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관행적인 기도는 버려라.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유일한 통로는 기도라는 것을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기도에 동참하게 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오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는 형식적인 기도로 일관하고 있으며 소수의 사람들만이 드문드문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도를 따라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고단한 덫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극소수의 사람만이 경험하고 있는 능력 있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야 한다. 삶의 덫에 빠진 사람은 대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것이다. 마음속에 걱정과 염려가 들어차면 성령이 주시는 평안함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기도는 의무와 노동이 될 터이고 기쁨과 평안함이 없는 기도는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가 빠진 신앙생활은 무의미하다. 희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해 왔더라도 팍팍한 신앙생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삶에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얹어 둔 셈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1) 새벽기도는 무언가 특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하는 기도의 형태를 살펴보자. 물론 이는 교회에서 주문하는 것으로서 교회에 와서 시행하는 기도를 권장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적이 새벽예배후의 기도이다. 새벽예배는 대략 오전 5시나 5:30분에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30분가량의 예배가 끝나면 개인기도 시간을 갖는다. 개인기도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자녀들이나 남편의 아침을 준비해야하는 주부나 아침 일찍 출근을 서둘러야하는 직장인들은 오래 기도할 수 없기에 30분을 넘기기가 힘들다. 오가는 시간도 부담이 된다. 가까이 있는 교회를 선택한다면 10분 이내에 올수 있지만,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거나 목회자가 본 교회에 오기를 원한다면 30분 이상 걸려야 교회에 올수 있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새벽에 30분 기도하기 위해서 오가는데 걸리는 시간만 1시간이 되는 셈이다.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게 아니라 목회자의 눈도장을 찍으러 오는 것일 터이고, 기도하기보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는 만족감을 얻으려 할 것일 게다. 새벽예배가 한국교회만은 특별한 예배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새벽예배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아왔고 한국교회가 이만큼 성장을 했다는 데 필자도 기꺼이 동의한다. 그렇지만 삶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모양새를 따지거나 형식적인 기도에 만족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목숨을 걸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절박한 상황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새벽예배가 좋은 기도습관을 들여 주는 시간인 것은 맞지만 1시간이상을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지를 먼저 살펴보아야한다. 오가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보다 많다면 집에서 거리가 가까운 교회를 선택해야 할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집에서라도 기도하는 습관으로 바꾸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벽예배의 참여횟수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의 여부를 살펴보고 계시다.
(2) 교회에서의 기도와 집에서의 기도는 수준이 다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의 특징은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나 수요예배나 철야기도에 빠지지 않고 주일에도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하고 집에 가며 매일 오후나 저녁시간에 기도하러 오는 이도 적지 않다. 특히 어려운 문제와 삶의 고난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꼭 받고 싶은 이들이 자주 교회를 찾고 있다. 물론 집에서 기도에 집중하는 게 어려운 탓도 있으며 교회에 오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느낌도 들어 교회에서의 기도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도관행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한다. 우리의 생각에는 하루에 1시간 남짓 규칙적으로 교회에 와서 기도한다면 열심히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다. 하나님은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항상 기도를 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특정한 장소에 와서 기도하는 관행은 항상 기도하는 습관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교회에 와서 하루 종일 살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이든 간에, 일상의 생활에서 항상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것이 삶의 덫에 빠진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집착하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3) 기도원에서의 금식기도는 더욱 효험이 있다.
