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열풍, 자존감에 대한 고찰(with 거짓자존감)
메스컴에서도 유명 인기 강사들은 '자존감'에 대해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 '자존감'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존감'에 열광했다.
왜 그런가?
"실제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다."
자존감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을 말한다.
필자도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있고,
사실 "자존감" 이란 말은 듣기 너무 좋은 말이다. 귀를 만족시킬 매혹적인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마음이다.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것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은, 마음에서부터 채워지는 내적인 강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자존감을 다룬 인문학 책들은 '자존감'을 얻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즉 '마음'을 구원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시도에 불과하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을 소유한 듯, '성숙' 해진것처럼 보였다.
이젠 사람을 구분할 때, 자존감 있는 사람, 자존감 없는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그 결과 '자존감 없는 사람'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미성숙하거나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는 듯 하다.
그러자 이젠 뒤쳐진 사람으로 평가 받기 싫으니
자존감 있는 척을 하며 너도 나도 '거짓 자존감' 을 내세우기에 이른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한다.
"거짓말이 아니고, 나는 진짜 자존감 높아. 나는 든든해."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자존감이 있다고 평가하는 것인가?
외로움을 타지 않는게 자존감이 있는 것인가?
혼자서도 잘 지내는 것이 자존감이 있는 것인가?
인정 받지 않고도 잘 지내는 것이 자존감 있는 것인가?
과연 그럴까?
사실 자존감이 있다는 사람들이야말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사실 누구보다도 열등하다.
그들은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자신의 내면을 잘 숨길 뿐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가?
먼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내면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마음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잠28:26)
그들은 자존감을 얻었다는 착각 속에 스스로에게 속임 당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스스로 자존감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성숙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어린 학생들부터~노년에 이르기까지 '거짓 자존감'에 물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존감이 있다고 말하나,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극도로 원하고 있다.
은근히 남보다 강하길 원하며, 은근히 남보다 앞서길 원한다.
말로는 정직을 외치나, 실제는 유혹에 쉽게 굴복하며 진실을 왜곡하기 일쑤다.
자신의 입으로는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돈에 대해 은근히 관심이 많다.
그래서 서울대, 박사, 천재, 전문가, 부동산, 주식, 로또 얘기만 나오면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이 아닌가?
조금만 자극을 주면 금방 약함이 드러나고 무너진다.
필자가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이고 상식적인 모범 답안" 을 말하고 있을 뿐,
실제 자존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왜냐하면 그들이 얻었다는 당당히 내세우는 자존감이란, 사실 한 순간에 무너질 자존감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존감이란, 그저 잠깐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인본주의적으로만 접근하면, 욥도 불평 불만 가득한 '자존감' 없는 패배자처럼 보인다.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 시작하며(욥3:1) 패배자 의식은 끝장을 본다. 열등하기 짝이없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욥은 분명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욥1:1)
나는 묻는다.
당신은 자존감이 있는 사람인가?
자존감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들, 스스로 자존한들 그것이 언제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인문학의 늪에 속아 넘어간다. 허탄한 것에 시간을 허비한다.
'자존감'을 마치 어떤 수양을 통해 얻어야만 하는, 도달 해야하는 진리처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인문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문학을 적극적으로 연구 해야한다.
그러나 기본 바탕이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자존감! 자존감!> 중요하다고 외치긴 하는데, 자존감의 실체에 대해 명확히 알지도 못한다.
자기자신도 궁극적인 자존감에 이르지 못하며, 자존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어리석은 선생이 된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존감을 얻어보려고 하는 어떠한 시도도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잠시 마음이 평온해져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는 헛된 자존감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모래 위에 쌓은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마7:26-27)
사실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한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좋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엄격하게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그리 썩 맞는 단어는 아니다. 인문학적인 단어이며 성경적인 단어는 아니다.
자존감이란 단어를 인간 스스로의 마음의 구원, 인간 스스로의 내면적 성숙,
인간 스스로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사전은 '자존감'의 정의에 대해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을 멀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상이 뒤틀리고,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언제부터 개인의 든든함을 강조했는가?
개인의 자존감을 키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적이었던가?
자존감을 키우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던가?
애초에 그리스도인이 홀로 서기가 가능했던가?
하나님이 콧김만 불어도 사라지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욥4:9)
성경적 사고관이 무너지고, 인문학적인 영향속에 분별이 되지 않아서 그런것이다.
성경을 멀리하고 인문학 책을 가까이 하다보니, 사회적으로는 유능한 사람처럼 평가 받지만
사실상 지혜있다고 하는 자들이 더욱 어리석은 것이며 가치관이 썩어 문드러진 것이다.(고전1:20)
그런식의 출발 자체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자존감을 키워서 마음에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구지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쓰자면, 성화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른 자존감이 아닌가?
강한 사람이 되자! 오늘부터 자존감을 키워서 내면의 성숙한 사람이 되자!
