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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향기 / 도월화

Joyfule 2015. 5. 5. 00:37

 

 

 계간 문예지 <창작 수필> 여름호 당선작

 

잃어버린 향기 / 도월화

 

 

해마다 대한이 지나면 입춘이 다가오기도 전에 나는 후각(嗅覺)으로 제일 먼저 봄을 느꼈다. 뭔가 알 수 없는 애상에 사로잡히면서 문득문득 싸아한 향내가 맡아졌다.
어릴 때부터 겨울의 끝 무렵이면 싸아한 향기가 느껴지고,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튀어 오르듯 조금씩 가슴이 뛰고 설레었다.

봄이 오고 있구나. 나의 다른 오관(五官)이 미처 봄을 감지하지 못하는 시기에, 아니 사실 봄이 오기도 전에 후각이 제일 먼저 봄의 전령사가 되어 주었다. 정작 봄이 되면 사라지는 원인 모를 향내였지만.

그런데 바로 그 향내가 실종된 것은 삼 사 년 전부터이다. 한 두 해는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코 보냈다. 작년 이맘때는 이상하다 어떤 향내였더라 하며 몇 번 맡아보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원인 모를 향내라 노력해서 맡을 수 있는 향기는 아닌가 보다.

올해도 사라진 향기는 돌아 올 줄 모른다. 이젠 향기의 기억도 희미해져 간다. 답답하다.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답답해진다. 누가 이 향기를 모르시나요 하고 신문에라도 내고 싶다. 그 전처럼 해마다 찾아오는 것이 어렵다면 아주 몇 년에 한 번씩 기억이라도 되살려 주어라. 돌아와라, 원인 모를 향기여, 사라져버린 향기여, 라고 가만히 되뇌어 보게 된다.

기필코 실종된 향내를 찾아 맡아보려 해도 안 된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심기일전 하여 찾아보려고 찻물을 끓였다.

녹차의 향을 음미해본다. 이런 구체적인 향내가 아니었어. 그럼 추상적(抽象的)인 향기였나. 원인 모를 향내이니 추상적인 향기라고 할 수도 있을까.

구체적인 물건에서 실제로 나는 향내가 아니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어떤 순간 불현듯 나는 향내를 추상적인 향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맡아본 추상적인 향기는 어느 때 어떤 것이 있었나. 나는 계속 실종된 향내를 추적(追跡)해 본다.

천주교회에는 묵주기도라는 염주 비슷한 것을 들고 하는 기도가 있다. 파티마의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처음 할 때 기도에 몰입한 상태에서 장미 향기가 났다. 부근에 장미라고는 없는데도 실제로 장미 향과 똑 같은 향기가 났다. 추상적인 향기인 점은 같으나 문제의 싸아한 향기는 아니다.

또 다른 추상적인 향기라면 큰 아이를 낳은 날 병원에서 맡았던 향내가 있다. 병원 냄새가 아니고 장미향도 아니고 표현할 수 없는 평화에 감싸이게 하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때는 불현듯 한 번씩 나는 것이 아니라 한 20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났다. 그러니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그 경우도 역시 실종된 싸아한 향기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향내의 발원지(發願地)는 대체 어디였을까.

겨우내 꽁꽁 얼었던 시내의 쨍한 차가운 물이 얇아진 얼음 아래로 흐르는 그 곳일까.

연두색 잎사귀 움트는 수풀 속일까.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산자락에 피어난 제비꽃을 반기며 얼굴을 가까이 하고 들여다볼 때의 흙 냄새일까.

사과 향기보다 덜 달큰 하고 풀 냄새보다도 덜 자극적인 싸아한 향내였는데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다. 과일보다는 풀 향기 비슷하나 풀 한가지만의 향도 아니었다.

그것은 고향의 흙과 풀과 사과나무에 움트는 잎사귀, 하늘, 바람, 공기, 지금은 돌아가신 어린 시절 나를 사랑해 주시던 어른들의 체취(體臭)가 뒤섞인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내 어릴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늙어진 뒤에도 그러하리니,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

영국의 낭만주의 대표적 시인,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의 <무지개>란 시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어릴 때도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했다.

하늘의 무지개와 나의 실종된 향내, 그건 어쩌면 구상과 추상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내용으로는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워즈워드의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란 비유어가 진리 그 이전의 '진실(眞實)'의 세계라면, 나에게 있어서 향내의 실체는 모름지기 순진 무구한 '순수(純粹)'의 얼굴일지도 모르니까. 그럴 것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도시의 공해와 복잡다단한 일상 속에 함몰해가고 있는 나의 생활이 유년시절의 냄새마저도 그 안에 희석 시켜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놓쳐버린 순수(純粹)를 회수할 수만 있다면,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어른이 된 지금도 가슴이 뛴다는 워즈워드처럼 나도 다시 잃어버린 향내를 느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순수(純粹)에의 갈구(渴求)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옛날처럼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은 잃어버린 향기를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며칠 후면 대한이고 머지않아 입춘이 다가온다. 올 겨울도 서서히 꼬리를 드러내고 있다. 순진 무구한 어린 시절의 향수에서 오는 것이 잃어버린 향내의 실체라는 것을 더듬어 헤아렸으니, 남은 나의 하루하루를 워즈워드의 시에서와 같이 순수한 감성을 지니고 살도록 노력 해야겠다. 이제 새 천년의 봄이 오고 있으니 잃어버린 향기도 다시 찾아 오려나. 해마다 대한이 지나면 입춘이 다가오기도 전에 문득문득 느껴지던 싸아한 향내를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