어떤 이는 기도원에서의 금식기도를 일반적인 기도보다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금식기도의 일수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응답이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금식기도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기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형태의 기도보다 금식기도가 응답이 빨리 오는 기도의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응답의 효험이 강력한 기도라면 차라리 의인의 기도가 더 역사하는 힘이 크고(약 5:16)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말한다.(잠 15:29) 즉 기도응답의 비결은 기도하는 사람의 성품이나 믿음이 더 중요하지 희생적인 기도가 해답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밝힌 하나님의 뜻보다 그동안의 관행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금식기도를 비롯한 희생적인 기도는 기복신앙의 기도행태에서 비롯된 영향이 크다. 기복신앙은 희생적인 행위가 클수록 더욱 효험하다고 믿고 있다. 물론 피자도 금식기도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금식기도가 다른 기도의 형태보다 더욱 응답이 빨리 온다는 그릇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4) 대형교회 목회자의 안수기도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특별한 집회가 끝나거나 예배가 끝나면 문제가 있는 교인들이 목회자로부터 안수를 받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은 드문 광경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쓰임을 받는 목회자로부터 안수기도를 받는 다면 하나님의 응답이 쏜살처럼 내려오는 특별한 통로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안수는 성직임명식과 관련하여 새로운 신자들에게 성령과 그 은사를 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해 치유를 수반하는 행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교회의 대표가 하나님에 의해 실제적으로 성취되는 치유의 통로임을 분명히 해준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치유는 자신의 인격을 통해 새로운 권능이 임했음을 암시하고, 사마리아의 새로운 신자들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되었을 때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의 손을 통해 신비한 능력이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안수라는 수단이라기보다 받은 자 들의 믿음이었음을 보여준다.(행 8:20~21;10:44~47)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고 있듯이, 안수 받는 자의 믿음이나 성품과 상관없이 안수하는 자의 능력에 의해 기도가 응답되고 치유가 신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조차 안수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으며 디모데에게도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딤전 5:22) 사람들이 안수하는 자만을 특별하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일 것이다. 성령의 임재나 치유가 내려오는 통로로서 안수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안수자의 믿음이나 영성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안수 받은 자의 마음이나 믿음에 있다.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발을 못 쓰는 자가 복음을 듣는 것을 보고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손을 잡아 일으킬 수 있었다. 아무리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인 바울이라 할지라도 안수 받은 자의 믿음이나 성품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허망한 일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격을 갖추기보다 대형교회의 목회자나 특별집회의 강사를 따라다니며 안수를 받으려 하는 것이 안타깝다.
(5) 특별집회에서의 기도나 예언기도는 남다른 비결이 있다.
어떤 목회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은 교인들을 만나면 자신에게 특별한 예언의 능력이나 치유, 기도응답의 능력이 있는 것을 과시한다. 그래서 남다른 분별력이나 통찰력으로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실 기도원이나 특별 집회를 찾아 나선 이들은 무언가 해결해야할 무거운 문제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험해 보이는 이들을 만나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곤 한다. 물론 그렇기도 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치유의 은사를 받은 이도 있다. 이들이 그들이 중보기도나 특별 기도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면 단박에 어려운 문제가 확 뚫리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는다. 사실 필자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은 적이 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서 질병의 치유나 귀신을 쫒아낸 적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필자에게만 그런 은사를 주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믿음의 자녀에게 누구나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고 지금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은사나 능력을 받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무언가 부족해서 일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기도응답을 받는 특별한 조건으로 특별한 예언자나 은사를 받은 자를 찾아다니라는 구절은 없다. 설령 그들에게 기도를 받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과연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역자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능력보다 말을 앞세우는 이들이 너무도 많으며 조언하는 내용도 성경적이라기보다 자신의 신비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특정한 인물로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는다는 것도 비성경적이거니와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참된 목회자나 사역자인지 분별력이 없다면 귀한 시간과 돈만 허비하는 헛수고에 불과할 것이다. 그럴 시간과 정력이 남아있다면 다른 이를 찾아다니기보다 스스로 하나님을 깊고 친밀하게 만나도록 해보라.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앞세워 사리사욕을 채우는 거짓예언자와 삯꾼 목자들이 너무도 많다.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 다른 수단이나 방법에 의지하려는 자들은 이들이 쳐놓은 올무에 걸려들게 마련이다.
(6) 통성기도가 묵상기도보다 더욱 성령 충만하다.
주변에 큰소리로 기도해서 성대가 결절되어 쉰 목소리를 내는 목회자 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을 만나면 기도의 거장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통성기도를 일반적인 기도의 형태로 알게 되는 것은 특별한 집회나 예배의 기도시간 때문일 것이다. 찬양 몇 곡이 끝나면 쾅쾅 울리는 드럼소리와 키보드의 악기소리와 함께 마이크를 쥔 인도자의 우렁찬 기도소리를 따라 서로 소리를 드높여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레 몸에 밴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혼자 기도할 때도 목소리를 높여 기도하게 된다. 통성기도로 기도가 끝나면 가슴이 후련해지고 성령 충만한 느낌으로 기도다운 기도를 했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마치 통성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이 신속하게 오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통성기도나 묵상기도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형식이나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보다 사실 통성기도는 오래 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일상의 생활에서 쉼 없는 기도의 습관을 들이려면 통성기도보다 묵상기도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묵상기도는 고도의 집중력을 키우는 훈련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잡념이 들거나 졸다가 기도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묵상기도는 통성기도에 비해 하나님의 임재나 지혜, 응답을 더 민감하게 알 수 있다. 통성기도는 특별한 훈련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묵상기도는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기도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묵상기도의 습관을 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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