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마음

Joyfule 2008. 12. 24. 02:53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마음

누가복음 2장 36-39절


< 가장 소중한 선물 >


  성탄절 며칠 전, 한 주일학교 교사가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이번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원하지?” 그때 일찍 아버지를 잃은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번에 사진 속의 아버지가 살아오셨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의 소원처럼 성탄절은 하나님 아버지가 사람으로 살아오신 날입니다. 다른 종교는 대개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자신을 선물로 주는 종교입니다. 최고의 선물은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일전에 한 아내가 남편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며칠 후 당신 생일인데 어떤 선물이 갖고 싶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저는 어떤 선물보다 당신 자신이 좋아요.” 남편이 기분이 좋아서 다시 말했습니다. “한번 말해 봐요. 이번에는 정말 당신이 원하는 선물을 해주고 싶소!” 그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세요. 그러니까 이번 주일에 저와 같이 교회에 나가요.” 


  결국 남편은 “한번만!”이라는 다짐을 하고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교회 설교를 하면서 “차든지 덥든지 하지 말고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으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설교 중의 ‘화끈!’이라는 말이 말에 든다고 교회에 계속 다녔고, 나중에 은혜 받아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한 선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사랑의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이 주어진 날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본받아 우리도 항상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부족한 저를 드립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살게 하소서!” 이런 고백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제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 은혜를 준비하는 마음 >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만 사모했던 안나라 하는 여자 선지자가 아기 예수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나는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84년 동안 과부로 지냈는데, 그녀가 메시야를 만나는 은혜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통해 은혜를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할 몇 가지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1. 성전 중심적인 마음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과부 된지 팔십 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안나는 인간적으로는 불쌍한 여인이었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84년 동안 성전 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성전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물론 성품도 좋았겠지만 성전 중심적인 생활이 행복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자나 깨나 교회를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 복도 받지만 그 전에 행복합니다.


  행복은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 마음을 쏟는 대상이 교회라면 더욱 의미 있고, 특별한 축복도 주어집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안나는 불행한 여인인 것 같지만 그녀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또한 84년 동안 교회 중심적으로 살면서 얼마나 그 마음이 겸손하게 되었을까요? 겸손하면 행복과 존경을 얻지만 교만하면 불행과 상처만 얻습니다.


  어떤 분은 과거에 성적이 조금 좋고,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 나온 것으로 자기를 오해해서, 자기를 고립시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금만 기분 나빠도 “지가 뭔데...”라고 하면서 아무 대책도 없이 사표를 쓰고, 다른 직장을 소개하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라고 하며, 텔레비전에 아는 사람이 나오면 “저 친구! 공부 되게 못했어!”라고 우습게 알고, 누가 뭘 잘하는 것 같으면 “어쭈! 제법인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8년째 실업자 생활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지혜로운 자부심은 좋은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자부심을 줍니다. 그러나 남을 우습게 아는 편협한 자부심은 자기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타자 중심적인 마음과 공동체 중심적인 마음을 배양하고 훈련하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성전 중심적인 마음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최대의 특효약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성패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성전중심적인 마음으로 얼마나 고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


  안나가 84년 동안 성전 중심적으로 살았던 이유는 그 삶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메시야를 사모하는 간절한 소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안나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면서 힘들어도 교회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고, 선한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때가 찾아오고, 좋은 열매가 맺히고, 무엇보다 자신이 어디에서도 쓰임 받을만한 좋은 사람이 됩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선지학교를 빨리 졸업할 방법이 없습니까?”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있긴 있네. 그런데 문제는 자네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느냐가 문제이네. 하나님은 백향목 한 그루를 키우는데 100년을 쓰지만 호박을 키우는 데는 단 6개월만 쓰시네. 자네는 백향목 나무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호박이 되고 싶은가?” 그 말을 듣고 학생은 기다림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기다림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 실패란 없습니다. 다만 중간에 포기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기도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기도 도중에 기도를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전도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대개 몇 번 전도하다가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힘들어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의 고생과 고통이 아닙니다. 자녀가 고통과 절망에 빠지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 부모는 교육을 위해 자식의 고통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아내가 자녀들을 야단칠 때 남편은 금방 달려가 말리고 싶지만 참습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때로 어려운 짐들이 있어도 그것은 사랑하는 주님이 메워주신 것입니다(애 3:27). 그 주님이 메워주신 짐이라면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힘들어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의지하고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실과 수고를 잘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과 수고를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후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3. 꾸준히 기도하는 마음