그런식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자존감이 든든한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고백하며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때, 진정한 자존감이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고후12:9)
진짜 강한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독립적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꿀리지 않기로 결단하자!"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은혜 안에서 강한 것이 아닌가?(딤후2:1)
반석되신 하나님을 의지함이 나의 강함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인문학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마음을 구원하기 위한 자존감을 기르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 결국 실패하는 모습 뿐이다. 그 누구도 완전한 자존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죄악된 열등감의 모습을 잠시 숨긴 것 뿐이다. 열등감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폐기 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존감을 올리려는 인간적인 시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혼자 자존감이 높아서 마음이 평안하면 도리어 악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다시 정의해본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존감이란 다음과 같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한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성숙한 사고와 의식.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자존감이란, 하나님을 의지하는 상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만큼, 그 사람의 자존감은 높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만큼 자존감이 높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내부로부터 진정한 성숙을 이루어 나가신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가 진정한 자존감을 가지며 정직한, 든든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여러분에게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영성의 실제와 신앙의 승리 요약..
이 용범 著 -
제 1 부 영성의 실제
제 1 장 영적 실제로 나아가는 길
1. 한국교회와 신학의 정체성(Identity)
중세 이래로 신학은 기독교 철학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신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특히 목회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체험한 것 이상을 가르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신학교육은 지성과 영성, 학문과 계시,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통찰 그리고 사변적, 논리적, 합리적, 역사적 지식과 함께 영적, 인격적, 훈련과 신비적 은사 체험이 있어야 한다.
2.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는 길
능력 있는 신앙인으로서 심령의 연못에 영생수를 가득 채우려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령한 생활에 자신의 삶을 투자해야 한다. 또한 공급받은 영생수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심령의 댐을 튼튼히 막아야 한다. 은혜를 쏟아버리는 각자의 취약점을 함께 모여 말씀을 묵상하고 합심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3.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약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믿음은 예수를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믿음은 행함이 동반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에서의 믿음은 오늘의 고난 중에도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행함 속에서 나타내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4. 크리스천의 영성생활 - 균형 잡힌 영성생활(칼빈)
1)하나님과의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 2)영적 체험을 통해서 신지식(神知識)을 얻게 된다. 3)신지식을 실천하는 사랑의 봉사이다.
5. 신앙 발전의 5단계
1) 은혜의 단계 - 초보단계로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고 영육 간에 은혜를 받는다.
2) 율법의 단계 -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갈등하며 투쟁하는 단계이다.
3) 십자가의 단계 - 환경과 조건으로 자아에 상처를 주고 주님께 승복하게 하신다.
4) 부활의 단계 -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5) 하나님을 증거하는 단계 - 성령과 권능을 받는 생명력 있는 성도의 삶이다
6. 사랑의 본질
인간의 사랑의 본질은 상대에 대한 관심이다. 사랑의 특징은 돌봄이며, 이해이며, 존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아기적인 모성적 사랑과 성인으로서의 성숙한 부성적 사랑의 각 측면이 있다.
7. 정말 천국이 있습니까?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 주제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이며 공간적 장소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를 구할 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발견한다.
8.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비결
1)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 주변에 영적으로 힘이 되는 것을 붙잡고 일어나라. 3) 내 마음의 신령한 성전에 임재해 계신 주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라. 4) 주님께 자신의 의지를 바쳐야 한다. 5) 자신의 만족을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두어야 한다. 6)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7) 죄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영적으로 일어서기를 갈망하라.
9. 영적 성장을 위한 정화(감성의 밤)
십자가 성 요한은 피조물에 대한 애욕(집착)을 어둠이라 했고, 애욕을 끊어 없애는 것을 감각의 밤이라 했다. 영혼을 밝히는 정화란 어둠에 대한 감성의 밤으로서 애욕을 끊어 없애는 것이다. 능동적 정화는 자기의 노력으로 애착을 끊는 것이며, 수동적 정화는 하나님께서 정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감성의 밤은 메마름과 텅 빈 밤을 통해서 교만의 악습을 뽑아내어 영성적 겸손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10. 육에 속한 성도를 깨뜨리는 역사
육신 중심의 성도가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은 고독한 시간, 어려운 환경이다. 이렇게 해서 깨어진 성도는 타자본위의 삶을 살며, 담대한 인생을 살며, 예배드리기를 즐거워하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전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11. 깊은 영성과 고난의 광야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먼저 고난의 광야로 내모신다. 그 이유는 1)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2)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고난의 용광로를 통해서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정결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난의 광야는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가?
1)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사막이다. 육신의 오관으로 느끼는 재미가 없어진다.
2) 고독하고 한적한 곳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만남의 장소이다.
3) 목이 타고 궁핍한 곳이다. 오직 전능자의 도움만을 바라게 되어 겸손해진다.
4) 가장 거친 위기의 환경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를 체험할 절호의 기회이다.
