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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 신상래 목사

Joyfule 2014. 8. 3. 01:46

 

 

  죄악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 신상래 목사

 

 

기도를 하고 있지만 돈을 사랑하는 탐욕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 술과 음란의 쾌락을 즐기며 여전히 방탕한 삶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도 있다. 불법과 불의를 마다하지 않으며 뇌물과 접대를 일삼으며 사업하는 이들도 있다. 정직하지 못하고 남을 속이는 방법도 거절하지 않는다. 툭하면 화를 내고 이기적이고 난폭한 성품을 드러내며 심지어는 가족에게 언어폭력과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교회에 오면 거룩한 모습을 보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여전히 죄의 얼룩을 지우려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이들이 기도할 지라도 하나님을 외면하실 것이며, 기도가 막혀있어 기도하려고 애써도 힘만 들뿐 기쁨과 평안함이 내주하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이의 원인은 악한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많은 크리스천 사업가와 자영업자들은 정직하게 돈을 벌기보다, 할 수 있다면 탈법을 마다하지 않으며 고객과 소비자를 속이는 일도 거부하지 않는다. 세금을 줄여내려고 가짜 영수증을 첨부하고 회계장부를 조작한다. 이들이 많은 십일조와 헌금을 교회에 드린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헌금은 하늘나라에 쌓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이기적이고 차가운 성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절대 양보하는 법이 없으며 남을 위해 배려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이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없다. 그렇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는 귀가 없기에 형식적이고 희생적인 기도에만 열을 올린다. 성실한 십일조를 강조하고 헌금을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드린 돈의 수백 배로 돌려주신다는 말씀은 거짓이다. 하나님은 돈의 액수보다 헌금을 드리는 마음의 동기나 목적을 날카롭게 살펴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탐욕을 싫어하시며 사랑이 식어진 마음을 가증하게 여기신다. 그렇기에 이들의 기도는 하늘나라에 도달하지 않고 허공에서 사라질 뿐이다.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하나님은 악한 행위를 근절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잘못을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목적이 부유해지고 성공하며, 하는 일마다 잘 되고 형통하고자 원하는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을 성경적인 신앙으로 호도하는 악한 교회 지도자들의 선전에 넘어간 탓이겠지만 그들의 잘못으로만 돌려서도 안 된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세상풍조에서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 자신의 과오가 더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평안하고 형통한 삶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은 맞지만 부자가 되고 성공하게 해주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에 있지, 자신의 탐욕을 채워주고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채우는 데 있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도구로 삼고심어 하는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다.

   잠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당신의 자녀도 거룩하기를 원하신다.(벧전1:16) 거룩한 성품은 여러 가지지만 특히 사랑과 불쌍히 여김, 정직, 온유, 친절, 겸손 등은 하나님이 최상으로 여기는 목록이다. 우리는 교회의 설교에서 예배나 십일조, 봉사, 전도 등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열심히 한다면 기도하는 것마다 금방 응답이 올 것처럼 듣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희생적인 신앙행위는 신앙의 껍데기 일 뿐이다. 껍데기 안에 알맹이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알맹이를 이루는 주된 요소가 바로 거룩한 성품이다. 사실 껍데기가 조금 부실해도 알맹이가 충실하다면 문제가 없다.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품을 유지하고 있다면 응답이 빠르게 올 것이다. 기도응답은 희생적으로 기도하는 강도(强度)나 빈도(頻度)에 있지 않다.

 

믿음이 부족하다.

기도응답이 오는 비결은 믿음에 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 주거나 질병을 치유한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놓았다. 바위 같은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민족이 개로 비유되는 치욕을 참으면서도 요청을 굽히지 않아 끝내 딸에게 들어간 귀신을 쫒아낼 수 있었다.

또 다른 이방인인 백부장은 종의 질병을 치유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말로만 명령해도 순종할 것이라고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백성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는 놀라운 칭찬을 들었다.

 

그 반면에 귀신 들린 아들을 쫒아 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을 들은 제자들은 열심히 기도했지만 귀신은 꿈쩍하지 않았다. 나중에 조용히 찾아와 계면쩍은 표정으로 그 이유를 묻자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마17:20) 그렇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을 쉽게 수긍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달라질 리가 없다. 기도응답의 비결은 바로 견고한 믿음에 있다. 그렇지만 믿음을 튼튼하게 세우지 않고 기도만 열심히 하는 이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마 17:20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난해함을 넘어서 기이하기조차 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있다니, 그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성경에 있는,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에 태클을 걸 수도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게 진리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겨자씨만한 믿음도 아니라는 것일 게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응답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응답이 늦어지면 믿음도 스멀스멀 사라지기 시작한다. 6개월이 지나면 기대감은 절반 사라지고 1년이 지나면 대부분의 믿음은 자취를 보이지 않는다. 믿음이 사라진 표징을 아는 것이 어렵지 않다. 삶에서 기도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귀신들린 아들의 문제를 맡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을 리가 만무이다. 그리고 그 응답은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당장 나타나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견고한 믿음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출처는 기도와 말씀이다.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기도하러 갔을 때 동행한 제자들은 거의 없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가 동행했지만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할 때 그들을 쿨쿨 자고 있었다. 변화산에서도 역시 3명의 제자가 따라갔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베드로는 쿨쿨 자다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도 모르는 말을 내뱉었다. 예수님이 직접 질병을 낫게 하고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을 주실 때는 제자들도 그런 사역이 가능했지만 스스로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성령님과 깊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도의 습관 없이 응답은 언감생심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이 땅에 계실 때에 습관을 들여 항상 기도하곤 하셨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습관이 없기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부족한 상태이다. 또 다른 믿음의 통로는 성경의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신다. 자신이 곧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끊임없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설교를 들어도 어느 정도의 성경지식은 갖출 수 있다. 그렇지만 견고한 믿음을 채우는 것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필자의 체험에 의하면 견고한 믿음을 얻는 성경읽기는 매일 한 시간이상 읽고 묵상해야 가능하다. 일주일에 2,30분 설교를 듣는 것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설교시간이라고 해서 온전하게 성경말씀만을 배우는 것도 아니기에, 날마다 습관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을 채우기 어렵다.

