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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잃어버린 크리스천 - 신상래 목사

Joyfule 2014. 7. 31. 14:52

 

기도 가이드 게시판을 개설했습니다.

신상래 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말씀이

기도생활에 좋은 지침이 되어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요

 

   기도를 잃어버린 크리스천 - 신상래 목사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은 정규적인 기도를 하지 않는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실천에 옮길 생각이 별로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아주 오랫동안 기도를 하지 않는 채 신앙생활을 해온 잣대로 보면, 앞으로도 그렇게 기도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 틀림없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발명은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는 말일게다. 기도에 대한 존재의 의미도 여기에 해당된다.

기도는 영적인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행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분을 뵈려면 영적인 통로인 기도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여러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그 이유를 한 마디로 함축하다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영적인 존재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하지에 그렇지 않을까? 아니, 하나님을 믿고 천국의 소망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에게 영적인 존재에 대해 무지하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진단은 사실이다.

 

의사의 꿈을 꾸는 청소년은 의대에 들어갈 수 있는 높은 학습능력을 연마해야한다. 의대에 들어가서 국가고시를 합격해야 의사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과대학에 들어가는 게 곧 의사가 될 수 있는 필수적인 통로인 셈이다. 판사나 변호사, 검사가 되려면 사법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법대를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변호사 자격이 얻어지며 사법연수원에서의 성적에 따라 판사나 검사로 임용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그래서 의사나 판검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은 상위 1%에 들어가는 탁월한 학습능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통로가 무엇인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기에 주경야독하며 공부에 전념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의사나 변호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학생들은 한 명도 없다. 그렇지만 기도를 정규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크리스천은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 존재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하지 않으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믿음의 토대가 부실하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일주일에 한번 주일예배에 참석하면, 하나님을 믿으며 이로 인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의 근거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놀랍게도 적지 않은 크리스천이 그러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성경에 의하면 주일예배나 십일조, 각종 교회봉사 등의 희생적인 신앙생활만 성실하게 한다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견고한 믿음은 희생적인 신앙행위로 나타나게 되지만, 거꾸로 모든 희생적인 신앙행위가 믿음에서 연유되지는 않는다. 성경의 의도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희생적인 신앙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이, 최소한의 형식적인 신앙행위로 이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견고한 믿음이 없어도 신앙행위는 보여줄 수 있다. 모든 부부들이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의 상태로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이를 가꾸고 충전하지 않으면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믿음도 그렇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믿음으로 시작했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사랑처럼 쉬 사라지게 된다. 그렇지만 결혼식을 올린 부부는 사랑의 유무에 관계없이 자녀를 낳고 늙어가면서 같은 집에서 살을 맞대고 살게 된다. 교회에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된 이들은 견고한 믿음이 빠져나갔더라도 관성처럼 일주일에 한 번 교회예배에 참석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빠지거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신앙행위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고 위안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게 믿음의 행위라고 생각하려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믿는 믿음의 행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인정한다면 날마다 그분을 찾고 경배를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성경에서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그 뜻을 찾았다면 그 뜻대로 애쓰고 힘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 그런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기에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 이유이다. 성실한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행처럼 시행하던 습관 때문에 여전히 자신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전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실상을 지적하거나 경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주일예배를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이러한 진단을 전혀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화를 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수십년동안 성실하게 쌓아왔던 신앙의 연륜이 헛것이고 가짜라는 데, 누군들 분노하지 않겠는가? 갓난 어린아이는 배고프면 무조건 울어대기 시작한다. 그 행위는 배고픔에 대처하는 생존비결인 본능으로서, 울기만 하면 즉시 어머니가 젖을 물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커가면서 세상을 알아갈수록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성인이 되는 시기는 자신의 힘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때와 동일하다. 그래서 아무리 궁핍해도 은행에 가서 돈을 보태달라고 하지 않는다. 은행계좌에 예금된 잔액이 없다면 돈을 내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위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쥐락펴락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는다면 그분에게 당신의 결핍을 호소하며 자비를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당신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그 분의 절대성과 무한한 능력, 요청하면 주실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 지라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탁월한 해결통로를 알고 있는데, 이용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바보이거나 아니면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있든가, 둘 중 하나이다.

기도에 대해 무지하다.

 

어릴 적 읽은 동화책에 들어있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맹인 3명이 코끼리 구경을 하러갔다.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들은 조심스레 손으로 생김새를 만져보았다. 크기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만진 부위를 보고 코끼리에 대한 감회를 늘어놓았다. 먼저 배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가 마치 벽처럼 생겼다고 회상했다. 그러자 다리를 만진 맹인은 손사래를 치면서 기둥처럼 생겼다고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길쭉한 코를 만진 맹인은 앞선 두 사람의 견해를 반복하면서 코끼리가 뱀처럼 생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이 세 사람의 맹인의 행동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코끼리는 거대한 몸집으로 한손으로 만져 알기에는 너무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화가 우리네 기도에 대한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 대부분은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요구사항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어떤 교회의 벽에 결려 있는 현수막의 내용을 살펴보자.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고민하십니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앞의 구절은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뒤의 말은 군대에서 흔히 듣던 용감한 구호를 떠올린다. 판매회사에서 아침조회의 마무리를 짓는 함성으로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위의 현수막에서 밝힌 기도의 목적은, 용감하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별 다름이 없다. 문제가 생기면 우선 기도하라는 권면이 그것이고, 상담을 하면 맨 먼저 권유하는 처방도 기도이다.

