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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사망이여 - 스펄젼.

Joyfule 2022. 4. 15. 09:25


 

 

    잘 가라 사망이여 - 스펄젼.

 

잘 가거라 사망이여!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켰다고 하셨으니](고전 15:26,27)

지난 4주 동안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분의 위대한 업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의 마침이시요, 사탄을 정복하신 분이시며, 모든 새로운 것들의 창조주이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망을 멸망시키신 주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망을 멸망시키신 것은 구속주의 가장 위대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의미를 완전하게 계시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사람과 같이 되신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시편 기자인 다윗이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마음에 두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본문을 두고 여러분은 아마 다윗이 겸손한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을 높이기를 기뻐하실까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이 몇 마디 안에 영광스러운 복음이 감추어져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편 8:6에서 주께서는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령님의 해석을 따라 바울이 시편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시편 8편은 단지 야만적인 피조 세계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본문에는 또 다른 훨씬 더 중요한 해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언자로서 다윗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신 분, 바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높임을 받은 인자이시요, 모범이 되는 인간이시며, 둘째 아담이시고,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는...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언급한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생각에만 이상할 뿐이지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진리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람이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인간과 같이 되신 분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시편에서 부활의 필연성을 어떻게 추론해 냈는지 보도록 합시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모든 것'이 놓여져야만 한다면, 모든 악한 것도 그분께 정복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사망이 정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셔야 하리니. 그러므로 사망도 궁극적으로는 정복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간단한 시편의 한 문장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교리를 이끌어 냅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었다면 결코 시편 8편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일반 독자라면 결코 생각지 못했을 귀중한 진리를 도출해 내게 하십니다.

성경 본문은 요술 상자 같습니다. 상자를 열면 또 상자가 나오고 또 나오다가 제일 안에 있는 상자에 보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비밀이 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비밀들은 그 안에 비밀을 감추어 두신 분이 일깨워 주실 때에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책들은 대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에 아주 못미칩니다. 그러나 주님의 책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책은 빛으로 차 있으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계시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성경에 무엇이 더 감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 안에 거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 안에는 우리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저장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저장고를 밝히는 계시의 불빛이 현재 우리 눈에는 너무나 밝아서 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성령의 조명을 통해 다윗의 노래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면, 우리도 바울 서신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영광을 우리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망은 원수입니다. 사망은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사망은 마지막으로 멸망받게 될 원수입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1. 원수인 사망

사망은 원수로 태어났습니다. 아각인 하만이 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망은 우리의 가장 끔찍한 원수 ?죄?의 자녀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약 1:15).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롬 5:12).

죄의 열매가 인간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사망은 인간이 타락한 그 암울한 날에 이 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이며 반역자인 마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볼 때 사망은 인간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사망은 사실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같습니다. 사망은 원래의 창조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타락된 피조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온 세상이 손상되고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망은 목자장께 속한 양무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망이라는 이리는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들어온 것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초대하신 손님이 아닙니다. 사망의 침입으로 연회는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와 사탄이 낙원의 축제에 들어오려 할 때 어리석은 인간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사망을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멀어버린 눈으로도 그것이 잔인한 적인 것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에게 사망은 평원의 소떼를 노리는 사자와 같고, 싱싱한 들꽃을 내리치는 잘 드는 낫과 같으며, 시들어 버린 나뭇잎에 잔인하게 불어대는 강풍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본능적으로 사망을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이 죄의 자녀라고 양심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원수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망은 원수가 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오는 이유는 뿌리째 뽑아 버리고 넘어뜨리고 파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작품인 사람의 몸을 흉하게 썩어 문드러지고 없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토록 경이롭게 지으신 것을 말입니다. 사망은 하나님의 솜씨를 자랑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육신을 무덤 속의 벌레들에게 던져 줍니다. 그러면 이 벌레 군단은 포획물에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먹어치우는 것입니다.

건장한 남성의 육신은 아름다운 집과 같지만, 파괴자인 사망은 그 창을 어둡게 하고 그 기둥을 흔들리게 하며, 결국 그 문은 닫히고, 맷돌질 소리를 그치게 만듭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딸들도, 강한 남자들도 사망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전 12:3,4). 이 파괴자는 그 사람의 생이 얼마나 많은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일순간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망은 생의 모든 영역을 여지없이 뚫고 들어오는 칩입자입니다. 사망이 들어오면 모든 훤칠한 나무들이 쓰러지고, 모든 샘들이 멈추며, 모든 훌륭한 땅이 돌밭으로 변합니다. 사망이 어떤 사람을 먹이삼을 때 그 사람은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재로 변하고 썩어 버립니다.