 

믿음은 생물(生物)이다. 즉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상태이다. 예전에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현재 유지하지 못했다면 죽은 믿음일 뿐이다. 신앙의 경륜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현재보다는 과거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나 기도응답을 알리는 것에 열을 올린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현재 믿음의 상태이다. 과거에 아무리 화려한 신앙과 탁월한 믿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지금 견고한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무런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현재 믿음의 상태가 중요하지 지나간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다. 날마다 견고한 믿음을 항상 유지하는 비결은 다른 게 없다. 날마다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것에 전념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바울 스스로가 경건의 모본을 보였기에 자신을 본받으라는 권유도 서슴지 않았다. 날마다 견고한 믿음으로 채우지 못한다면 기도에 응답이 없고 삶에 힘이 없을 것이다. 부족한 믿음을 채우는 경건의 습관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에 무지하다.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기도는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혼자 소리를 지르거나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이 내주하는 상태가 비로소 하나님이 듣는 기도인 이유이다.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온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시간낭비이다. 성령의 내주가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기도목록을 목청껏 소리치지 않는가?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있는 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한 때 성령 충만을 소망하는 기도는 오순절 교단교회의 전유물로만 여겨졌지만 지금은 교회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성령 충만한 기도를 소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한 기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기도하기 전에 뜨거운 찬양과 웅장한 악기소리로 분위기를 달궈놓은 다음 걸쭉한 목소리의 인도자가 마이크를 붙잡고 기도를 시작하면 교회가 떠나갈 듯이 우렁찬 기도가 시작된다. 그러면 모두가 커다란 목소리로 기도하거나 방언기도가 곳곳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렇게 한 시간만 기도하면 옷이 땀에 흠뻑 젖고 목소리는 쉬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가 된다.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설 때면 가슴이 시원할 정도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모두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뜨거운 기도를 했다고 생각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이다. 집에 돌아오면 이내 냉랭하고 건조한 마음의 상태로 돌아온다.

 

오순절 교단의 교회에서 대부분의 평신도 시절을 겪은 필자도 그런 기도가 성령 충만한 기도라고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기도회에 오랫동안 참석했어도 기도에 응답이 없고 삶에 힘이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 필자가 목회자가 되어 다시 기도훈련을 시작하면서 성령충만한 상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상태는 감정이 격앙된 상태와는 다르다. 기도할 때 느끼는 감정만 가지고는 구별할 수 없다. 기도가 끝나고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왔을 때 알 수 있다. 성령 충만한 기도가 끝나면 가장 먼저 평안한 마음과 기쁜 마음이 들어찬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찬송이 입에서 흘러나오며 무시로 영적으로 기도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성경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기도할 때가 아니라 기도가 끝나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그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분명 성령 충만한 기도를 했다고 보아도 된다.

그렇지만 기도할 때뿐이라면 성령 충만한 게 아니라 뜨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감정이 고무되고 격앙된 상태였을 뿐이다. 감정이 격앙된 상태는 뜨거운 기도집회뿐 아니라 나이트클럽이나 노래방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지만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분위기가 고조된 기도회가 아니라 조용히 침묵으로 기도했을 때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요 15:7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은 응답되는 기도의 비결에 대해 성령이 내주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에 대해 무지하기에 감정의 격앙과 성령 충만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에 대해 무지하다면 기도응답도 없다. 모든 기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성령충만한 기도를 하려면 기도에 몰입되는 훈련을 거쳐야 한다.

 

기도만 시작하면 잡념이 들어오고 졸음이 쏟아져서 오래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기 무섭게 통성으로 기도하거나 방언기도를 하기도 한다. 성령 충만한 기도를 위해서는 방언기도나 통성기도, 침묵기도 등의 기도방법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방언으로 기도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 아니라 자신이 지어내는 방언일 확률이 크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이들은 오래 기도하기 어렵다. 눈을 감고 손을 모아서 기도한다고 그 즉시 성령이 오실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상태나 성령 충만한 기도훈련을 제대로 시키는 교회도 드물다. 그 이유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도 성령 충만한 기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니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냥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거나 집회분위기를 달구는 기도회에 참석하라고 종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유야 어쨌든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에 대해 무지하다면 기도응답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 기도는 공중에 흩어지는 푸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