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와 사랑87. - Herman Hesse.
옮긴이: 최달식
펴낸곳: 교육문화연구회
어느 도시에서 골드문트는 유태인 거리에
집집마다 화재가 난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 주위를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울부짖으며 달아나는 사람이 있으면 무기를 이용해 화염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불안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에 의해,
도처에서 죄 없는 사람이 살해되고 추방되고 고문당했다.
골드문트는 화가 나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계가 파괴되고 몰살되었다.
환희도 순수도 사랑도 이 땅위에는 전혀 존재하질 않는 것 같았다.
이따금 그는 향락가의 과격한 향연으로 몸을 피했다.
저승 사자의 바이올린이 울려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내 그도 소리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주 자포 자기에 빠진 연회에 참석하여 기타를 치거나
관솔불 밑에서 무더운 밤을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지새우기도 했다.
그는 두려움을 몰랐다.
한때 죽음의 공포를 맛본 적은 있었다.
언제이던가, 겨울 밤 전나무 아래에서 빅토르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죄어 왔을 때,
또 살을 에는 방랑 시절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상대로 하여 싸울 수 있는 죽음이요,
그것을 상대로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떨리는 손발과 지친 사지로 싸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페스트의 죽음과는 싸울 방도가 없었다.
마음대로 날뛰는 대로 내버려 두고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골드문트는 벌써부터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타오르는 통나무 집에 레네를 남겨두고 온 이래,
죽음으로 온통 짓밟힌 도시와 이곳 저곳을 매일 헤매 다닌 이래,
이제 생명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내몰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무수한 죽음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어떠한 곳에서도 걸음을 멈추어 눈을 뜨고
지옥을 빠져나간다는 고요한 정열에 사로잡혔다.
죽음으로 폐가가 되어 버린 집에서 곰팡이가 슨 빵을 뜯어 먹었다.
미치광이들의 집합소 같은 술자리에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셨다.
쾌락으로 시들어지기 쉬운 꽃을 땄다.
여인들의 취한 듯 응시하는 눈길을 보았다.
주정뱅이들의 퀭한 눈길을 보았다.
숨이 끊어져가는 사람들의 가물거리는 눈길도 보았다.
열에 들뜬 절망에 빠진 여인을 사랑했다.
한 접시의 스프를 받고 시체를 나르기도 했고
한두 푼의 돈을 받고 시체 위에 흙을 덮어 주는 일도 했다.
세상은 암흑과 공포의 세계로 변했다.
저승 사자가 울부짖으며 죽음의 노래를 불렀다.
골드문트는 정열을 불사르며 그 노래를 들었다.
그가 가야 할 곳은 니콜라우스 스승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의 가슴속의 목소리가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갔다.
길은 멀었다.
죽음과 쇠약과 세상의 곳곳에 충만하고 있었다.
슬프게 끌려갔다.
죽음의 노래에 취하고, 세상의 울부짖는 고뇌에 자신을 내맡기고,
슬프면서도 행복하다는 듯 오관을 활짝 열어젖혀 놓고서.
그는 어느 수도원에서 새로 제작된 벽화를 구경했다.
오랫동안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의 춤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서는 희멀겋고 피골이 상접한 저승 사자가
왕, 사교, 수도원장, 백작, 기사, 의사, 농사꾼, 용병 등
온갖 인간 군상을,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이승 밖으로 끌고 나갔다.
뼈다귀만 남아 있는 악사들이 뼈다귀를 악기 삼아 연주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찬 골드문트의 눈길은 그 그림을 깊숙이 빨아당기고 있었다.
이름 모를 예술가 중의 하나가 페스트에서 본 것 중에서 얻은 것이리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가차없는 설교를
사람들의 귀에 쨍쨍 울리도록 외치고 있었다.
훌륭한 그림이었고, 좋은 설교였다.
이 낯서 동료의 안목이나 채색법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 과격한 그림에서는 처참한 음향이 울려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골드문트 자신이 겪고 체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준엄하고 용서의 여지가 없는 불가피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골드문트라면 다른 그림을 그렸으리라.
저승 사자의 광포한 노래는
그의 가슴속에서는 완전히 다른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르지도 준엄하지도 않고, 오히려 달콤하고 유혹적이고
고향으로 데려가듯, 어머니와 같은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
죽음의 손아귀가 생명을 향해 뻗쳐올 때
매섭게 도전적으로 가락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애정에 푹 젖고 결실의 가을처럼 기름지게 가락을 울리는 것이었다.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는 병사요, 판관이요, 죽음과의 접촉은 사랑의 몸부림이었다.
골드문트가 벽화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를 다 보고 나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새로운 힘이 스승이 있는 데로,
창작이 기다리는 곳으로 자신을 몰고 갔다.
하지만 곳곳에서 새로운 광경과 체험에 부딪혀 자꾸 늦어졌다.
열린 콧구멍으로 죽음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도처에서 동정과 호기심이 한 시간 혹은 한나절을 지체하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울어대는 농사꾼의 조그만 사내아이를 사흘씩이나 돌봐 주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대여섯 살 되는 아이 때문에 진땀을 흘리다가
간신히 숯굽는 여인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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