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이(John Ray, 1627~1705) - ‘종’의 개념을 명확하게 한 박물학의 아버지
생물학의 창시자이며 독실한 기독교인 (1627-1705)
Ann Lamont
대구지부 월간소식지 창조 제40호
존 레이(John Ray, 1627-1705)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이 태어난 해,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죽은 해인 1627 년에 태어났다. 보일은 현대 화학의 창시자이며, 베이컨은 실험과 이성적인 논의(rational argument)를 결합한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시작한 사람이다. 크로우더(J. G. Crowther)는 그의 책 ‘영국 과학의 설립자들(The Founders of British Science)’에서, 이들 세 명의 헌신적인 기독교인의 업적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대의 보편 과학(universal science)을 창조하는 첫 번째 단계는 자연의 내용물(contents of nature)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베이컨이며, 화학에서 그것을 시작한 사람은 보일이다. 생물학에서는 존 레이가 상당한 업적을 수행했다.”[1]
존 레이는 1690년에 출간된 영국의 식물에 관한 그의 책 서문에서, 고대 그리스 사고의 잔존물이었던 (실제 세계에서의 시작점 없이) 논리적인 논의만 주장하던 이전의 철학 대신에, 실험과 논리를 결합시킨 베이컨의 개념으로 대치된 시대에 그가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초반의 삶
존 레이는 1627년 11월 29일에, 영국 에섹스(Essex)에 있는 블랙 노틀리(Black Notley)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을 대장장이의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풀을 모아서 약용으로 사용했으며, 그 지역에서는 그녀 자신의 치료용과 아픈 사람들을 위한 연민으로 그것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식물에 대한 존의 흥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풀을 채집할 때인 초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존은 그의 고향 마을에서 약간의 기초 교육을 받았다. 지역의 교구목사는 그가 학문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브레인트리(Braintree) 근처의 중등학교(grammar school)에 다니도록 주선했다. 또 다시 그의 잠재력이 인정되어 16살에 캠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갔다.
대부분 부유한 신사의 자제였던 캠브리지 학생들과는 달리, 존 레이는 가난했으며 필요경비를 지불할 수 없었다. 그 후의 아이작 뉴턴과 마찬가지로, 레이는 트리니티 대학 교직원의 하인으로 활동함으로써 수업료를 면제받았다. 그는 1651년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트리니티 대학의 강사로 남았다.
기독교 신앙
레이는 기독교 신앙에 깊게 헌신되어 있었으며, 온유하고 감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기 학생들의 생각이 물질주의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려지기를 원했다. 크로우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이는 학생들에게 게임이나 유흥에 전념하지 말고, 그가 자연의 절묘한 작업에서 예시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묵상함으로써 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을 제안했다.”[2]
비록 대학에서 식물학과 동물학이 아직 학과목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었지만, 레이는 그의 학생들이 그들의 개인 시간에 그 지역의 식물상(相)과 동물상을 조사하는 데에 그와 함께 참여할 것을 권했다. 레이는 식물학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인 ‘캠브리지 부근의 식물에 관한 목록(a catalogue of the plants around Cambridge)’을 1660년에 출판했다.
레이는 항상 안수 받은 목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국가가 교회의 문제에 상당히 간섭하는 시대에 살았다. 왕정주의자들이 권력을 되찾았을 때, 그들은 교회의 최종 예배의식을 다시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이는 '외적인 수행에 많은 의존을 하는 종교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내부의 영적인 제도(institution)와 양심의 정화(refinement)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3] 레이는 그의 믿음을 타협하려고 하지 않아서 1662년에 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이제 레이는 자기 자신과 과부가 된 어머니를 부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레이의 이전 학생이었으며, 부자였던 프란시스 윌러비(Francis Willughby, 1635-1672)가 자신의 경비로 과학적인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레이의 면직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어서, 그의 위대한 업적인 생물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로마서 8:28절과 같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과학에 대한 레이의 기여
10년 동안 레이와 윌러비는 영국의 섬들과 그 밖의 유럽을 돌며, 관찰하고 시료들을 수집했다. 윌러비는 동물들에 초점을 맞춘 반면, 레이는 식물들에 집중했다. 그들의 목적은 살아있는 생물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그것들을 한정된 숫자의 강(綱, class)으로 분류하는 것이었다.
1670년에 레이는 영국 섬의 식물 목록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식물의 약용에 대한 긴 절을 담고 있었는데, 거기서 점성술, 연금술 및 마법을 고발하고 있었으며, 증거를 요구하는 데 있어서 냉혹하였다.”[4]
그때까지의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서 레이는 영국의 이름난 위대한 과학자 그룹인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후에 왕립학회의 회장(secretary)이 되어달라고 요청 받았을 때, 레이는 생물학에 관한 그의 연구에 전념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윌러비는 1672년에 죽었지만, 윌러비의 뜻에 따라 이 목적을 위해 풍부하게 제공된 기금을 가지고 레이는 그들의 위대한 과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레이는 자기 자신의 과업을 진행할 뿐 아니라, 윌러비가 동물에 관해서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들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해석하는 업무도 수행했다. 레이는 1676년에 새(birds)에 관한 책을 출판했고, 1685년에 물고기(fish)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새에 관한 그의 책은 ‘과학적인 조류학의 기초를 놓았다.’[4]
그리고 나서 레이는 유럽과 그 외 지역의 식물에 대한 기록과 분류를 수행하여, 식물왕국에 대한 일반적인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떡잎이 두 개냐 아니면 하나밖에 없느냐에 따라 꽃을 피는 식물을 분류했다. ‘이것은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로 구별한 것으로 이후의 모든 식물학자들이 채택한 구분이다.’[4]
종(species)을 의미하는 것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한 사람이 레이였다. 린네(Linnaeus, 또 다른 헌신된 기독교인)는 레이에 뒤이어 종을 그의 분류체계의 기본원칙으로 사용했는데, 관련된 종들을 모아서 속(genera)으로, 관련된 속들을 모아서 더 높은 범주 등등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레이의 식물에 관한 일반적인 목록이 ‘린네가 현대의 형태로 도입한 체계적인 분류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5]
파충류(reptiles)와 포유류(mammals)에 관한 그의 1693년의 책에서 레이는 이빨과 발굽과 발가락에 따라 동물들을 분류했다. 동물에 대한 이와 같은 논리적인 분류는 이전의 체계에 대한 대단한 개선이었다.
레이의 통찰력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의 시대를 앞서갔다. 아시모프(Asimov)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화석이란 멸종된 생물체의 석화된 잔존물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100년 이후까지 생물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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