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인터넷성경

제 14 장. 최고의 법은 사랑 - 사랑의 범위. 사랑의 동기

Joyfule 2007. 9. 13. 00:50

 

6. 사랑의 범위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어느 정도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갈보리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베드로에게 그 형제를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을 때(마18:21-22).그가 뜻하신 것은 진정한 사랑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너무 지나친 것을 요구하셨는가? 그의 요구를 지나치게 높은 수준에 두셨는가?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이상적인 것이어서 이 세상과 같이 거친 경쟁적인 세상에서는 실천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비판이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복음서는 두 가지 답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인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기 위해 존재하며(마19:26,막9:23),또한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지나친 것을 기대하고 계시며 인간이 미치기에는 불가능한 사랑의 한계가 있다는 비난은 욧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복음서는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기독교가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요구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암시하신 적이 없다(마5:2048). 그는 말씀하시기를 기독교의 영광은 그 속에 전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초인간적이고 신적인 내적 충동에 의해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하게 하며 인간적으로 가능케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웰즈]가 말한 것처럼 [진리는 갈릴리 사람 예수가 우리의 좁은 마음에 비해 너무나 위대한 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랑의 법]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마16:24). 예수님께서는 솔직히 사랑의 법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때때로 그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당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여, 제가 제 십자가를 졌나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사랑의 법과 일곱번의 일흔번 용서에 대해 지나친 요구라고 불평할 권리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져야 할 십자가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갈보리를 의미했다.[제자는 그 선생보다 나을 수 없는 법이다](마10:24).

7. 사랑의 동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에 대하여는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요구하신 것을 이루는 일에는 도움을 주셨다.그가 [사랑의 법]을 세우셨을 때 그는 그것과 함께 그에 필요한 동력을 제공하셨다. 복음서에는 세 가지 중요한 동기가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과 사랑스러움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사랑을 일으키신다. 다른 사람의 초라한 외투나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투,이상한 버릇같은 것은 쉽게 눈에띄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사람이 한왕의 아들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셨다. 그는 멸시받는 배교자 세리에 대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9)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선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을 여왕에게나 주어질 법한 위엄과 예의로 대하셨다(눅7:37이하). 또한 [삼가 이 어린 소자들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아라](마18:10)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생각하신 것은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약한 자와 보호받지 못하는 자, 그리고 연약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사랑이 일어나는 때는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든 얼굴들에서 예수님께서 보셨듯이[하나님의 형상같은 것을 보게 될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 사랑을 창조하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께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위해 그 힘을 아낌없이 쓰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갈보리의 수난이 닥쳤을 때 그들은 그가 죽으신 것이 순전히 그들을 사랑하신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아무리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바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여러분은 그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국제평화를 위한 참 동기가 존재한다. 만일 그 자신은 평화를 믿지도 않고,다른 모든 나라들 이전에 그의 조국만을 생각하는 것을 애국심으로 알며 남의 권리를 짓밟게 되더라도 그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음의 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 있어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업을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모여 도덕적으로 벌리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이 사업은 모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지는 명백한 의무이며 그 동기와 추진력은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그의 영으로 충만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창조하셨다.일곱번의 일흔번 용서는 베드로와 같은 성격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발견한 사실은 그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는 이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스스로 동료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방법은 희망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감에 따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도록 하였을 때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저절로 일어났다.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말씀과 단 한자 틀리게 표현하기를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다]라고 했다.

 

이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문제의 핵심이 되는 말이다. 어떤 저명한 독일인이 [괴테]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괴테) 나로 하여금 그의 힘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라고 했다. 당신이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다. 어찌 당신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못하시겠는가?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의 힘으로 사랑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