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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종

Joyfule 2020. 1. 13. 04:37


 


      여호와의 종

 

1.「여호와의 종」의 뜻


히브리어의 『종』「에벧」(דבע)은 본래 「노동」, 혹은 「봉사」를 의미하는 동사 abad에서 왔다. 그러나 이 말이 사용되는 때마다 항상 주종적 예속 관계를 표시했다. 헬라어 번역에서 늘 「둘로스」(δουλοS)라는 말로 옮겨졌는데 이 단어의 어원은 「속박한다」는 뜻인 「데오」(δεο)에서 온 것임이 거의 분명하다. 헬라 70인경(septuagint)이나 또는 신약 성경에 있어서 「둘로스」는 아무런 속박의 뜻이 없는 「봉사자」, 즉 종이거나 자유자의 구별 없이 사용된 유사 어인 tkeraphon과는 늘 구별되어 사용되어 있다.

고대 바벨론에 있어서도 『종』이라는 말인 abdu는 최고의 자기 겸비의 대명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이라는 단어가 지닌 자기 비하의 사상은 성경 적인 특수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종』이란 말이 가진 근본적 개념을 자기 비하의 어떤 대명사에서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 라 십계명 속에서 그 특수성을 발견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 3).

이 첫 계명 중에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 있어서의 『종』이란 말이 갖는 다음 몇 가지의 특수 사상을 발견한다.

첫째로, 구약에 나타난 『종』이란 말의 특수 사상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사상에서 찾게 된다.

구약의 「여호와의 종」의 사상은 이스라엘 족속 전체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말은 곧 「여호와의 종」은 누구 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가 여호와의 신과 언약의 관계에 있는 선민의 일원이 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요, 또 그 언약체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호와의 종」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종」이 개인을 가리키는 때일지라도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항상 그 언약체의 축소이거나 대표자로서는 것이다.구약 신학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맺은 이스라엘 전체와의 언약의 개념이 언제나 앞서는 것이요, 그언약체 내에서는 개체와 총체가 서로 유동적이면서 그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이사야 40장 1절에서 9절까지의 「여호와의 종」은 개인(메시야)에 대한 예언임이 분명하나 곧 이어서 18절 이하에 그같은 「여호와의 종」은 벌써 그 동일한 개인이 아니다.

복수형인 집단체이다. 즉 전자(사 42:1-9)가 「여호와의 종」인 메시야의 예언이라면 후자(사 42:18-22)의 「여호와의 종」은 메시야의 예언으로 볼 수가 없다. 메시야가 소경(사 42:18)이요, 귀머거리(사 42:18, 19)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 그 대답은 간단하다. 전자의 「여호와의 종」은 언약의 성취자가 된 메시야의 예표적 지칭이나, 후자의 「여호와의 종」은 마땅히 그 언약의 성취자가 되었어야 할 이스라엘 전체, 혹은 그 「남은 자」를 일컫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3:47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사야가 말한 「여호와의 종」(사 49:6)이 곧 신약의 성도로서 해석했다.

둘째로, 「여호와의 종」의 개념이 「질투의 하나님」과의 대면자라는 생각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에서 보는 대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하신 이 사상은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피언약자의 예배를 요구하실 뿐 아니라 절대의 헌신을 요구하심을 암시한다.

이 절대의 헌신이라는 사상을 떠나서 「여호와의 종」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헌신의 태도는 「여호와의 종」의 실제의 생활에서 다음 두 면으로 표시한다. 즉 하나는 그의 의무적인 절대의 순종이요, 또 다른 한 면은 어떤 험난한 환난 중에라도 주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의 주장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종」은 의무가 있는 동시에 권리가 있다.

셋째로, 「여호와의 종」은 음으로 양으로 항시 「나의 원수」라는 말로 대립시킴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저희(나의 원수)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주의종은즐거워하리이다”(시109:28).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종에게 항시 따르는 고난을 본다. 이 고난의 의식 없이 「여호와의 종」을 이해할 수 없다. 「여호와의 종」은 곧 「수난의 종」(suffering servant)을 의미한다.

넷째로, 「여호와의 종」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 속의 경륜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여호와의 종」은 단순한 충성과 헌신의 범주를 넘어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의 특별한 사명을 갖게 된다. 이 피소의식없이 「여호와의 종」을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여호와의 종」을 알기 위해서는 은총의 언약과 피소, 헌신, 수난 등을 고려함이 필요하다.


2. 선지자로서의 「여호와의 종」


이사야 42:1에서 우리는 벌써 그 『종』의 선지자로서의 풍채를 본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 구절은 그 『종』이 심판을 베푸는 높은 자리에 군림하는 심판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공의」라는 원어(mishabat, ט?שׁמ)는 어떤 재판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죄를 판단한다는 재판적 술어는 따로 「라쏴」(עשׁד)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우리말로 「공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인간의 모든 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참된 종교 또는 교훈을 의미한다(Delitzsch).

우리말로 「공의」라고 번역된 말은 「율법」이라는 말과 대치시킬 수 있는 동의어이다. 이「도라」(율법)란 진정한 교리, 혹은 종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는 말은 결국 이「여호와의 종」이 어떻게 진정한 종교를 이방에 전파할 것을 묘사한 말씀이다.

이 구절은 「여호와의 종」을 어떤 사람들이 이해하듯이 심판자로서의 모습을 보여 줌이 아니라 참된 복음의 전파 자로서 선지자의 풍채를 보여 준다. 그런데 「공의」로 번역된 이 낱말이 첫 번째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부르는 42장 1절에서 9절까지에 3차에 걸쳐 나온다(1절, 3절, 4절). 이 사실은 곧 이 시에 있어서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더욱이 이 「공의」란 말을 “그 교훈”(4절)이란 말과 대립적으로 사용되어 있음을 보아서 이 시는 확실히 그 『종』의 선지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공의를 베푼다”는 말은 두 말없이 설교자의 임무를 표현함에 틀림없다. 이사야 41장 27절의 “기쁜 소식을 전할 자”는 곧 42장 1절의 「여호와의 종」을 지칭함이 분명하다.

“기쁜 소식을 전할 자”란 히브리어(메바샬)는 선지자나 혹은 그와 동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사 40:9, 41:27, 52:7 등등).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종은 무력이나 권세로써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니다. 그의 모든 권세는 그가 가르치신 진리 그 자체였다. 그는 그 진리의 설교자로서 인정받기를 원했을지언정 결코 다른 어떤 권세자로서 인정받기를 원치 않았었다.” 선지자인 「여호와의 종」은 곧 수난자 「여호와의 종」이 었다.

이사야 53:2절에 있어 우리 한국 역에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된 구절이 그들의 번역 탈굼역에는 “그의 모양은 상인의 모양이 아니요 그의 거룩한 얼굴은 그를 보는 자마다 흠모하도다”라고 완전히 반대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고난은 진실로 선지자에게 붙어 있는 뗄 수 없는 기관임은 우리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전기가 아니라도 어디나 선지자의 기록이 있는 그 곳에서는 반드시 찾아 볼 수 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