첫 여성 의료기관 보구여관에서 조수로 활동하는 것을 몰래 지켜봤을 것이다. 그 보구여관 터는 하마비 아래쪽으로 100m 지점이다. 현 정동교회와 이화여고를 가르는 담 쪽이다.
에스더와 박유산은 한 번도 본 적 없이 중매혼을 했다. 1893년 5월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조선 관습에 따른 조혼 압박을 에스더가 신앙 안에서 결단하면서 성사됐다. 당시 여성은 열네 살 무렵까지 혼인을 못하면 무당이나 병자 취급을 당했다. 사랑과 결혼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에스더의 꿈은 로제타와 같이 의료선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의사가 되게 해달라고 서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유학을 가야 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여성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장 평양 내지 선교여행조차 결혼 여부가 걸림돌이 됐다. 결혼하는 것만이 돌파구였다.
이 무렵 윌리엄이 박유산에게 물었다. “자네는 가정적인 여자와 하나님을 진실 되게 섬기는 여자 중 어떤 여자를 원하는가.”
박유산은 신앙을 택했다. 반면 에스더의 집에선 홀 부부의 박유산 추천에 반대를 표했다. 배움이 큰 여성이 대개 ‘상승혼’을 하는 마당에 몰락한 집안의 가장, 그것도 마부로 살아가는 박유산이 탐탁할 리 없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로제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내가 가사 일이나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결혼하고 싶지 않지만 조선의 관습상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마부 박유산에 대해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은 문제되지 않으며, 무엇보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 혼인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없더라도 하나님 뜻 안에서 순종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에스더는 결혼 1년이 지나자 박유산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로제타에게 고백한다.
그들은 정동에서 신식 결혼식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에스더는 진료소에서 라틴명 약품을 익혔고 박유산은 평양 등을 다니며 제임스를 도왔다. 두 사람은 평양 선교를 위해 홀 부부를 따라 갔다가 외국 선교사에 대한 평양 관리들의 박해와 주민들의 배척으로 긴급 탈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유산은 선교사 앞잡이라는 수모를 당하며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평양에 민간 환자가 속출하자 그해 10월 제임스와 박유산은 전장으로 나가 치료에 힘썼다.
그해 11월 말. 제임스가 발진티푸스로 순직했다. 로제타는 유복자와 두 자녀를 데리고 친정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에스더 부부는 로제타를 따라 나섰다. 로제타가 에스더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해 의사가 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스더는 뉴욕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했고 1896년 볼티모어여자의대(현재 존스홉킨스대학)에 입학해 서양 의학을 전공한 첫 한국인이 됐다.(한성사학 24집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정민재 논문)
125년 전 ‘상남자 교회오빠’ 박유산
박유산은 아내의 의대 입학을 두고 “내가 태어나서 세 번째로 기쁜 날”이라고 말했다. 예수를 만난 것과 에스더와의 결혼에 이은 기쁨이었다.
박유산은 미국 도착 후 줄곧 볼티모어 식당과 로제타의 친정 농장에서 일하며 에스더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영어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외조에 힘썼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고 상투를 틀고 다녔다. 1895년 7월 로제타와 그 자녀들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이들 부부가 동행했는데 그때 찍은 사진에 상투 튼 박유산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셉 같은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가 의대 졸업 3주를 남겼을 때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투병 때 에스더는 병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편을 섬겼다. 에스더는 남편을 볼티모어 공동묘지에 묻고 로제타와 함께 귀국해 죽는 날까지 사랑의 의술을 펼쳤다. 그리고 1910년 4월 13일 박에스더도 폐결핵으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독립문 우뚝 서는데 박에스더 부부 기도도 있었다
“이 돈을 독립문 건축에 써주시오.”
보구여관 의사 커틀러가 미국으로 귀국하며 ‘독립신문’을 박에스더 부부에게 넘겨줬다. 신문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축한다는 모금 기사가 실려 있었다.
부부는 기도로 3원을 마련했다. 그리고 독립협회로 보냈다. 1910년 당시 쌀 한 섬이 3원이었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에 적잖은 금액이었다. 부부의 헌금을 두고 독립신문은 ‘이런 사람은 외국에 간제 얼마가 못 되야 발서 자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도저히 생겟더라’고 칭송했다. 이역만리에서 일제 식민지가 된 조국 현실을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260033&code=61221111&sid1=chr
짐 카비젤이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속 십자가에 달렸을 때 들었던 주님의 음성`...