12.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성령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성령의 지배와 통제에 순복하지 못하고, 영과 육 사이의 왕래를 반복한다.(롬 8:4-6) 그러나 강건케 된 영은 외부 환경과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을 따라 살아간다.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있고, 영의 지배를 받고 영의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신령한 자이다.
다음은 영적 전쟁에서 모든 악조건을 헤쳐 나가는 부단한 노력의 모습이다.
1) 하나님과의 진실하고도 깊은 영교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2) 영적 직관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세계를 알아가야 한다.
3)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영적 직관을 통해서 알게 된 그 분의 뜻과 계시와 명령을 따라 그 분의 지배와 통제를 받아서 행하는 삶이다.
13. 기다림의 훈련
1)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해서 인내심을 키워 나가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기다림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인간에게 고통의 시간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다윗도 하나님의 침묵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불안한 상황이 있었지만, 확실한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했다.
2) 하나님은 침묵 속에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이 침묵하자 목자생활 40년 동안에 혈기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
3)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해서 인간을 준비시켜 나가신다. 하나님께서 침묵하는 시간에 우리는 기다리되 수동적으로 그냥 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냥 팔짱끼고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재창조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영안(靈眼)에 대한 이해.
♥ 들어가며
‘영안’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안’이란 직접적인 표현은 성경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이나 의미상으로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1. 눈(眼)의 의미
물체를 보는 감각기관(창3:5;잠22:9;마7:3;눅11:34).
성경에서 ‘눈’을 통하여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히브리인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성경에 눈과 관련된 다양한 상징적 표현이 등장한다. ‘눈은 몸의 등불’(눅11:34)이란 말에서, ‘눈’은 사물의 인지 능력을, ‘몸’은 사람의 인격을, ‘등불’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분별력에 비유한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2. 눈(眼)의 종류(種類)
1) 육신의 눈(肉眼)
표면적인 물체를 인지하는 감각 기관(마7;3;행9:8,9)을 말한다.
2) 마음의 눈(心眼)
내면적인 정신을 통찰하는 능력(엡1:18;히12;2)을 의미한다.
3. 영안'(靈眼)의 의미(意味)
영적인 눈 즉, 영적인 지각과 이해를 의미한다(시19:8).
4. 영안의 개념(槪念)
‘영’은 하나님과 관계되어지는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을 의미하니(욥12:10;요4;24), 본질상 ‘마음의 눈’과 동일어라 할 수 있다. ‘마음 눈을 밝힌다’(엡1:18-19)는 말은 영적인 안목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눈을 말한다.
4. 영안이 열리는 경우(境遇)
1) 하나님의 주권으로 열린다.
(1) 사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에 하늘로서 큰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행9;3,22626:13).
(2) 바울이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을 보았다(행16:9,10).
(3) 바울이 세째 하늘에 끌려가 환상을 보았다(고후12:1-4).
2) 성령이 충만 할 때 열린다.
(1)제자들이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 같은 성령강림을 보았다(행2:3).
(2)스데반이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행7:55,56).
3) 성령에 감동하여 열린다.
(1) 사도들이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주는 것을 보았다(행5:18-20).
(2) 사도 요한이 일곱 금 촛대(계1:12-20)와 하늘 보좌를 보았다(계4:2).
4) 기도할 때 열린다.
(1) 엘리사가 기도하여 게하시가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왕하6:17).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저희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았다(눅24:31).
(3) 고넬료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행10:3).
(4) 베드로가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을 보았다(행11:2-10).
(5) 베드로가 옥중에서 주의 사자가 자신을 구해주는 것을 보았다(행12:5-12).
(6) 베드로에게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고 하셨다(행22:16).
4. 영안의 역할(役割)
1) 주님께서 길을 알려 주신다.
(1) 사도들에게 성전에서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셨다(행5:20).
(2) 사울에게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행9:6)
(3)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 안수하게 하셨다(행9:10-18).
(4) 고넬료에게 바울을 청하여 말씀을 듣도록 인도하셨다(행10:4-8,31-33).
(5) 베드로에게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의심치 말고 따라가라고 말씀하셨다(행10:17-20).
(6) 바울에게 담대하라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셨다(행23:11)
2) 감추인 것을 알게 된다.
(1)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가 땅값 감추었는 것을 알게 되었다(행5:1-11).
(2) 바울이 주의 환상과 계시를 알게 되었다(고후12:1,7).
(3) 사도 요한에게 미래의 일을 계시하셨다(계1;1).
(4) 계시를 받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마11:27;눅10:22).
3) 병들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1) 욥바에서 병으로 죽은 도르가를 기도하여 살렸다(행9:36-42).
♥ 나가며
예수께서 반벙어리의 귓속에 손가락을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에바다"(ephphatha: 열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7:34). 우리는 미혹의 영을 분별하고, 오직 주님의 “에바다"의 축복으로 눈을 떠서 천국을 바라보고,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입을 열어 복음 전하는 믿음의 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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