죽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힘을 과시합니다. 무덤이 없는 나라가 있습니까? 묘지가 없는 도시가 있습니까? 비석이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원수인 사망은 불칼을 들고 인류를 파괴시키며 전진해 왔습니다. 아무리 포악하고 야만적인 민족도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살아 숨쉬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누구도 놓치지 않고 따라잡습니다. 죽음은 모든 곳에 손을 뻗쳐 가정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과 한숨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해가 뜨는 모든 곳에서 죽음은 사람들의 시야를 눈물로 가렸습니다. 사별의 눈물, 과부의 울부짖음, 고아의 절망, 이런 것들은 죽음이 일으킨 전쟁의 음률이며, 거기서 죽음은 승리의 노래를 불러 왔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수하에 있는 사형 집행인에 불과하며, 죽음의 아수라장에서 일하는 고용된 도살업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쟁이란, 죽음이 평상시보다 좀더 서둘러서 식인 축제를 열고 희생자를 게걸스럽게 삼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 묻어 본 사람이라면 사망이 어떤 원수인지 잘 알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친구를 빼앗아 가고, 우리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집안의 가장을 데려갑니다. 집안의 따뜻한 햇살 같은 어머니를 나꿔채 갑니다. 어린 아이를 그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아 갑니다.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한창 피어나는 젊은이를 그 아버지 곁에서 빼앗아 갑니다. 그 젊은이에게 걸었던 부모의 애정어린 기대가 무너지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입니다.

죽음은 젊은이에게나 노인에게나, 누구에게도 전혀 자비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선하든, 아름답든 전혀 고려치 않습니다. 죽음의 낫은 아름다운 꽃이나 백해무익한 잡초를 가리지 않고 잘라 버립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정원에 들어와서 백합화를 짓밟고 장미 송이를 땅에 흩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모퉁이에 심겨져서 수줍은 듯 나무 그늘 아래 그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수수한 꽃들조차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꽃들의 향기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불타는 호흡으로 그것들을 시들게 합니다.

특히 죽음이 하나님의 교회에 침입해서 하나님의 일꾼을 데려갈 때, 죽음은 성도들의 원수입니다. 가장 유능한 사역자들이 죽음의 강타로 쓰러지면 교회는 애도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죄를 경계하던 예리한 눈초리를 어둠 속에서 감겨지게 하고, 훈계를 말하던 혀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망인 것입니다.

사망은 너무나 자주 우리를 대적합니다. 가장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지치지 않고 일하던 일꾼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가장 강력한 기도의 사람들, 마음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담고 있던 사람들, 생에서 모범이 되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창 일하다가 이들을 참으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회를 뒤로하고 쓰러집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사망으로 넘겨지도록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분의 백성들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고 사망을 최악의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전쟁에서 면제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년에 여러 차례 징병자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지만 마침내 그의 백발은 겨울 아침에 내린 서리를 무색하게 하며, 제아무리 철인일지라도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일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쇠를 막을 수 없으며 젊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불로장생의 묘약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진 권력자라도 ?멸망?을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값나가는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빛나는 면류관을 쓴 군주도 무덤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용감하고 강인한 용사도 무덤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통치자는 벌레의 형제요, 벌레와 같은 집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망은 교활한 적으로서 사방에 매복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무해하게 보이는 것들 속에도 사망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 복병을 매복시켜 놓지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죽음은 어디서나 우리를 공격합니다. 식탁 음식 속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샘에서 사람들이 마시는 음료에 독을 넣기도 합니다. 죽음은 침실에서 우리를 붙잡기도 합니다. 죽음은 바다의 폭풍 속에서 항해하는 사람들과 동행하기도 합니다. 오 사망이여, 우리가 너를 피해 어디로 도망할 수 있겠느냐? 교활한 원수 사망은 우리가 사망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 등뒤에서 소리없이 따라옵니다.

죽음은 우리 중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원수이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우회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다 되면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새들처럼 우리 모두는 새 사냥꾼의 그물 속으로 날아들어가게 됩니다.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저 대양 속에 있는 모든 물고기는 그 때가 되면 죽음의 거대한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침에 떴던 해가 반드시 지는 것처럼, 한밤을 수놓던 별들이 마침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처럼, 땅을 돌며 여행하던 물이 결국 바다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끝이 옵니다. 이른 나이에든 늦은 나이에든 반드시 끝은 오며, 그러면 우리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산 자들 가운데 더 이상 알려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 원수의 공격은 갑작스러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죽음을 인지할 틈도 없이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입술에 한 편의 시를 싣고 그들은 사라져 갑니다. 혹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사에 분주하다가 대차 계정을 제출하라는 소환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간 신문에서 사업상 알고 지내던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출근하기 위해 신발을 신으면서 자기는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농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경시되거나 사소하게 여겨질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구속주께서 멸망시키신 잔인한 원수를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죽음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습니까? 죽음의 특징에 대해 살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