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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와 그의 영성

Joyfule 2018. 8. 20. 23:43


 

이용도와 그의 영성


들어가는 말

한국의 선교 초창기에 교회가 낳은 인물들 가운데에는 자랑스러운 분들이 많다. 한학자 출신으로 요한 계시록을 만 번이나 읽으셨다는 길선주목사, 일본 사람들의 잡신들을 모셔 놓은 신사참배를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보여 주신 주기철 목사, 깡패 출신으로 제주도 최초의 선교사가 되신 이기풍 목사,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복음전도의 사도 최권능 목사,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성격적인 복음을 삼위일체적인 삶과 함께 전하시던 성도들의 아버지 이성봉 목사, 그리고 한국의 에스더 안이숙 여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분들 이외에도 거론되지 않은 훌륭하신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겠으나 감리교에서 한국의 영성이라는 주제를 가진 한 분을 들라면 시무언 이용도 목사를 우선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의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이용도의 영성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용도에 관한 연구는 매우 조심스럽다. 자신이 속해 있던 감리교단의 1933년 연회에서 교회를 어지럽힌 자라는 낙인을 받아 휴직처분을 받았고, 한국교회 역시 그를 이단으로 규정해 버린 연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성에 관한 연구는 지난 1970년대 이후 한국에 영성신학이 그 자리매김을 함으로 새롭게 조명되며 초교파적으로 연구되어 왔다.

필자는 이러한 전 이해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이용도와 그의 영성을 장로교적인 안목을 가지고 그의 생애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신앙과 사상, 그리고 그의 신비주의와 이단논쟁에 대한 해석을 내려 보려 한다.

 

1) 지금까지의 연구와 전망

 

이용도에 관한 연구는 미국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1930년 안수를 받고 한국에서 같이 일하던 피도수 선교사 이용도의 죽음 3년 후인 1936년 1월부터 12월까지 Korea Mission Field에 “한국의 기독교 신비주의자 시므온”이란 글을 연재하였는데, 이 글이 이용도 연구의 첫 번째 글이다. 선교사에 의해 쓰인 이 글이 객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점에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이 글이 이용도에 관한 첫 번째 연구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용도가 감리교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출교까지 받은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1920년대 후반기와 1930년대 초기에 그가 우선 행한 설교들과 일기, 그리고 예수교 공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동료목사들의 증언, 노회록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대한 연구를 시도해 보려 한다.

그의 설교들과 일기, 증언들을 통해서는 이용도의 영성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으나,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노회록에 의존하게 되면 당시의 평온한 교회의 질서를 혼란으로 이끈 이단적이며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용도 연구와 그에 대한 재평가의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이용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해방 후부터 시작되었을 때 감리교에서는 윤성범, 박봉배, 변선환 교수가, 그리고 장로교에서는 민경배, 이영헌 교수가 중심이 되어 이용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이외에 송길섭 교수나 유동식 교수도 이 일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를 종합하여 놓은 것이 1978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발간한 ‘신학과 세계’ 4호에 게재된 “한국교회 신비주의 연구 특직”이다.

그러나 이용도에 관한 원 자료를 가지고 지금까지 독점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은 변종호 목사이다. 변종호 목사는 이용도에 관한 자료들을 수직하여 일기, 서간집 등 10여 권으로 된 ‘이용도 전집’을 펴냈다. 또한 최근 이용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1995년에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가 설립되어 있다.


이용도 연구를 위해 이미 언급된 여러분들은 하나같이 이용도를 신비주의자로 규정하였는데, 박봉배 교수는 슐라이에르마허와 비교하여 이용도의 신앙을 ‘절대 사랑의 감정’으로, 변선환 교수는 이용도를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에스터 에크하르트에 비교하였다. 최근에는 제 2회 심포지엄에서 이상윤 목사가 이용도를 한국이 낳은 썬다싱으로 표현하였다.

필자는 이용도의 신학을 계속 연구해 보면서 “피와 상처의 신학”으로 대별되는 독일의 선교적 경건운동에 참여한 진젠도르프와 비교해 보려 한다. 이용도에게는 진젠도르프의 형제공동체 속의 ‘구원자 되시는 고난의 주님’이 신비적으로 예배를 통하여 잘 표현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용도는 1933년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감리교단의 젊은 목사였다. 28세에 목회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보아 그의 부흥활동 기간이란 불과 4~5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이 한국교회의 전 교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측면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부흥운동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1930년대 초반 한국교회의 사도행전의 한 장을 기록한 목회자로서 민족과 국가와 교회와 영생을 향한 불타는 의지를 가지고 수많은 한국교인들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아 거룩한 열정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용도의 생애를 초기의 신학생 이전 시대, 중기 신학생 시절, 그리고 말기의 목회 시작 이후 죽음까지 대략 3시대로 구분하여 보고, 그의 일기에 나타나 있는 4단계적 신앙을 교회시대, 수도시대, 신앙시대, 사랑시대로 구분하여 그의 신앙적 삶을 고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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