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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사랑64. - Herman Hesse.

Joyfule 2012. 11. 2. 01:36
 
  
지(知)와 사랑64.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이곳 저곳을 떠돌던 나날들, 
사랑을 소곤대던 밤마다 그리움과 생명이 위험과 지옥이 사자와 친근하던 시절, 
어머니의 얼굴은 서서히 변모하여 풍요와 깊이와 복잡성을 더해갔다. 
이제 그 얼굴은 자신이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표정과 빛깔에서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닌 어머니의 형상, 
즉 인간의 어머니인 이브의 형상으로 변모해갔다. 
니콜라우스 선생이 만든 몇 개의 마리아 상 가운데는 골드문트가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표현의 완벽함과 극치로써 제작된 애처로운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 
선생이 이런 형상을 다듬어 놓은 것과 같이 골드문트 자신도 언젠가 한번은 
지금보다 더 성숙하고 더 확실한 능력을 갖게 되면 세속적인 어머니 이브의 상을 
가장 오래고 사랑스런 것의 거룩한 상징으로서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만들어 보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한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이 형상은 그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깃든 
추억이 형상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끊임없는 변모와 성장을 거듭해갔다. 
집시 여인 리제의 표정, 
기사의 딸 리이다의 표정,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얼굴들, 
그것들은 모두 그 근원적인 형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이 얼굴뿐만 아니라 
그가 체험했던 온갖 경험과 경악과 감동이 이 형상에 특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 형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 여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로서 생명 그 자체를 표현할 작정이었다. 
그는 가끔 그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꿈속에는 자주 나타났다. 
하지만 이 이브의 얼굴과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었다. 
즉, 그것은 고통과 죽음과의 내면적 친화력을 갖는 
생명이 쾌감을 표현해 내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골드문트는 스케치하는 것에는 재빠르고 완숙한 솜씨를 갖추게 되었다. 
니콜라우스는 나무 조각을 하게 하는 한편 
골드문트에게 틈틈이 점토로 모형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제일 처음으로 그가 만든 작품은 높이가 한 자는 됨직한 점토의 모형이었다. 
그것은 리디아의 동생, 조그만 율리에의 감미롭고 매혹적인 형상이었다. 
선생은 이 작품을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주물을 부어 넣고 싶다는 골드문트의 소망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선생은 그 모형을 순결성이 너무 없고 또한 세속적이라고 평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다음 그는 나르치스의 모형을 제작하는 일에 착수했다. 
골드문트는 그것을 목조로 조각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사도 요한의 모형으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만 된다면 니콜라우스가 이전부터 부탁을 받아벌써 오래 전부터 
조수들한테 떠맡겨 놓은 십자가 군상에 그것을 포함시켜 보고 싶은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모형을 제작하는 일에 깊은 애정을 기울이고 해 나갔다. 
그는 탈선을 할   때마다 이 작업에서 자기 자신을, 
그의 예술가로서의 천직을, 그의 혼을 다시 발견하곤 했다. 
그러니 이 일도 그리 열심히 매달리지는 못했다. 
여인들의 춤, 친구들과의 술자리, 노름, 그리고 간혹 주먹다짐이 싸움까지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나 혹은 여러 날 작업장에 떠나 있다거나, 
혹은 일에 착수했다 하더라도 불안하고 불쾌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사랑하는 사도 요한의 명상에 잠긴 형상이 점차 순수한 입김을 내뿜으며 
통나무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기는 했지만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을 때만 
그는 경건하게 몸을 바쳐 작업에 임했다. 
그런 시간에는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았고 생의 환희도 인생의 무상함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때 그 친구에게 몸을 내던져 그의 인도를 기꺼워했던 때, 
어두운 그림자 하나 드리워지지 않았던 그때의 감정이 새로이 그의 가슴속을 찾아주었다. 
그런 감정의 의지로 형상을 새기고 있는 사람은 골드문트가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 나르치스였다. 
그 나르치스가 끊임없이 변천하는 생활에서 빠져나와 
그의 본질의 순수한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 골드문트의 손발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참다운 작품은 완성되는 것이다. 
골드문트는 간혹 그런 생각을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잊을 수 없는 선생의 마리아 상도 그렇게 만들어졌으리라. 
골드문트는 일을 시작하고부터 수도원에 그 입상을 보러 간 날이 수없이 많았다. 
선생이 2층 복도에 쭉 세워 놓은 먼지 앉은 입상들 가운데서도 
최상의 것으로 꼽히는 것들은 신비에 가득 차고 거룩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똑같은 과정을 거쳐 언젠가는 신비에 가득 차고 거룩하며 
유일한 것이 될 형상인 이브의 초상이 완성될 테지. 
아, 인간의 손에서 그러한 예술 작품이, 그와 같이 거룩하고 필연적이며 
어떠한 욕망이나 허영에도 더렵혀지지 않는 형상이 만들어 질 수가 있다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른 형상도 만둘 수가 있었다. 
아주 교묘하게 보이는 말쑥하고 매혹적인 것을. 
그것은 예술 애호가들을 즐겁게 해주고 성당이나 회의실의 장식이 되는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겠지만 거룩하고 참다운 영혼의 형상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