  본문 3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이 구절을 보면 안나의 오랜 기다림의 원천은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기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넘어지기 쉬운 존재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로 기도라는 통로를 주셨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깊은 평안을 줍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기도하면 무엇이 생깁니까? 해야 할 일이 생각나고, 확신이 생기고,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노력하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발명한 발명왕 에디슨은 천 개의 발명품을 발명하려고 만 번 실험을 하는 땀을 흘렸고, 만 번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진짜 천재는 IQ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의심합니다. “목사님! 제가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오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기도응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이란 나의 현재와 장래와 사후의 삶을 위해 최선의 것을 예비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되 기도응답의 형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이 결국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른 기도는 어느 한 기도라도 헛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를 피해 무덤에서 드린 카타콤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래도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는 한참 걸렸습니다. 그러나 주후 313년에 결국 로마는 무릎을 꿇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우리의 진실한 기도는 결코 어느 하나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본문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안나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란 사실을 깨닫고, 살아서 메시야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 감사는 어떤 외적인 축복이나 외적인 조건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메시야를 본 것 하나만 가지고도 84년 동안의 기다림을 보상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처럼 최고의 감사는 조건 없는 감사입니다.


  살면서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눈이 정상적인 것 하나만 가지고도 범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시각장애인이 자기 생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눈뜬 건강한 사람들이 삶을 비관하고 자살합니다. 그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믿음과 인격과 가치관에 좌우됩니다.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 소뇌가 잘못 건드려져 뇌성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살면서 일곱 살까지 일어날 수 없었고 열 살이 되어서야 겨우 숟가락을 혼자 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었지만 17살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필사적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기에게도 많은 것이 있음을 깨닫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찬양했습니다. 그녀는 <나>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남이 갖고 있는 것 갖지 않았으나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그처럼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때 그녀에게 주옥같은 내면의 시들이 빚어졌습니다. 그 시에서 그녀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어려울 때는 더욱 감사하고/ 슬플 때는 더욱 기뻐하십시오/ 즐거울 때는 애통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더욱 근신하십시오.”


  또한 그녀는 자기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합니다. “내게 고통을 주신 주께 내가 감사합니다. 만일 주께서 내게 고통을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주님의 고통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고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행복과 감사는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습을 통해서 감사할 것을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가끔 어려운 일도 생기지만 그래도 감사할 것이 여전히 무수히 많습니다. 어떤 분이 50세에 전도사가 되고, 17년 후에 은퇴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주님! 저 같은 것을 데리고 17년 동안 일하느라고 얼마나 힘드셨나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얼마나 소중한 감사표현입니까? 그런 감사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자주 감사를 잊어버립니까? 좋은 일은 좋고 편하니까 쉽게 잊어버리고, 나쁜 일은 마음속에 맺히니까 오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이 생기면 그때부터 불행했던 일보다는 행복했던 일이 더 생각나고, 주님을 알게 되고 구원받은 것에 대한 깊은 감사와 감격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처럼 기쁨과 감사가 회복될 때 주님이 그 마음에 찾아와주실 것입니다.


5. 주님을 전하는 마음


  본문 38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구원을 바라고 있었지만 강대한 로마를 보면서 거의 절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절망한 사람들에게 안나는 아기 예수가 희망임을 말해주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오직 예수님만이 희망임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없이 사람만으로는 결코 희망도 없고, 평화도 없습니다.


  1800년대 중반까지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교회의 꼭대기에는 오랫동안 그리스 정교회를 상징하는 큰 은별 장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스 정교회와 건물의 일부분을 나누어 소유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 은별을 철거하고 대신에 자신들의 별을 장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 측에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은별 하나 때문에 세기의 대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정교회는 러시아의 후원을 받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실제로 통치하던 나라는 터키였습니다. 그런데 터키가 로마 가톨릭 교회 편에 서자 러시아는 터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즉시 프랑스와 영국이 터키와 연합군을 형성해서 싸웠습니다. 그 전쟁이 1853년에서 1856년까지 계속된 크리미아 전쟁(Crimean War)입니다. 그 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이 죽었고,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를 옹호했던 영국과 프랑스와 터키 연합군이 승리하고 마침내 은별을 철거되었습니다.


