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의 신앙과 민족 정신
이승훈 (1864.3.25.음력 2.18 ~ 1930. 5.9)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계몽운동가, 교육자이다.그는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하였다. 빈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으며 10여 년 동안 유기행상과 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이승훈은 뛰어난 경영가로서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여 근로자들의 생산능률은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 전쟁의 발발로 파산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과 고종 강제 퇴위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이승훈은 40대의 나이에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교육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한평생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 봉사했다.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워서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0년 장로교 신자가 되었으며,1916년 장로로 선출 될 정도로 성실한 신자가 되었다.
오산학교는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이 지역 민족주의 교육의 두 축이 되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흐름들은 일본의 경계를 샀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신민회 인사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용산을 출발하던 경의선 열차에 탑승할 때 변장을 하고 여행하였으나, 동료 김구, 양기탁, 이동휘 등 동료 신민회 회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하차당하는 것을 보고, 신문을 보던 그는 창밖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창밖을 보며 눈물 흘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총독부의 일본 경찰은 변복하고 신문을 읽던 장년 남성이 이승훈임을 알아보고 바로 체포했다. 105인 사건이 적발될 당시 그는 이미 이전의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서울에서 검거되자 법원으로 압송,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불교,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도 교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탄압을 면하지 못했으나,조만식, 유승모,박우병,장지영,백봉제,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1922년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분신처럼 생각했던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학교를 운영하며 실력양성론을 주창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만식을 영입해서 교사로 삼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에게 학교의 경영권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 당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의 오산학교에서는 류영모, 함석헌 등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1930년 사망하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위키백과)
*이승훈의 관서자문론
을사 늑약 이후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 우리 나라의 부자들이 많은 관서 지방(평안도와 황해도)의 부자들이 힘을 합쳐 민족 기업을 육성하자는 경제론이다.이태리 상사와 직거래를 통해 민족 기업과 민족 자본을 형성하여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교육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려는 이러한 민족 경제론은 그가 무관학교사건,105인사건으로 인해 체포되면서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1910년대 윤성운·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선천·박천·정주 등지의 토착자본을 끌어들여 근대적 산업자본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상촌 운동(용동촌)
이승훈이 사재를 털어 토지를 매입해 벌린 모범 농촌 건설 운동이다. 평북 정주구군 갈산면 익성동에 학교와 교회와 병원을 짓고 악한 페습(미신,투전,주색등)을 금지하고 근면한 생활과 신앙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승훈의 이상촌 건설 운동은 당시 신민회 사람들을 중심으로 벌어진 농촌 부흥 운동의 하나로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추진된 농촌진흥운동이나 사회주의 계열의 브나로드 운동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오산의 중심 마을 용동의 풍경은 아름다웠다.마을 동쪽에는 비스듬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 위에 교회당이 우뚝 서있었다.이 교회는 1910년 10월 이승훈이 건립한 것이다.요동 마을 주민들은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이 교회에 나갔다.거기에는 이승훈의 강력한 권유가 큰 역할을 하였다.마을의 장로인 그는 자신의 사유지 일부를 떼어서 마을의 공유지로 기증하기도 하였다.오산 출신 교육학자 김기석(1925-1974)은 이승훈이 주민 상호 간의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그렇게 조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요컨대 1910년의 오산은 조선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였다.그곳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승훈의 영향 아래 학교와 교회를 중심점으로 한 지역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오산에 사는 주민들은 남강을 우리 선생이라 부르고 학교를 우리 학교라고 불렀으며 학생들을 우리 학생이라 불렀다.그들은 집에 학생들을 기숙시켰는데 학교의 정신과 방침에 따라 부형으로 학생들을 보살펴 준다는 생각이었고 학생들을 두고 그들에게서 대가를 받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학생들은 옆집 어린이들을 목말 태우거나 손목을 잡고 다녔고 목욕탕에서는 아저씨와 노인들의 등을 밀어 드렸다.오산을 다녔던 학생들이나 거기 살던 사람들은 아직도 북쪽 제석산 밑에서 벌어졌던 이 아름다운 이상향을 잊지 못한다(교육자 김기석의 회고)“
(초기 기독교 학교에서의 지역 사회와 학교와의 관계-평북 정주 오산 학교를 중심으로 백승종의 논문에서 발췌 요약한 것임)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해서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시킨 것이다”
1930년5월3일 오산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에게 한 마지막 연설의 일부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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