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독실한 기독교인 이승만 대통령

Joyfule 2018. 7. 28. 23:04

 

독실한 기독교인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와 그의 필생의 목표였던 대한민국 건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무엇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대통령의 염원은 미국과 같은 기독교국가를 세우는 것이었기 대문이다.

이승만 대통령는 1875년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났고 과거급제를 목표로 어릴 때부터 친지가 운영하는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열심히 닦았다. 이 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총명함이 돋보여 각 서당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13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이 때 아명인 승룡을 승만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인해 과거제가 폐지되자 이승만 박사는 잠시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 때 서당 친구인 신흥우 형제가 이승만 박사에게 배재학당에 다닐 것을 여러 차례 권유하게 되고 이승만 박사는 영어를 배울 생각으로 배재학당에 나가게 되었다. 이 때가 1895년 이었다.

처음에는 영어를 배울 욕심으로 배재학당에 나가기 시작하였으나 그는 그곳에서 영어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자유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마침 그 때 귀국하여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가르치던 서재필 박사의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고 이어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으로서 또는 주필로서 정치적 자유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이미 젊은 나이에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묘한 방법으로 이승만 박사를 기독교로 개종하게 만든다. 이승만 박사는 1899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혁명에 가담하게 되어 투옥되게 된다. 그 때 이승만 박사는 17명의 죄수 중에서 유일하게 위험한 사람이라고 고종에게 보고된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에 대한 고문은 혹독하였다. 고문을 받고 지친 몸으로 감방에 다시 갇히면 큰 칼을 목에 걸고 손과 발도 묶인 상태로 밤을 세워야 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자신이 여지없이 사형당할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이때 진실로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이 때 이승만 박사는 하나님을 믿게 된다.

이승만 박사는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정부가 독립협회를 폐지하고, 나를 고문한 후 나무칼로 족쇄를 채우고 어두운 감옥 속에 가두었을 때 나는 두려워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 있게 될 것이다’. 그 때 나는 그들의 말하던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말인데, 그 말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자 마자 나는 나의 목에 걸려 있던 나무칼에 머리를 숙이고 ‘오오, 하나님, 나의 나라와 나의 영혼을 구하여 주시옵소서’하며 기도하였다.”

이승만 박사가 하나님을 믿기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가 바로“1천9백여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밖혀 죽음으로써 우리들의 죄가 없어진다는 교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이승만 박사는 일생 독실한 기독교 인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결합되어 평생을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독립시키기 위해 헌신하게 된다. 이 심정을 이승만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대중이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기독교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법에 의해서 그들 통치자의 독재로부터 보호되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젊은이의 마음 속에 어떠한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청원하러 간 1905년 워싱턴의 한국 영사였던 김윤정을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나는 한국사람에게 기독교교육을 배풀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사는 한국이 독립을 상실하게 된 것도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한 기회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기쁩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왜나하면 지금 한국은 기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여러분들의 기회입니다. … 만일 한국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만이 참다운 구원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입니다. … 지금 10만이 넘는 한국 크리스찬들이 진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의 아름답고 자그마한 나라가 20년 내에 완전한 기독교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일찌기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의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자기 자신 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처럼 동등한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이 때 이승만 박사는 자신이 출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또한 이승만 박사는 일본에 의한 기독교인 탄압을 고발한 <한국교회핍박>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이렇듯 굉장히 진취된 교회는 실로 고금에 희한한 바이로다. 각국 교회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같이 특별히 택하여 동양에 처음 예수교 나라를 만들어 가지고 아세아주에 예수교 문명을 발전시킬 책임을 맡기심이라.”이승만 박사께서는 하나님이 한국을 택하셔서 동양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자 역사하고 계심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현재 동양에서 한국만큼 기독교가 흥한 나라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승만 박사는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대표자 대회(First Korean Congress)를 열었을 때 참석한 다른 몇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로 결의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되고 건국의 기회를 맞았을 때 이승만 박사는 그 때의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최초의 국회가 개원되었을 때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부터 시작한 것이라든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례로 정한 것 그리고 군에 군목 제도를 설치한 것 등 기독교 정신에 맞게 국가의 기초를 닦아나갔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양반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인물에 속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감옥에서 무려 30여명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습니다. 그 때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들이 한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게 됩니다.

이승만 박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 누군가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물었습니다. 여사께서 이승만 박사를 생각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프란체스카 여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승만 박사가 차가운 마루 바닥에 무릅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매일 밤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게 침대에 누워 성경 한 절을 읽고서야 잠을 청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은 단순한 독립운동가나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지금 이승만 대통령은 두 곳으로 부터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승만 박사 때문에 한반도를 적화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승만 박사를 원수로 여기는 북한의 공산집단과 이를 추종하는 한국의 친북좌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승만 박사를 폄하하여야 자신들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4.19세대와 5.16세력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좌우에서 협공당하여 지금 그 존재조차 잊혀지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이승만 대통령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승만기념사업회와 우남이승만연구회가 매달 정동교회의 아펜젤러 기념관에서 이승만 클로퀴움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