  평화의 왕이 탄생한 곳에서 역사적으로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그처럼 사람은 스스로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역사상 지금까지 약 8%의 기간만 평화가 있었고, 지난 300년 동안 유럽 지역에서만 286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주전 1500년부터 주후 1900까지 약 800번 이상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지만 그 조약의 평균 유효기간은 2년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만으로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지금도 법정에서는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헐뜯고, 서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핵심정신은 무엇입니까? 바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디에 가든지 평화의 사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 욕심을 버리십시오 >


  평화의 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기주의와 독점욕은 어둠을 키우는 평화의 적입니다. 자기 몫만 찾으려고 하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어둡게 하고, 평화를 깨고, 하나님의 진노를 부릅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원하면 욕망을 조금 덜어내고 손해 보는 삶을 연습하십시오.


  요새 한국교회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성도수가 많이 줄고 있습니다. 지금 분당 지역에 있는 300교회 중에서 부흥하는 교회는 1-2개 정도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한국 교회에 그런 위기가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위기를 허락하신 이유는 숫자적인 성장이 진짜 부흥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고, 교회성장이란 미명 하에 숨겨진 세속적인 탐욕을 버리고 나눔을 실천하며 살라는 엄중한 메시지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한 큰 교회 목사님이 천국에 가는 꿈을 꿨습니다. 그런데 꿈에 보니까 한국을 대표하는 어떤 목사님이 천국에서 오두막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아는 대 교회 목사님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의 현재 모습이 다 영상에 나타났는데, 큰 교회 목사님들이 거의 대부분 오두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목사님들이 큰 영광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이상해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사도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대 교회 목사님들이 하나같이 왜 저런 곳에 지냅니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만 알고 살았기 때문이네.”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 설교도 많이 했고 큰 교회를 이뤘어요. 무슨 증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베드로 사도가 말했습니다. “다른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지나치게 교회가 큰 것이 증거지.”


  그 꿈을 깬 꾼 다음부터 그 목사님은 목회의 방향을 고쳐서 주위의 다른 작은 교회들이 상처를 입지 않고 함께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그 교회는 성장을 멈춰서 숫자적으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었지만 그분의 영향력은 오히려 커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영향력입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목회였고, 당대의 대 교황들보다 거지처럼 지냈던 프랜시스의 이름이 더욱 찬란하게 된 이유입니다.


  몸은 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세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돕기에 몸이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 노는 세포가 생겨납니다. 그 세포는 다른 세포들은 생각하지 않고 주변 양분을 다 빨아들여 혼자만 커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만 비대하게 커진 세포가 바로 암세포입니다. 결국 그 암세포는 전체 생명도 죽이고, 나중에는 자신도 함께 죽습니다. 그처럼 혼자만 커지려고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암적 존재가 됩니다.


  성도는 주님이 왜 아기 예수님으로 낮아지셨는지, 그리고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장 지상주의 때문에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는 얻고 둘은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모습이 됩니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바보 한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스가 주인으로부터 금 덩어리 하나를 품삯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가하는데 말 한 필을 끌고 가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는 그 말이 갖고 싶어서 금덩어리와 말을 바꿨습니다. 다시 길을 가다가 거위가 좋아보여서 말과 거위를 바꿨고, 다시 길을 가다가 예쁜 고양이가 좋아보여서 거위와 고양이를 바꿨습니다. 그리고 계속 가다가 숫돌이 좋아보여서 다시 고양이와 숫돌을 바꿨습니다.


  얼마 후에 개천을 지나는데 너무 숫돌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숫돌을 개천에 집어던지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귀찮은데 잘 버렸다!” 그처럼 소중한 것을 덜 소중한 것으로 바꾸고, 나중에는 다 잃고도 “나는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하니까 얼마나 바보입니까? 그처럼 외적인 성공주의에 빠져 믿음과 교회의 본질을 다 잃어버리고 “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았어!”라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제 아기 예수님의 낮은 데로 임하신 의미를 잃지 마십시오. 그리고 근시안적인 성공주의에 빠지지 말고, 100년 후, 1000년 후의 영향력을 보고, 더 나아가 천국의 삶까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항상 드리고 헌신할 생각부터 먼저 하십시오. 드리려는 사람이 결국 풍성한 은혜를 받습니다. 이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에 다시 한 번 헌신을 다짐하고, 가는 곳마다 평화의 사자가 되기를 힘씀으로 승리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