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봄이 일어서고 있다 / 최인호
많은 환자들이 처음에 의사로부터 중병을 선고받으면 어떻게 내게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회의하면서
자신의 병을 부정한다고 하는데,
나는 처음 의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강열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仙家의 말중에
'살아도 온몸으로 살고 죽어도 온몸으로 죽어라'라는 말이 있다
나는 병원에서 환자복으로 갈아입는 순간부터 병을 받아 들이고 온몸으로 환자로 살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일체 사람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환자로서의 章典을 선포했다.
나는 병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직 죽음일 뿐 병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않는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그 유명한 <죽음에 이르는 병>처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기 시작하는 환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 스스로 자기병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낄 필요도 없으며, 주위 사람들도 환자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면 그만이지 지나친 호기심을 갖거나 쓸데없는 호사가적 참견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병원에 오니 참 아픈 사람이 많지요?"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갔을 때 치료사가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나는 지금까지 병원에 갈때마다 병원은 자주 갈 때가 못되는 재수 없는 곳,
운이 나쁜 사람들이나 가는 저주받은 곳,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격리된 감옥과 같은 수용소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내가 막상 환자로서 병원을 출입하게되니 그 치료사의 말처럼
아아, 세 상에는 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병실에서,복도에서 환자들을 만나면 가슴속 깊이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절로 울면서 고개를 숙이고 다니곤 했다.
왜 이렇게 병에 걸린 사람이 많은 것일까.
이제야 알겠으니 , 어째서 2천년전 부처가 生老病死에서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아, 나는 글쟁이로서 지금까지 뭔가 아는 척 떠들고 글을 쓰고 도통한 척 폼을 잡았지만 한갓 공염불을 외우는 앵무새에 불과했구나.
일찍이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A.모루아는 이렇게 말했다.
"병은 정신적 행복의 한 형식이다 .
병은 우리들의 욕망, 우리들의 불안에 확실한 한계를 설정해 주기 때문이다"
모루아의 말처럼 병은 절대의 행복이다.
병을 통해 인간은 우리들의 욕망, 그 끝간 데를 모르는 무자비한 욕망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또한 이 지상의 그 어떤 공포도 죽음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가르쳐 준다.
악마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인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C.힐티는 <행복론>에서 말하고 있다.
"강의 범람이 흙을 파서 밭을 갈듯이 병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파서 갈아준다.
병을 바르게 이해하고 견디는 사람은 보다 깊게 보다 강하게 보다 크게 된다."
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지 않으면 대지는 황폐해 진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되기 위해서는 강의 홍수로 땅이 뒤집혀야하는 것이다
태풍이 바닷물을 엎어버리지않으면 프랑크톤은 사라지고 물고기들의 먹이사슬은 끊어진다.
바다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태풍이 몰아쳐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병의 홍수와 태풍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른 봄 작은 언덕 쌓인 눈을 저어 마소
제아무리 차다기로 돋은 움을 어이하리
봄옷을 새로 지어 가신 님께 보내고져...'
한용운의 '이른 봄 (早春)'이라는 시처럼 눈 쌓인 작은 언덕에 봄 봄 봄이 오고 있다.
굳이 쌓인 눈을 치울 필요는 없다.
저처럼 매운 눈바람에도 매화는 어김없이 봉오리를 맺고 있나니 내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내 다정한 아픈 사람들아 그대의 병을 대신 앓고 싶구나
아프지말거라 ,
이 땅의 아이들아 ,그리고 엄마야 누나야,
창밖을 보아라. 새 봄이 일어서고 있다.
최인호 - '인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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