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예수님과 사회문제
1. 예수님의 태도
이제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회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매우 다른 두가지 견해가 나타났다. 즉 한편에서는 예수님께 사회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고 주장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위대한 사회 개혁자로 받아들여왔다. 먼저 이 두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전자에 의하면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 대상은 사람의 영혼이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어떤 신비적인 경건이었으며 물질적 환경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으로 만족하셨다. 영적인 것 외에는 현세적인 삶의 어떠한 면도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다.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세상에서부터 구원해 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사회악을 바로잡는 일이나 사회적 물의를 개혁하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의 생각은 다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 역사상 전시대를 통해서 이러한 견해는 일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사회적 의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단절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기독교가 종종 개혁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것처럼 외부인들에게 인식되었고 케케 묵은 폐습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것은 전혀 잘못된 견해이다. 복음서를 대충만이라도 훑어 본다면 이 견해가 얼마나 본제도에서 빗나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전파하시면서 나타나셨는데 바로 그 천국사상이 굉장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한 형제임을 강조하는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최초의 추종자들을 모아 진정한 공동생활을 하는 사회적 단체를 만들었다.
산상보훈은 사회적인 교훈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병자를 고치신 이적은 인간들을 영적으로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도우려는 강렬한 소원에서 생겨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결코 무관심한 일이 아니었다(마9:36).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마4:4) 그러나 전혀 먹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중심부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마6:11)라는 기도를 두셨다. 인간의 물질적 결핍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 일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너희 천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마6:32).참으로 인생에 있어서 성속을 구별하려는 경향은 전적으로 복음과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전 부분을 요구하셨다. 그가 정하신 종교는 삶의 모든 구석에 침투하는 종교였다. 전체가 한 성령의 지배 영역아래 들어와야만 했다. 어떠한 사람도 구별하는 선을 그어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는 끝납니다. 여기까지는 예수님의 영역이나 이 이상은 아닙니다. 그 나머지는 당신의 지배영역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와같은 이중적지배는 근본적으로 언제나 불성실한 것을 의미한다고 예수님은 주장하셨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두 개의 진리는 있을 수 없으며, 진리는 다만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전영역에서 왕이 되시든지 아니면 전혀 아무 것도 되지 않든지 해야 한다. 가능한 단 하나의 선택은 예수님의 종교를 삶의 모든 관계에, 단 하나에 이르기까지 작용하든지 아니면 그의 종교를 완전히 내버리든지 양자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제3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 교훈속에 흐르는 전체적인 경향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이다.
따라서 사회문제를 예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주로 사회개혁자로 받아들이는 견해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 구원의 첫 단계가 사회질서 구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외적 상태가 향상된 연후에 성령께서 역사할 기회를 얻게된다고 말한다.
가난과 무지를 추방하면 죄를 제거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던 방법이 아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결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다. 이 일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더우기 예수님께서는 심적 변화 없는 외적 환경의 변화는 무용하다는 것을 아시고 이를 명백히 선언하셨다(마15:19-20). 이러한 연유에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예수께서는 마귀가 제안한 지름길을 거부하셨다(마4:1이하).
먼저 하나님과 바로 되기 전에는 인간이 결코 상호간의 바른 관계에 있을 수 없다. 인간성의 진정한 문제는 너무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사회적인 처방이나 환경의 개선으로는 거기에 미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위대한 개혁자였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먼저 그가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본 두가지 견해 사이 어딘가에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시대와 또한 모든 시대를 위한 사회적 멧세지를 가지고 오셨다. 그러나 그 멧시지의 기초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었다. 세상 환경에 대해 끼친 그의 영향은 그가 종교적인 것이었다. 세상 환경에 대해 끼친 그의 영향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 계시한 것의 결과였다. 그는 사회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만들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는 사람들에게 어느 곳에서나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여 싸울 정신을 나누어 주셨다.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1900년 동안 모든 고상한 사회적 봉사의 추진력이 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정신이 로마의 수치스런 투검경기라는 야만적인 유물을 사라지게 했으며, 또한 노예제도의 뿌리를 도끼로 찍어 넘어뜨렸다. 예수님의 이러한 정신은 [셜트베리]경과 그 외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셔서 19세기의 가공할 공장 작업조건의 실상을 폭로하고 더 좋고 훌륭한 작업 환경으로 개선되게 했다.
또한 그 정신은 헤어날 수 없는 비참과 고통의 비극에 적중하여 도처에 병원과 치료기관이 생겨나게 했다. 말하자면 이 땅에 있는 모든 병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 오셨다. 가장 고상한 사회적 동기는 언제나 이와같은 종교적 근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야말로 그 근원에 가장 충실한 교회이며 복음에 가장 가까운 교회일 뿐 아니라 사회정의를 대담하게 외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를 내세울 때 사회적 선을 위한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빛을 던져주는 중대한 두 가지의 사회적 관계에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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