 

설교 때마다 새벽기도회의 참석을 종요하면서 늘 내뱉는 증거로서, 새벽기도에 참석하여 기도응답을 받아 부유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예를 들고 있다. 그래서 용감하게, 희생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믿음으로 가정하고 있다. 40일 작정기도, 백일기도, 천일기도, 심지어는 금식기도 등을 앞세워, 기도를 마치 싸워 이겨야 하는 군대의 전투전략처럼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기도가 부자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얻어내고 싶어 하는 불량한 아들이 호소하는 혈육의 정에 불과하다. 그들의 기도전략도 새벽기도나 심야기도, 금식기도 등의 희생의 강도를 놓여 하나님을 압박한다. 그리고 기도응답을 받는다면 당분간 또 다른 요청사항이 생길 때까지 기도를 쉬고 있다가 새로운 요구사항이 생기면 그때 다시 기도를 시작하는 식이다.

 

또 다른 모습은 기도란 자신의 신앙행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목회자들의 기도행위는 주보나 광고로 교인들에게 시시각각으로 알려진다. 희생의 강도가 높을수록 교인들에게 더욱 자세히 알려진다. 장로가 되면 그가 섬기는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빠질 수 없다.

납득할만한 결석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에 빠진다면 심각하고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크리스천이라면 식사에 앞서 기도행위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식구나 교인은 물론 직장동료나 타인에게까지, 그것도 조용한 장소뿐만 아니라 너무 시끄러워서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끌벅적한 삼겹살집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식사에 앞서 감사기도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들의 자신의 경건한 믿음을 교인들에게 보여주는 행위는 새벽기도회의 참석을, 그리고 타인에게 보여주는 데는 식사기도가 아주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자신의 기도를 하는 데도 열정적이지만 이를 남들에게 홍보하는 데도 열심이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따로 만나는 장소에서는, 자신이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목회자뿐 아니라 기도를 좀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 주변의 사람들에게, 틈만 나면 그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행위를 열심히 알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남들이 보고 있는 장소에서, 그것도 통성이나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즐긴다. 이들은 기도가 자신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알리는 적절한 홍보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들의 모습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서기관이나 랍비들은 기도문을 옷 술에 커다랗게 수를 놓아 입고 다니거나, 시장어귀 등의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의 외식행위를 책망한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소개하고 있다.

 

또 어떤 크리스천은 기도행위를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특징은 그들이 관행적으로 하고 있는 기도행위를 하지 못하면 안전부절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회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고 있는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고 교회에서 열리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돌아와야 안심을 한다. 이들에게는 기도시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야 하나님을 만나고 왔다고 여기며 그날 할당량의 믿음행위를 완수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깜빡 늦잠을 자거나 다른 사정이 있어 교회에 가지 못하면 하루 종일 찝찝해하거나 불안해한다.

 

필자는 이들의 습관적인 기도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서 못하면 집에서 기도해도 되고, 새벽에 못하면 낮이나 밤에 기도하면 된다. 그렇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장소에서 규칙적인 시간에 기도를 하지 못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여기는 이유는,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족시키는 신앙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기도의 자세나 기도내용, 기도할 때 교감하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자신이 정한 기도행위를 어김없이 완수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이는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기도하거나 방언기도, 통성기도, 금식기도 등의 기도방법이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집에서보다 교회나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것을 즐기며, 특정기도회에 참석해서 기도하는 게 하나님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태도나 성품, 동기나 목적 등의 속내를 날카롭게 살펴보신다. 이외에도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나 부흥회 강사 같은 목회자들에게는 신령한 기도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예배나 집회가 끝났을 때 줄을 서서 안수기도를 받으려는 풍경은 우리네 교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안수는 성직임명식과 관련하여 새로운 신자에게 성령과 은사를 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예수님과 사도에 의해 치유를 수반하는 행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안수 받은 자의 믿음이나 성품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야지, 안수하는 자의 능력만으로 인해 기도가 응답되고 치유가 신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안수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고, 디모데에게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딤전5:22) 특별집회에서의 기도나 예언기도는 남다른 비결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기도응답을 받는 조건으로 특정한 예언자를 찾거나 은사 받은 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을 기도행위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비성경적인 기도행위는 아무런 효력도, 열매도 없다. 단지 시간과 재물, 정력을 낭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