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예수님과 사회문제
2. 가정 생활
예수님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족제도를 매우 존중히 여기는 민족에 속해 있었다. 유대인들이 가족제도를 존중히 여기게 된대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작용했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라는 확신이었다. 창세기의 서두에는 가정의 기원에 관한 기사가 보존되어 있으며 가족제도가 직접 하나님의 심중에서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창1:26, 2:18).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각 가족은 하나의 종교적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며 깊은 의미에서 유대인 가정의 가장은 그 가정에서 제사장이었다(신16;11).
유대인의 율법은 가정의 순결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활을 했다. 물론 여러가지 면에서 율법이 가정생활을 속박하는 멍에이기도 했지만 당시 세계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도덕적 파멸로부터 유대교를 구한 것은 이 율법의 공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유대인 어머니들은 그녀가 낳은 아들이 메시야일 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들에 대해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해석이었는데 이러한 희망이 가정생활을 건전하고 순결하게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정생활에 더욱 차원이 다른 신성을 부여하셨다. 그는 세가지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생의 대부분을 가족과 더불어 보내졌다. 그에게는 형제 넷과 적어도 여동생 둘이 있었다(마13:55이하). 즉 30년 동안 하나님의 영광은 한 시골 가정에 머무르시는 것으로 만족 하겠다. 이로 인해 모든 가정생활은 영원히 신성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으로 생각하셨다.
이 사실은 그가 가장 깊은 영적 진리를 설명하고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하기 위해 가족관계를 항상 비유로 사용하신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가정생활에서 고귀한 신적 속성의 개념을 끌어 내셨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으시다가 말씀하셨다. 또한 치대의 비유언 탕자 비유는 어떤 가정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눅 15:11이하). 친밀한 가족 관계에서 일어나는 한 아버지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주고 있다.이와같이 인간의 가정이 천국의 축소판으로 묘사되고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여인들과 아이들에 대해 행하신 일로써 가정의 신성함을 깊게 하셨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그의 특정한 교훈에 의해서 판단하기 보다는 그의 전 태도에 의해서 판단해야 한다. 복음서 이야기에 나타나는 여인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의해 예수께서는 여인을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위엄과 존귀로 높이셨다. 유대인의 높은 표준도 여기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결혼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하되 하나님께서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막 10:9).
바울도 예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여 말하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갈3:28). 어린아이들의 지위 역시 예수님의 변화시키는 손길에 접하게 되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그에게로 불러 그들의 가운데 세우셨다(마18:2). 그 후로부터는 어린이가 언제나 가운데 위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혁신적인 태도가 얼마나 굉장한 것이었는가는 최근 발굴되어 빛을 보게된 B.C.1세기의 고대 파피루스 편지 내용이 잘 설명해 준 것이다.
이 편지는 외국에 근무하는 남편이 본국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바로 B.C 1세기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우리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에 있오. 아이를 잘 돌보도록 하시오.그리고 봉급을 받는대로 곧 얼마를 당신에게 보내겠오. 만일 사내아이거든 그냥 두고 계집애이거든 내 버리시오.]이렇게 극도로 냉담했던 세게에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어린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천국이 이런 자(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마10:14).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가정의 신성함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게 하신 반면 어떤 상황에서는 가정의 권리가 2차적인 것으로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을 주의깊게 지적하셨다. 예수님 자신의 생애에서도 나사렛 어린 시절의 가정이 더 이상 그를 붙잡아두지 못하고 그를 붙잡는 손들이 조용히 물리쳐져야 했던 때가 왔었다. 후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찾아와 그와 말하기를 간청했을 때에도 그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마다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고 대답해야만 했다.
또한 그가 택한 제자들에게서도 이와비슷한 부인을 요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 그의 도전이 인간 사회에 초래할 분열상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사람을 그 아비와,딸을 그 어미와, 또한 그 시어머니와 불화케 하기 위함이라](마10:35)고 하셨다. 예수님의 주장을 따르는 자가 되려던 어떤 사람이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그러나 나로 먼저 가서 내 집에 있는 자들과 작별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는 그의 결심이 가족들의 간청에 쉽사리 허물어질 확고하지 못한 결심임을 아셨기 때문에 섬기기를 자청하는 그를 거절하시고 슬픈 마음으로 돌아 서신 일이 있다(눅9:61). 예수님께서는 비록 가정의 권리를 큰 것으로 인정하셨지만 이 권리와 하나님의 권리가 충돌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것을 언제나 서슴치 않고 주장하셨다.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로서 그 길을 헤쳐 나가고 있었을 때, 또한 이로 인해 가정이 분열하고 박해가 심했을 때인 초대교회 시대에서는 오늘날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비기독교 국가에서 그러하듯이 이 명령의 실제적 의미는 분명하고 광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나 기독교인 자신의 생활에서도 예수님의 이 명령은 큰 비중을 갖는다. 덜 중요한 충성이 더 큰 충성과 충돌할 때에는 더 큰 충성이 이기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기독교인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로 인도하신다면,천국을 위해 가정의 의무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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