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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영' 가장 큰 기만

Joyfule 2006. 8. 17. 01:26

 
'종교의 영' (마지막시대에 악을 정복하는 법 중...'릭조이너')
가장 큰 기만 
종교의 영의 가장 기만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주님을 향한 열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열정은 다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열정의 이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2에서 유대 형제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셨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로마서10:2 
지구 상에 아무도 바리새인 만큼 기도를 많이 하거나, 금식을 많이 하거나, 
성경을 많이 읽거나, 메시아가 오신다는 희망을 품었거나,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었던 자들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주님과 메시야를 가장 대적한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면서, 젊은 사울(바울)은 주님에 대한 열심히 그렇게 했다. 
주님을 향한 열심은 오늘날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대부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한 행위 안에 구속되어 있는 실정이다. 
주님은 라오디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명하셨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3:19 
진정으로 열심히 하는 자들을 저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들을 막는 사단의 전략은 지나치도록 밀어 부치는 것이다. 
처음 단계가 자신들의 열심 안에서 영광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성품이나 은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만약 사단이 그것들을 자랑하게 만들면, 
우리는 그의 덫에 걸려 악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지상을 거니시는 동안 귀신을 다루는데 문제가 없으셨다. 
그들은 금방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비를 구걸했다. 
즉각적으로 주님의 가장 큰 대적이 된 것은 
보수적이고 열심이었던 종교 집단이었다. 
주님의 말씀에 가장 열심이었던 자들이 주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그들 사이를 걸으셨을 때 말씀 그 자체인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컬트와 거짓 종교를 합친 것보다도 교회에 종교의 영이 침투하여 
대적하면서 주님의 운행하심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컬트와 종교의 영은 쉽게 분별이 되지만 종교의 영은 진보를 꾀하는 
모든 영적 각성 운동과 움직임을 왜곡하고 방해하면서도 
여전히 대부분의 현존하는 교회에서 존귀의 보좌를 차지하고 있다. 
주님의 성전에 앉아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일컫을 때 종교의 영은 드러난다. 
(살후2:4). 
주님의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한 건물을 말하지도 않는다. 
죄인인 인간이 교회에 보좌를 차지한다면 불행하게도 
그것을 허용한 것은 바로 교회다. 


