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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윌슨 - 뒤틀려진 복음

Joyfule 2020. 1. 16. 10:34


 

      제프리 윌슨 - 뒤틀려진 복음

 

 

믿는다는 말의 의미


어떤 이들에게는 본주제가 퍽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짜 복음의 주춧돌이 참된 복음의 경우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혹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 말이 신약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정의되었는지를 규명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예수님은 믿는다는 말을 자신과 관련시켜 사용하실 때에 신중하게 그 본질을 정의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고 대신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곧 인간을 죄의 형벌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구주로서 영접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인기 복음은 이 영접에서 그쳐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제시했던 복음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복음은 구원이 거저 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희생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뜻하신 믿는다는 말의 내용과 배치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게 주님을 따르기를 결정하기 이전에 비용을 예산하라’(14:28)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메시지에 따르면 구원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게 합니다. 믿는다는 의미의 부차적인 개념은 복음서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다음 본문들을 찾아보십시오-마태복음 16:24-27, 마가복음 1:14-15, 누가복음 14:25-33,18:18-30, 요한복음 12:24-26.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포기하며, 자아 중심과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며, 주님을 따르고 또한 순종하려는 의식적인 의도와 함께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믿는자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개인적인 비용이며 희생입니다. 1세기 때처럼, 오늘날도 이 같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예수님을 믿으려는 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7:14). 예수님의 이 교훈은 지금도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복음에 응답하는 자들은 비교적으로 말해서 어떤 시대에나 혹은 어떤 나라에서도 소수입니다


복음서의 많은 실례 중에서 예수님의 전도 메시지와 방법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어떤 부자 관원에 대한 말씀입니다(18:18-25).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켰다고 공언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생각과 동기를 아셨습니다. 그는 재산이 많았는데 자기의 재물에 의존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영생을 구하는 이 부자 관원에게 첫 단계, 둘째 단계, 셋째 단계식으로 안일하게 짜여진 값싼 복음을 주셨습니까? 분명히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관원이 투신하고 의존한 돈과 재산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집착을 꿰뚫어 보시고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주님은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부자 관원은 영생을 갈급해 한 것처럼 보였지만 현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안전이 지상의 재산과 소유물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조건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졌던 것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포기할 용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교훈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예수님은 그 젊은 관원이 영생을 하나님의 조건에 맞게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조건에 맞추어 받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증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두 주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불가능한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행하듯이 그에게 거짓된 결단을 하도록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이 자신의 죄들을 진정으로 깨닫지 않았으므로 회개를 하고 주님을 전적으로 따를 준비가 안 된 것을 아셨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님의 믿음의 정의에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마음의 준비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부자 청년 못지않게 재산이 많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그 부자 관원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전도 메시지를 부유한 자들에게 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부자 청년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돈과 재산에 대한 우상적인 집착을 회개할 용의가 없을 것이며, 세상의 재물에 대한 애초의 헌신과 의존을 하나님께로 바꿀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8:25).


부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약화시킨 것은 매우 슬픈 현실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아직도 가난한 자들이 많지만, 서구 사회를 비롯해서 유족한 자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많은 넉넉한 사람들이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복음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의 헌신을 주님께 돌려 드리려는 진지한 의사가 없이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돈과 재산과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안전과, 권력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받아 주셨으며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가르침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젊은 부자 관원을 받아 주시지 않았듯이 그들도 안 받아 주신 것이 너무도 확실합니다. 그들은 차라리 예수님이 사람들을 돌려보내셨듯이, 전도자들과 교회들에 의해서 그들의 착각을 격려받기보다는 거절을 당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신약을 정직한 눈으로 살펴보면 구원하는 믿음은 죄와 자아로부터 떠나는 회개를 수반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한 운명을 맡기는 전적인 투신입니다. 사실상 투신은 믿음의 의미 속에 들어있습니다. ‘믿는다’(:피스테오)는 헬라어는 신뢰한다, 의탁한다, 맡긴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정의를 내린다면 믿음으로 자기를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보면 믿는다는 말의 정의 속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밀착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는 믿음이 행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분의 다스림과 품성이 신자의 생애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은 다소의 바울처럼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22:10)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약은 사람이 회심할 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투신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받들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온전히 복종하려는 진지한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은 처음 예수님께 자신을 맡길 때에 제자가 되는 모든 의미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두 다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의미를 아는 일은 오랫동안 계속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어린아이의 이해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모든 진정한 믿음이 그렇듯이 마음속에 하나라도 보류된 것이 없이 자신을 내맡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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