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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유년기와 소년기 -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환영

Joyfule 2007. 7. 27. 01:54

1.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환영

그리스도가 오실 때가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임하실 때 세게는 처음에 그를 반기지 않는듯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니라](눅2:7). 여관 주인은 그날밤, 피로하게 보이는 두 나그네를 거절해 버렸다. 이것은 그가 세상에서 당할 거절의 예고이기도 했다. 여관 주인의 거절상황을 분석해 보자.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 발표에 이 여관은 만원이 되어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주인에게는 더 없는 행운이었다. 그에게는 조금의 여가도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였다. 이처럼 분주한 사람에게 밤늦게 찾아온 두 나그네의 딱한 사정이 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만일 거절하지 않는 다면 이미 들어있는 다른사람을 내어 보내야만 했다.그들의 차림새가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돈이있는 사람처럼 보였더라면 여관 주인이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탄생하실때 당하신 거절과 같이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기의 바쁜 수입 때문에 예수를 거절하고 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가 오셨다해도 사람들은 다른 일을 위하여 딴 곳으로 가버릴 것이며, 자기들의 문 밖에 초라하게 서 있는 예수를 멸시하고 다른 일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이미 사도 요한이 밝힌 바 있다. [그가 자기 땅에 오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니라](요1:11)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거절만 당하시지는 않았다. 그를 환영할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복음서가 밝혀준다.

 

(1) 그의 모친이 영접했다.

 

성경에는 모성애를 찬양하는 기사가 여러 곳에 있다. 십계명에 어머니에게 행할 이상적인 효도의 기록이나(출20:12),잠언서에 [그 자식들이 일어나서 사례하며](잠31:28) 한 귀절이나 사26:13에 [하나님의 위로는 자식을 위로하는 어머니의 위로와 같다]는 말씀과, 신구약에 기록된 유명한 어머니들,즉 한나,룻,스빔여인,엘리사벳,살로매,유니게 등 여러 어머니들의 행적을 성경은 높이 평가한다. 그 여러 어머니 중에 가장 숭구한 어머니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다.

첫째, 마리아는 경건한 여자였다. 세상의 많은 여자 중에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시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뽑힌 여자다. 어리신 예수께서 맨 처음 기도를 이 마리아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드리셨다.

둘째, 마리아는 고독을 참은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여자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우주적인 사업 계획을 천사로 부터 전달받은 시간부터 이 사실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였던 숭고한 의로움의 경험자였다(눅2:19).예수께서 어린 시절 지내시던 그 집을 자기의 사명 때문에 떠나시는 날도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더할 수 없는 고독의 날이었고, 더우기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 마리아가 서 있었다](요19:25)-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 아닐까?

세째, 마리아의 고귀한 희생 정신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우러러 보게 하낟.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다.[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워지이다](눅1:38).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칼이 그의 마음을 찌름같은 일이 있으리라](눅2:35)고 말할 때에도 마리아는 그에게 주신 하나님 아들의 아름다움과 그 거룩함에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2) 목자들이 그를 환영했다.

 

 

그림 : 목자들의 경배 :별을 따라 찾아온 목자들이 암굴로 된 마굿간에서 막 탄생 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훌륭한 옷과 왼쪽 두 목자들의 옷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91*111cm 미국 내셔널 캘 러리 소장.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려고 목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주님의 환영 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그들의 노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23편)와 같이 목자의 기사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뿐 아니라,예수 자신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했으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하나님의 목자라고 증언했다(요10:11).

 

주의 영광을 가장 먼저 바라본 사람들은 특수층의 사람이 아닌 평범한 베들레헴 목자들이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 영광에 가장 먼저 접했다는 것은 첫째, 자기들의 일에 충실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지키는데서 환상을 본것이며, 둘째 항상 깊이 있는 생활의 내면을 가지고 순진한 태도로 경건을 지키며, 어린 아이의 심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가장 쉽게 열리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덜붙임으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를 새벽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있는 그에게 기적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눅5:8).로렌스 형제(Brother hawrence)는 어느날 시골 길을 홀로 걸어가는 도중 움을 피우는 봄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했고 잔다크는 소년시절 그가 출석하는 시골 교회에서 영을 체험했고,프란시스 톰슨은 런던 거리의 소요 중에서 묵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야곱의 사다리는 하늘과 고민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이에 놓여졌다고 말했다 (창28:12).

 

(3) 박사들이 환영했다.

 

전설에 의하면 박사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아시아인이고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예물을 가지고 아기 예수를 찾아 베들레헴까지 간 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복음은 모험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처럼 그들의 사랑하는 가정을 멀리 떠나[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못하는 길을 걸어 갔다](창12:4,히11:8).

둘째, 복음은 시대와 사상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박사들은 당시의 과학자요 사색가였다.

세째, 복음은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도전한다는 것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시45:12). [구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시68:31). 고 노래한 바와 같이 어둠이 짙은 동양과 아프리카에 사는 각 민족이 자기들이 가진 가장 귀중한 보물들을 바쳤다. 이렇게 하여 박사들은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하는 세 가지 조건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모험을 요구하신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모험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는 사상가를 요구하신다. 이 세례를 받고 예수의 이름 아래 엎드리기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의 공헌을 요구하신다.각국 사람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정신적 이해의 풍성을 바치기를 요구하신다.

 

(4) 시므온과 안나가 환영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눅2:25)고 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위하여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팔레스타인은 종교가 만연된 국가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심령에서 울어나오는 종교심보다는 외부적인 사건을 처리하는 객관적 요소에 의하여 의식으로 지키고 있었다. 서기관들은 종교를 직업화시켜서 그 속에 하나님의 성화는 무미건조한 교회주의 (교권주의)로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타오르지 않고 세속 속으로 종교를 끌어 들이고 있었다.그들은 회의적이고 기회적이었다.

다음 세롯당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교를 민족주의에 토착시킨 사람들이다. 로마 정부에 항거하고 유대국을 회복하자는 야망에 집착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의 심령을 집착시킬 수 있는 정당은 못되었다.

이스라엘의 참된 애국자들은 겸손하고, 조용하고 경건한 사람들로서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과는 단 5분의 대화도 빈번하게 생각했으며, 지혜로운 랍비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자로 보였고, 열광적이고 떠들기를 좋아하는 세롯당을 충고할 기회조차 없었던 무명의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 가령 기도라든지,하나님 앞에서 갖추어야 할 마음의 청결같은 일에 대하여서는 전술한 모든 종교가들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앞서가는 사람들이었다.시므온과 그 동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의 누룩이 되었으며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 왔을때 시므온은 예수를 품에 안고 축복해 주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 시골 여인이 안고 온 아기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시므온만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보는 영적 식별력과 예수를 알아보는 영안이 있었다. 그가 예수를 품에 안고 환영하는 광경을 주의해 보라.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새 시대를 받아들일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낡은 시대의 풍속을 고집한다. 해도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마음은 열려 있었으며 하나님의 지선이 그에게 임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새 시대의 상승인 아기 예수를 마음껏 축복해 주었다. 마치 황혼이 깃드는 석양에 피로한 노동자가 종업을 고하는 종소리를 들은듯,또는 여명을 보고 기뻐하듯이,시므온은 그 아기를 말미암아 찾아온 새 시대에 대한 기쁨을 노래한다. [주재여 이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눅 2:29). 하나님은 이렇게 육신을 입으셨다. 그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부서진 세계를 수선하는 하나님의 사업은 서장을 올렸다. [아기가 자라며 강건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