♥ 짐 카비젤이 “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속 십자가에 달렸을 때 들었던 주님의 음성…”
할리우드 배우 짐 카비젤이 ... 2004년 개봉된 영화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의 역할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찢어지는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며 “그 때부터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 이끌 수 있다고 생각되는 역할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짐 카비젤은 최근 미국 크리스천포스트와의 인터뷰를 갖고 “내가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십자가에 달릴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날 사랑하는 이들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난 '네, 제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릴께요.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말할게요. 상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했다.
이어 “그분의 피조물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홀로이신 이유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하실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랑이 될 수 있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맡은 역할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매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은 가장 많은 이들을 그분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라고 덧붙였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에서 짐 카비젤은 바울 사도(짐 폴크너)의 동역자인 누가 역할을 맡았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지 약 30년이 지난 후, 바울은 네로의 명령에 의해, 로마의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으로 비난을 받으며 극심한 박해를 경험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누가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나고 그로부터 얻은 지혜를 많은 지역교회 교인들에게 나눠주고자 한다.
짐 카비젤은 인터뷰에서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 영화의 대본을 받기 전, 나의 삶을 바꾸는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했다. 친한 친구와 변호사의 죽음,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 등이었다. 그러나 내게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해군 친구들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이들은 작년 성금요일에 이슬람국가(IS) 대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대본을 받아서 읽고 난 후 ‘와, 순교자들, 살해당하고 죽임을 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가 멘토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고, 바울이 누가에게 멘토와 같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프랭크가 내게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것이 내게 유기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했다.짐 카비젤은 영화를 통해 박해받는 교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길 원한다고 밝혔다.
그는 “박해는 오늘날 전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이다.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바울과 같은 기독교인들 때문에 영감을 얻는다.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영화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누가역 ... 짐 카비젤
♥ 영화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에서 짐 카비젤 “누가 역할 맡은 것은 소명”
영화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한 장면. 할리우드 배우 짐 카비젤이 주연을 맡은 영화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Paul, Apostle of Christ) 이 영화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던 인물인 다소 출신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바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극중 누가 역할을 맡은 짐 카비젤은 최근 열린 미국종교방송협회(NRB)에 참석해 크리스천 포스트와 인터뷰를 가졌다. 짐 카비젤은 영화 출연 이유에 대해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장르의 영화이기 때문에 출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가끔 개종에 대해 생각할 때, 이를 통해 우리가 꼭 부유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종은 우리의 마음에 위대한 기쁨을 채워준다”면서 “연예계에서 부유하지만 죽은 자들을 정말 많이 봐왔다. 구주이신 예수님은 ‘좋다. 너를 통한 나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넌 그들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에게 사랑이 되어야 한다. 이는 그들이 알게 될 유일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연예계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는데, 신앙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 계속 출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연예계 산업은 약 100년정도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세와 아브라함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말씀은 5,000년이 된다”면서 “할리우드의 천박함 대신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답했다.
또 “내가 성경의 인물을 연기하기에 적합한 인물인가? 아니다. 한 번도 예수의 역할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한 친구가 ‘하나님은 항상 최고를 선택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하셨는데 어떻게 할래?’ 라고 물었다. 난 분명히 스크린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할을 맡는 일을 소명처럼 느낀다”고 덧붙였다.
누가의 역할에 대해서는 “난 결코 내게 초점을 맞춘 적이 없다. 다만 인물을 잘 연기하고 싶었다. 우리 기독교 인구가 23억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미국의 3억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수이다. 만약 우리가 진리를 붙든다면, 이를 사랑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천 투데이 / 강혜진 기자 ( 2018.4.4)
전신 화상 절망 이기고 희망 꽃피워” 최려나 양, 이대 영문과 졸업
입력 Mar 09, 2018 09:17 AM PST
전신전신 화상의 아픔을 이겨내고 대학을 졸업한 최려나 양의 사연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최려나 양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14학번으로 입학해 지난 2월 졸업식에 참석했다.
최 양은 11살 때 집에서 일어난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전신 95%에 3도 화상을 입었으며 이후 40여 차례의 큰 수술을 거쳤다. 그는 "화상 치료는 1회성에 그치는 치료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줘야 한다. 피부가 많이 남아 있으면 그걸 떼어서 피부 이식을 하면 상처가 예쁘게 아무는데 피부가 많이 없어서 그게 좀 힘들었다"고 화상 치료의 고충에 대해 털어놓았다.
중국에 살고 있는 최 양은 지난 2004년 한국에 처음 왔다. 가스 사고로 인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주위에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 절망이 희망으로 꽃피었다.
