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대언자가 받는 시험
에스겔 37장을 보면, 주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뼈들이 살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런 다음 주님은 그에게 “모든 뼈에게 대언”하라고 명하신다.
그가 대언하자, 뼈들이 들어 맞으면서 생기가 들어가 마침내 큰 군대가 된다.
그것은 모든 참 사역자들이 통과 해야 할 중요한 시험이다.
참 선지자는 가장 마른 뼈 속에서도 큰 군대를 볼 수 있다.
그는 그 뼈들에게 생명이 들어가고 군대가 될 때까지 그것들에게 대언할 수 있다.
종교의 영을 가진 거짓 선지자는 뼈들에게 얼마나 말랐는지
말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그들 위에 낙담과 정죄만을 쌓으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생명을 대언하지 못한다.
제자들과 선지자들에게는 세우고 무너뜨릴 수 있는 권위가 주어졌지만,
우리가 먼저 세우지 않았다면 무너뜨릴 권리가 없다.
우리는 어떠한 누구에게도 먼저 영적으로 양육하고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권위를 주어서는 안된다.
누구에게라도 책망하는 권위를 주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방침 때문에 선지자들의 사역이
모두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소위 사람들을 세우려는 마음이 없는 선지자들은
사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다 선지자는 그들은 원망하는 자들이며 불만을 토하는 자들로
“애찬의 암초”라고 말씀하셨다. (유다서 12:16을 보라)
더군다나 엘리 제사장의 비극적인 예를 볼 때,
양을 먹이고 돌보면서 시정해주지 않았다면 목자들에게는 주님의 화가 있다.
요한계시록 13:11에서, 두 번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본다.
그것은 가인의 영적인 씨가 땅을 경작하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땅에 속한 마음이(earthly-mindness)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가장 사악한 짐승을 만들어낸다.
가인은 또한 자신의 수고로부터 주님께 제물을 드리려 했다.
주님은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피의 제물을 받으셨다.
우리의 노동의 열매를 결코 주님이 제물로 받지 않으신다.
처음부터 주님은 어린양의 피만을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책망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대신, 가인은 아우를 질투하여 죽였다.
자신의 일로 사는 사람들은 흔히 어린양의 의 위에 서있는 자들에게 분노한다.
그것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분노한 정확한 이유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일생동안 이루어 놓은 일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성취한 일에 기초를 두는 종교는 쉽게 폭력적이 된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일이라는 교리로 바꾸어 버린 크리스챤 종파도 포함된다.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5:21-22).
종교의 영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취할 뿐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사람들을 파괴한다.
교회나 사역에 쏟아 부어지는 여러 가지 중상모략은 가인에게
아우를 살해한 같은 종교의 영이 조종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은 대개가 양과 진리와 주님의 교회를 보호한다는 가면을 쓰고 오지만,
그것은 사악한 비판의 영으로 언제나 분열과 파괴를 초래하는 것을 끝을 맺는다.
비판은 보기에는 지혜 같지만,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교만이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 사실상 그들보다 우리 자신이 낫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남보다 잘 할 수 있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주님의 참 은혜를 깨닫는 믿는 자들은 결코 남을 멸시하는 방법을 찾지 않고
그들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오래된 속담이 있다.
“어떤 당나귀라도 한발로 헛간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다시 세우려면 노련한 목수가 필요하다.”
종교의 영과 살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지식으로 살기를 선택했을 때, 그들은 종교의 영을 먹었다.
그 첫 결과가 자기 중심주의다. 그들은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열매를 먹은 후 태어난 그들의 첫째아이가 가인이다.
그는 종교의 영의 통제를 받은 인간의 성경적 모델이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 (창4:2)로 세상의 마음을 가진 자였다.
(영어성경 (NKJV) 는 땅을 경작하는 자로 나와 있음-역주).
종교의 영은 계속해서 우리가 천국의 영역보다는 지상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이러한 가인의 씨는 보이는 것에 의해 판단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저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는”
(히 11:27)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님의 참 은혜는 불의한 흠잡기와 정화되지 않은 자비의
(주님이 정죄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일) 양극단 사이에서 발견된다.
어느 쪽이든지 종교의 영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