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 - 신상래 목사
필자가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동기는 기도응답을 받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부분의 집안들이 그랬듯이, 필자의 집안도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불교와 혼합된 토속신앙을 믿어왔다. 계룡산 밑에는 요즘도 굿을 하고 귀신을 섬기는 굿당이 많이 있다. 그곳이 고향인 필자의 집안도 그런 영향으로 귀신을 무던히도 섬겼다.
그런 필자가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다. 필자의 전공은 영문학이라 영어회화 능력이 필요했지만, 그 당시에 영어회화학원은 흔치 않았으며 비용도 적지 않아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미국인 선교사가 무료로 영어회화를 가르친다는 친구의 말에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학습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었지만 종교적인 의식은 필자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개인사로 인한 고민으로 술에 대취한 밤, 호기심 반 객기 반으로 난생처럼 기도를 해보았다. 그런데 다음날 기적 같은 일이 있어났다.
간밤에 기도한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곤 했었는데 그 때마다 응답이 왔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교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규적으로 교회예배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 다음부터는 기도응답이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유를 모른 채 힘이 없는 신앙생활을 그럭저럭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준비한 사업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삶이 수렁에 깊이 빠져버리자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하던 기도조차 사라졌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없는 이유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며 찾아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에, 처음에 신속하게 오던 기도응답이 왜 사라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필자뿐만 아니다. 적지 않은 크리스천이 겪는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는 원인을 성경에 조목조목 밝히셨다. 그러나 성경에 무지하고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이 없기에 캄캄하고 답답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의 기도는 자신이 요구하는 사항을 목소리를 높여 요청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새벽기도회나 심야기도회 시간에 통성기도를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보라. 사업의 번창이나 직장에서의 승진, 자녀들의 명문학교 진학, 건강의 회복, 재물의 복, 부유하고 성공적인 삶 등 세상에서 얻고 누리고 싶어 하는 목록들로 빼곡하다.
기도란 부자 하나님으로부터 얻고 싶어 하는 요구사항들을 경쟁적으로 외치는 시간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이런 기도목록의 요청방식은 다급해지면 다급해질수록 희생의 정도를 높인다.
일상적인 기도에서 새벽기도회의 참석으로,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며 백일이나 천일기도를 작정하고, 이렇게 해서도 안 되면 매 기도 때마다 두둑한 헌금을 봉투에 넣어 드리거나 아예 짐을 싸들고 기도원에 올라가 40일 작정 금식기도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장난감 가게 앞에 엎어져 떼를 쓰며 막무가내로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가 생각나서 픽 웃음이 새나온다. 우리네 크리스천에게 기도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하는 목록을 전투적으로 얻어내는 수단인 셈이다. 그
렇지만 아무리 희생적으로 기도하더라도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에 관심이 없을 게 뻔하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위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지도자이자 예수님의 형제로 알려졌으며, 어느 교부는 그가 얼마나 기도하며 살았는지 무릎에 굳은살이 박여 마치 낙타무릎처럼 딱딱해졌다고 말 했다는 야고보사도이다. 요즘말로 치면 기도의 달인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 길지 않은 그의 편지는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빼곡하게 차 있다. 그렇기에 기도에 관한 한, 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요점을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하나님 뜻대로만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도하는 것을 받은 줄로 알고 감사함으로 구하라는 말씀만을 믿음으로 여겨 간절히 구하지만, 기도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도하는 내용이 탐욕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응답을 바라지 않는 게 좋다. 어차피 응답도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사업의 성공이나 회사에서의 승진, 자녀의 명문대학의 합격, 부를 소망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일까, 아닐까? 먼저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열망하는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아보자. 아쉽게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다.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함축하는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생계비를 넘어서는 부를 요청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사업의 번창과 회사에서의 성공, 자녀의 명문학교 진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러한 기도는 속내나 동기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겠지만, 오직 세상에서 잘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왔다면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이다.
이런 판단에 대해 자신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요청한 것이라며, 잘되고 성공하면 우월한 지위로 전도도 많이 하며 많은 돈을 벌어 십일조도 많이 드리고 교회도 세울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것이다. 그러나 성공을 하거나 부자가 되어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는 뜻을 행하겠다는 것은 탐욕스러운 마음을 덮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고, 입에 발린 영광돌림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분은 미래에 성공하고 부유한 우리가 아니라 가난하고 낮은 신분일지라도 현재의 우리에게서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받고 싶어 한다. 우리가 부자이든 성공자이든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는다.