절망에 빠져 있었던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준 지인 중 한 명이 멘토 이지선 교수(한동대)다. 화상을 입었음에도 모자도 안 쓰고 마스크도 쓰지 않던 이지선 교수가 멋있어 보였다. 이화여대를 입학하게 된 계기도 이지선 교수가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3년 늦게 입학한 학교였지만 주위 친구들이 너무 좋아해줘 "나도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 부터 모자도 마스크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최 양을 구하려다 3일 만에 사망했다. 졸업한 학교 이름이 '이화'인데 엄마의 이름도 이와 같은 '이화'라고. 최 양은 "학교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엄마가 많이 생각났다. 이 학교를 다니면 엄마와 함께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최 양은 "중국에서 한국인 장로님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알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이 저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받지 않겠다. 그 사랑을 거부하겠다"라며 원망도 많이 했지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기 위해 이런 일을 주신게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었다"면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이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쁜 모습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고 전했다.
현재 청년화상경험자 모임 위드어스(withus)를 통해 화상환자에 대한 인식개선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최 양은 "고난을 통해 더욱 강해진 것 같다. 그리고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 같다"면서 "지선 언니가 저를 위로해주신 것 처럼 저도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싶다"고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 밝혔다.
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 영심이
기독교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헐리우드 배우들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1229 이미경 기자 입력 : 2018.04.09 14:08 |
▲헐리우드 배우 크리스 프랫 ⓒ크리스 프랫 페이스북 |
많은 배우들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그렇기 때문에 인기 있고 존경받는 배우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기독교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헐리오드 남성 배우 5명'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1. 마크 월버그
거친 외관과 액션으로 가득 찬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마크 월버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동영상을 찍은 바 있다. 2016년에 찍은 페이스북 비디오 포스트에서, 그는 어려움을 겪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의 교회의 예배를 도왔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신앙은 "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닻"이며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앙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월버그에게 그의 신앙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2. 덴젤 워싱턴
덴젤 워싱턴은 의심 할 여지없이 오늘날 가장 존경받는 배우 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였다. 그래서 그는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는 신에 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서 신앙을 잃었다. 그 후 워싱턴의 마음은 다시 주님께 돌아 왔고 그 이후로 그는 기독교 신앙을 세상에 알리게 되어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CBN News 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나는 잘못을 많이 했지만 그것 또한 함께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3. 크리스 프랫
크리스 프랫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지도자일지 모르지만 그의 마음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하와이에 살면서 다시 시작됐다. 그는 조산아에 관해 이야기하고 '틴초이스 어워드'(Teen Choice Award)를 수상했을 때를 포함하여 여러 번 이야기했다.
프랫은 2017년에 피플 베이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되찾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다시 정의했다. 아기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사진을 보고 또 보곤 한다. 우리에게 그는 너무 아름답고 완벽했다"고 말했다.
2017년 크리스 프랫은 틴 초이스 어워드(Teen Choice Awards)에서 초이스 무비 액터(Choice Movie Actor : Sci-Fi Award)를 수상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4. 스티븐 볼드윈
스티븐 볼드윈이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배우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인기있는 볼드윈 형제들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다. 십 년 전에 볼드윈은 예전의 삶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왔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폭스 뉴스와의 대화에서 그의 종교에 대한 솔직함이 오랫동안 부재한 이유라고 말했다.
또한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을 거스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역할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언급했다.
5. 톰 행크스
톰 행크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인터뷰 중 언제나 미소 짓고 쾌활한 배우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행크스와 그의 가족이 과거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2015년 아내인 리타 윌슨(Rita Wilson)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이중 유방 절제술을 받아야 했다. 동시에, 그들의 아들 쳇은 약물 남용과 싸우고 있었다.
클로저 위클리(Closer Weekly)의 한 소식통은 믿음이 그의 가족을 구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또한 "그녀[리타]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존에 총체적인 공헌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의 의사와 톰이었다"고 전했다.
명성과 운명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우리와 같은 문제를 겪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위안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지위에 상관없이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힘을 주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1049
입력 : 2018.04.04 17:20
[간증] 故 김익두 목사 손자며느리 박한나 목사
"예수 믿으면 가족, 친척들까지 정치범수용소에”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상)
▲박한나 목사가 2018 오픈도어 후원의 밤에서 간증하고 있다 ⓒ이지희 기자 |
17년째 전 세계 최악의 기독교 박해국으로 지목된 북한에서 지하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그가 만난 예수를 부인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예수를 전하기 위해 북한에서 10곳이 넘는 감옥을 전전하면서도 믿음을 지켜낸 탈북인 목사의 간증을 소개한다. 한국교회가 배출한 위대한 전도자이자 순교자인 김익두 목사의 손자며느리인 박한나(가명) 목사는 최근 방주교회에서 2018 오픈도어 후원의 밤에서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눴다.
