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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60. - Herman Hesse.

Joyfule 2012. 10. 29. 10:14
 
  
지(知)와 사랑60.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니콜라우스가 스케치 대 앞에 다가와서 말했다.
  "점심 시간일세. 이제 식사를 해야 하겠는데, 같이 하는 게 어때? 
어디 보세. 무얼 어떻게 그렸나?"
그는 골드문트의 뒤로 돌아가서 커다란 목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를 옆으로 제쳐 놓고 조심스레 민감한 손으로 그림을 집어들었다. 
골드문트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불안한 기대를 가지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선생은 스케치를 두 손에 들고 섰다. 
그는 엄숙하게 검푸른 눈으로 약간 매서운 눈초리를 던지며 매우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네가 그림 이 사람은 누군가?"
  얼마 있다가 니콜라우스가 물었다.
  "제 친구입니다. 젊은 수사이자 학자입니다.
  "좋아, 저쪽 안마당에 샘이 있으니 손을 씻게. 그후 식사하러 가세. 
조수는 지금 없네. 바깥에서 일을 하고 있지."
골드문트는 선생이 하라는 대로 했다. 
안마당에 있는 우물을 발견하고 손을 씻었다. 
그리고 '선생의 생각을 알기만 한다면 좀더 기분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가 들어오자 선생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선생이 옆방에서 왔다갔다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깥으로 나왔을 때 스승도 손을 씻고 있었고 
작업복 대신 아름다운 나사 웃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선생이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손잡이 기둥은 호두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조그만 천사의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입상과 오래 전 입상의 행렬이 줄지어 서 있는 
복도를 지나서 깨끗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마룻바닥도 벽도 천장도 단단한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창문 한쪽에 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처녀가 들어왔다. 골드문트는 그 처녀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의 그 아름다운 금발의 처녀였다.
  "리스벳."
  선생이 말했다.
  "한 사람분을 더 가져와야지. 손님을 모시고 왔단다. 
그건 그렇고.... 참, 이름을 아직 모르는군."
  골드문트는 선생에게 자기의 이름을 댔다.
  "음, 골드문트의 식사 준비는 되어 있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처녀는 쟁반을 들고 나가더니 잠시 후 
돼지고기와 완두콩과 흰 빵을 하녀한테 들려서 돌아왔다. 
식사를 하면서 선생은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골드문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는 음식을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매우 불안스럽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의 딸은 그의 마음을 몹시 끌었다. 
딸은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키가 크고 탄탄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얌전하게 앉아 있어서 유리그릇 옆에라도 앉아 있는 것처럼 
도무지 가까이하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골드문트에게 한 마디 말도, 시선 한번 던져주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선생은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반 시간쯤 쉬겠네. 
자네는 작업장으로 가든지 나가서 거리를 산책하든지 마음대로 하게나. 
용건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골드문트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선생은 그의 스케치를 본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해 주지 않았다. 
게다가 또 반시간이나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기다렸다. 
그는 작업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
자신의 스케치를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마당에 나가서 우물가에 앉아 대롱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려 
깊은 돌그릇 속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물은 홈으로 떨어지면서 쉴새없이 하얀 방울로 변하곤 했다. 
그는 어두운 샘물 속 수면에 떠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물 속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골드문트는 그 옛날 수도원에 있던 골드문트가 아니었다. 
리디아의 골드문트도 아닌 듯했다. 
숲속을 헤매던 골드문트도 아니었다. 
그의 생각에는 모든 사람은 다 흘러가 버리고 
또한 자꾸 변화해서 마지막에는 녹아 없어지고 말지만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상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똑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모든 예술의 근본과 모든 정신의 근본이 죽음에 대한 공포인 것 같았다. 
우리는 죽음을 겁낸다. 
생명이 덧없음에 대해 몸서리를 친다.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슬픔에 잠긴 마음으로 쳐다보며, 
우리들 자신도 또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