지금의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향해 있기를 바라신다. 사실 부자가 되거나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속내는 하나님보다 부와 성공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새벽마다 밤마다 수많은 교회에서 외치는 간절한 기도가 공허하게 사라지는 이유이다.
기다리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한다.
기도를 시작하고 나서 당신은 그 응답을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가? 아마 몇 개월은 기다릴 수 있겠지만 1년이 넘으면 의심이 들고 그래도 응답이 없으며 흐지부지 되다가 이내 기도를 포기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 즉각 응답이 오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여주실 것을 약속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상속자를 주지 않자, 인간적인 계획으로 사라의 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나이가 86세였다.(창16:16)
그렇지만 그 역시 하나님이 계획하신 상속자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들인 이삭을 주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다. 청년이라도 10년 동안 자식을 주지 않았다면 기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호호백발 할아버지에게 15년을 기다리며 확신에 찬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물론 즉시 응답을 주실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유무를 인내심의 결과로 측정하고 계시는 듯하다.
눅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을 쫓아다니던 가난한 과부의 비유를 위의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돈을 받고 재판을 악하게 해주던 나쁜 재판관이 가난한 과부의 요청을 들어들 리 없다. 그렇지만 이 과부는 아침, 저녁으로 집과 법원을 쫓아다니며 애원한 끝에 끝내 소원을 이루었다.
아마 재판관의 종들에게 욕을 듣고 물을 끼얹는 수모를 당하는 것은 물론, 종들에게 맞아 멍이 시퍼렇게 들어가며 공갈과 위협을 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과부는 개의치 않고 인내로 참으면서 결국 재판관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비유를 마치면서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고 혼잣말로 내뱉은 것이다. 이 말씀은 기도를 시작할 때 낙심하지 않고 유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녀를 보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독백이다. 아쉽게도 예수님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우리는 기도하고 나서 오랫동안 기다리지 못한다. 응답이 길어지면 이내 포기하고 기도를 중단한다. 그리고 낙담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
일생동안 오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영국의 목회자인 죠지뮬러도 어떤 이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무려 50년을 넘게 했다는 고백을 자신의 책에 썼다.
거꾸로 말하자면 매일처럼 기도응답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도 수십년동안 응답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조지뮬러는 기도응답의 비결이 다름 아닌 응답이 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없는 이유는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기도를 쉽게 중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도응답을 오래 기다리지 못하는 것일까? 빨리빨리 병이 우리네 국민에게 감염되었기에 크리스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기도의 속내와 동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기도라면 응답이 없으면 다른 수단이나 방법을 찾아서라도 이루려고 한다.
즉 인간적인 생각이나 세상의 방법을 좇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기도에 관심이 멀어지고 중도에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기도라면 응답이 쉽게 오지 않아도 조바심을 내지 않을 뿐더러 중도에 포기할 일도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자신은 그 도구에 불과하다면 비록 응답이 더디 오더라도 충성스러운 종으로의 역할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성실하게 기도훈련이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다면 평소에 간절히 소원하는 기도목록을 요청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았다면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는 기도는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고통의 시험장일 뿐이다.
기다려도 응답이 오지 않아 포기하든 기도습관이 없어 중단하든, 기도를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응답이 내려오지 않는 주요한 원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응답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이 최상의 때라고 판단하실 때에 응답해 주신다. 그 시간은 즉각적일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십년을 넘게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필자의 사역이 그러했다. 필자가 사역을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그동안 서재에서 수십권의 책을 쓰고 방송이나 세미나도 적지 않게 해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동안 매일 서너시간씩 기도한 것을 시간으로 치자면 엄청난 시간을 기도하며 사역이 열리기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불평하지 말고 조금 더 기다리라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막연한 깨달음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알아오다가 지금은 영음으로 직접 말씀을 듣기도 한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사역이 더디고 기도응답이 오지 않는 지. 그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사역은 너의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으로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당부도 덧붙이셨다. 이처럼 10년이 넘도록 응답이 더디 오는 것이 비단 필자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일은 이처럼 응답도 더디 걸린다.
자격을 갖추며 훈련하고 준비하여야 항목도 많고 주변의 환경이 열리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응답을 받으려고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대한 신뢰감의 부족의 결과이다.
'━━ 영성을 위한 ━━ > 기도가이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쉼 없는 기도습관을 들일 것인가? (0) | 2014.08.05 |
---|---|
우리의 기도는 턱없이 부족하다.| - 신상래 목사 (0) | 2014.08.04 |
죄악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 신상래 목사 (0) | 2014.08.03 |
기도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 신상래 목사 (0) | 2014.08.01 |
기도를 잃어버린 크리스천 - 신상래 목사 (0) | 2014.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