많은 순교자의 피와 눈물의 기도로 얻은 자유
할렐루야! 세상에는 우연이란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제가 여러분들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고 잘난 데가 있어서 여기 서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 능력으로, 그 기적으로 이 영광의 자리에 저를 세우셨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갑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너무나 크고 놀랍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할 때, 마음에 상처 있고 가정의 문제가 있는 성도들, 육신의 고통받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셔서 다 창조의 모습대로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를 본문으로,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주제로 함께 은혜를 나눠볼까 합니다.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들께 늘 감사하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의 자유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살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길거리에서 찬양한다고 누가 잡아가는 사람도 없고, 예배드린다고 잡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자유가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순교자의 피와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늘 이런 은혜와 축복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마시고, 항상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저는 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만 리가 넘는 가시덤불 길을 헤매야 했고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두 번 탈북했다가 두 번 북송되었고, 크고 작은 감옥을 비롯해 열 군데도 넘게 갔습니다. 여기(한국)서 교도소 사역을 한 것도, 제가 감옥에 있을 때 한국에 가면 꼭 교도소 사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에게 '비록 육신은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와 처벌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몇 년 동안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1년이 채 안 되어 다른 목사님과 함께 전국 교도소들을 거의 1년 동안 다녔고, 사임하며 정말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인들인데 머리도 깎지 않고, 여자들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고, 예배드리면서 마음대로 쓰고, 또 마음대로 악기를 다루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감옥에서 하나님을 몰래 찬양하다가 들켜서 두드려 맞고, 벌도 받았고, 정말 그 땅에서 죽어간 이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자기 죄를 뉘우칠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전쟁 과부들에게 몰래 복음을 전하던 어머니
저희 가정에 대해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추려서 몇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5~6살 때 밤에 자다가 깨어났는데, 저희 어머니가 무엇인가 손에다 쥐고 목에 흰 사슬을 걸고, 눈물 흘리면서 자꾸 중얼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어린 마음에 '사람도 없는데 왜 저렇게 우는지, 왜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렇게 말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후에 탈북하고 교회를 갔을 때 자매님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단 것을 보고 '엄마가 목에 건 것이 저것이었구나' 알고 정말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땅(북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목사와 선교사는 양의 탈을 쓴 승냥이들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었다가는 온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정치범수용소에 깊은 밤 1시, 2시, 소리 없이 차로 실어 잡아가고, 그들은 간첩이다, 나쁜 사람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하루는 어떤 사람에게 "절대로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라, 온 식구, 친척들까지 죽으니 일생 동안 돌아가실 때까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듣고 그게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과부들이 멀리서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눈물로 하소연하고, 어머니가 들어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에 그들에게 말씀한 것은,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도 같이 말했다가 돌아서면 남한테 전해진다. 그렇게 울고 싶고 안타까울 때는 하늘에다 대고 하소연하고 울어라. 하늘은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마음도 알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어린 마음에 학교를 가고 올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도 거리가 멀면 안 들리는데 저 하늘에 누가 있길래 땅에서 말하면 우리말을 다 들을까. 거기서도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채소도 있을까' 하며 궁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제가 탈북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때야 이 세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사망하시는 그날까지도 제게 예수님을 전하고 가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1990년도 위암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 학교에 갔다 오면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모여서 무슨 말을 하다가 생뚱맞게 딴말로 돌려치기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나한테 저렇게 나가 놀라고 내쫓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할 때 어머니가 그 불쌍한 과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7살 때 할아버지 김익두 목사 순교 목격한 남편
그리고 저희 남편은 김익두 목사님의 손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키웠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1950년 10월 14일 신천서부교회에서 새벽 기도시간 설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쫓겨가는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죽임당하셨습니다. 남편은 7살 나이에 할아버지가 순교 당하는 것을 보았고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목사라 하면 나도 죽이겠구나'라고 생각해 친한 사람에게도, 가족에게도 할아버지가 순교자라는 말을 못 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부부 간에도 자식 간에도 당의 사상에 틀린 것, 어긋난 것은 다 신고하라, 신고하면 용서해준다고 하니 가족 간에도 불신이 있고 눈치 보고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도 자라왔습니다.
남편도 가족에게 몇십 년 숨기고 있다가, 탈북 후 중국 조선족교회에서 이야기를 듣는 중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생각나 "우리 할아버지도 목사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할아버지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나요?"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이름은 김익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 후에 교회 장로님들이 이야기해주셔서 제가 알게 됐습니다. 오늘 제가 영광의 자리 서게 된 것도 김익두 목사님과 보위부에서 고통받는데도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저의 남편과 저의 어머니 기도가 있었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어머니의 기도가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항상 자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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