두가지 기초 
대부분의 사단의 영적 요새와 같이, 종교의 영은 교만과 두려움이라는 
두가지 기본적인 기초 위에 자신의 일을 세운다. 
종교의 영은 십자가를 통해 인정을 받기보다는,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그분을 섬기도록 한다. 
그러므로, 종교의 영은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화목제로 오신 예수님보다는 
개인의 경건 훈련에 기초를 둔다. 
동기는 교만이나 두려운 아니면 이 둘의 혼합이다. 
교만과 두려움은 타락의 가장 근본적인 결과로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보통 오랜 과정이 필요하기에, 주님께서도 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고 하셨다 (계2:20-21). 
성경에 나오는 이세벨은 아합왕의 부인으로 
상당히 종교적이었던 여인이었지만 거짓 종교에 빠졌다. 
주님이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이유는 이 악한 영의 뿌리가 
상당히 깊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하고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이 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그녀를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셨다.(계20을보라) 우
리는 종교의 영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인내할 수는 있지만 
기다리는 동안 우리 안에 들어와 그들의 사역을 하도록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영과 신속히 대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적의 
어떠한 공격보다도 교회나 사역이나 가정과 삶에 막대한 손실을 입힐 것이다. 
죄의식의 기초 
선지자 사무엘을 양육했던 대제사장 엘리는 죄의식을 바탕으로 한 
종교의 영 안에서 사역했던 인물이다.
주님을 향해 상당한 열심을 내었던 그는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의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는 평생을 대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겼지만, 사무엘에게 임한 
최초의 예언은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책망으로 엘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재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사무엘상 3:13-14 
주님을 향한 엘리 대제사장의 열심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무책임함을 
보상하기 위해 예물과 제물을 바치게 했다. 
죄의식이 우리를 부추겨 주님을 향한 열심을 품게 하고, 
예물과 재물도 우리의 실패를 속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한 열심을 주님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 영원히 제물을 드린다 하더라도.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결코 엘리 제사장의 죄악은 
속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은 엘리 대제사장이 예물과 제물로 죄를 용서 받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향해 열심을 내지만, 그들은 죄나 실패나 아니면 
그들 삶 속에 다른 분야에서 실수한 무책임을 용서 받기 위한 의도가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제물로도 우리의 가장 조그만 실수조차 속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 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이다. 
십자가만이 죄를 위해 아버지가 받으시는 제물이다. 
우리 자신의 희생을 통해 주님의 인정을 얻으려고 할 때, 
종교의 영에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러한 봉사가 주님의 보혈을 기초로 하지 않고,
 죄를 위해 우리 스스로 속함을 받으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동기가 순수하게 주님의 기쁨 그 자체가 되어야지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장 파괴적인 자기 중심주의로 십자가를 교묘히 피하게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엘리의 아들들이 범한 죄 중에 하나는 
“...주님의 제사를 멸시한...” (삼상 2:17)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주님께 바친 제물과 예물을 착복했다. 
종교의 영에 빠진 자들은 흔히 십자가를 전하는데 열심이지만, 살짝 왜곡한다. 
주님의 십자가보다는 자신들의 십자가를 강조한다. 
그들의 진정한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는데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주님께 갈 수 있게 해준다. 
교만의 기초 
이상주의는 가장 기만적이고 파괴적이며 종교의 영이 쓰고 있는 가면이다. 
이상주의는 인간부터 나온 것으로 인본주의의 한 형태이다. 
얼핏 보기에는 가장 높은 기준과 주님의 영광을 보존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주의는 참 계시와 참 은총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적이다. 
치명적인 이유는 은혜와 지혜 안으로 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영광을 구하지만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자들의 
기초를 공격해서 부수어버린다. 
이상주의는 주님이 요청하신 것 이상의 기준과 
그 당시에 허락하신 은혜를 넘도록 다른 사람에게 짐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영에게 조정을 받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처럼 
하루 2시간 기도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 
진리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것이 주님의 뜻이며 
거기에 어떻게 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주님의 은혜로 처음에 우리는 하루 십분 기도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주님의 임재안에서 은혜를 받게 되면, 
10분 기도하고 그만 두는 대신 1시간 이나 2시간 이상을 기도할 때까지 
주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하루에 2시간 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교만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의 영이 붙잡힌 자는 대개가 완벽한 교회를 
찾아 다니고 거기에 못 미치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한다.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교회에 희망을 품고, 
낮은 일에 조차도 자신을 내어 그들의 일이 비전과 성숙 안에서 
성장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한다. 
성령은 “보혜사”라고 불리신다. (요14:26) 
그리고 진정으로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혼자 떨어져 비난하지 않고 언제나 돕는 길을 찾으려 한다. 
종교의 영이 교만에 기초를 둘 때, 완벽주의로 나타난다. 
완벽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흑백으로 본다. 
이것은 극단으로 발전하여 모든 사람과 가르침을 
100% 옳거나 100% 틀린 것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이러한 기준은 오직 예수님만 충족시킬 수 있다. 
그것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할 때는 심각한 미혹거리가 된다. 
참 은혜는 진리도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면서 그들에게 적에게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을 보이고, 높은 영적 성숙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어 준다. 
종교의 영을 가진 자는 상당히 정확하게 문제들을 지적할 수 있지만 
거의가 대책이 없고, 세워진 것을 부수어 버린다. 
이것이 진행 중인 진보를 백지화 시키고 미래의 진보를 제한 시키는 
낙담을 심으려는 사단의 전략이다. 
만약 우리가 산 정상에 올라 갈 수 없다면 
‘그냥 죽자’라는 정신 자세를 갖게 만든다. 
그러한 죽음은 주님이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매일 십자가를 지라는 권면을 왜곡한 것이다. 
완벽주의자는 참 성숙과 성장을 질식시키는 기준을 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 간다. 
주님은 은혜를 한걸음씩 산으로 오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은 정상에 오르는 동안 몇 번을 다시 시작해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은혜를 주시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시며 세워주신다. 
우리는 정상에 오르고 말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계속 올라가고 있는 한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고 자신을 정죄해서는 안된다. 
야고보 장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약3:2)라고 하셨다. 
만약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완벽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면, 
아무도 사역할만한 자격이 없다. 
완벽한 순종과 이해가 우리의 목표라고 해도, 그러한 것은 우리 안에서는 
찾을 수도 없고, 완벽한 그분 안에 온전하게 거하게 될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고전13:12) 
또한 부분적으로 알기에 믿음과 가르침에 있어 
좀 더 정확한 것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가장 큰 미혹은 우리가 이미 완전히 이해하고, 
인식이나 행동에 있어 100%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교의 영을 가진 자들은 스스로가 더 많이 이해하는데 열려 있다고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다른 사람에게 단단히 닫혀 있으면서 
자신들의 가르침에 다른 사람의 마음이 열리도록 설득한다.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부르면서 베드로를 꾸짖기 바로 전에 그를 축복하시고 
천국의 열쇠를 넘겨 주셨다. (마16:23을 보라)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직후, 사단은 베드로를 속였지만 
주님은 그에게 열쇠를 다시 가져오지 않으셨다! 
사실상 주님은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실 때 곧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다. 
베드로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위해 믿음의 열쇠를 사용한 몇 년 뒤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인 바울이 베드로를 위선자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고전15:9, 갈2:11-14보라) 
그렇다고 해도 베드로는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았다. (마19:28) 
완벽한 인간이 되기 전에 주님은 임무를 주시고 사용하시며, 
우리를 부르실 때는 이미 우리가 저지를 실수를 알고 계신다. 
주님의 지도 방식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실수할 여지를 주시고 
거기에서 배우게 하시는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이 어린데도 완벽하게 성숙하기를 요구한다면, 
그들의 성장과 성숙을 억누르는 것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잘못을 고쳐야 한다. 
잘못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격려하고 자유하게 하는 책망이 되어야지 
정죄하거나 의지를 꺽어 버리는 것이 돼서는 안된다. 
치명적인 혼합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종교의 영의 형태는 두려움과 교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속박되어 있는 자들은 상당기간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깊은 고뇌와 후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 회개는 곧 더욱 자신을 일부러 낮추어 
주님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드리도록 이끈다. 
그런 다음 이러한 종교의 영에 잡혀 있는 자들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자신들이야말로 다른 그리스도 교인들과 다른 집단 보다 우월하도록 확신하고는 
비판을 받아 들일수도,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게 변한다.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초는 언제라도 참 확신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한 종교의 영은 너무나 교묘하기에 어떠한 공격도 잘 해 간다. 
당신이 교만을 지적하면, 두려움과 불안정함이 올라와 동정심을 유발한다. 
교만을 대적하면, 곧 믿음으로 가장한 종교적 교만으로 금방 바뀐다. 
이런 종류의 악한 영은 개개인과 회중을 극단으로 몰고가 붕괴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