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변호사
짜장면 배달 소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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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는 길가에 서 있는 가난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육십 대의 남자가 나온다. 머리위의 듬성듬성 한 백발이 겨울의 시든 풀 같이 쓸쓸해 보인다. 그는 세상에서 실패했다.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가족과 함께 인생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무능력하게 된 아버지를 아내나 다 큰 자식들은 더 이상 의지할 기둥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천덕꾸러기가 된 그는 방황한다. 그가 낙원동의 한 악기점 앞에서 갑자기 구토 증세를 일으킨다. 입에서 피가 썩인 가래가 섞여 나온다. 얼마 전부터 배가 아프고 속이 역겨운 증세가 있어왔다. 그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암으로 죽기 전 어머니의 증세가 그랬다. 돈이 없던 그는 늙은 어머니가 수술을 거부하고 저 세상으로 가시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다. 그는 문득 죽음의 사신이 자신에게도 찾아온 것을 자각한다. 그의 표정에 ‘아, 그렇구나’하는 감정이 떠오른다.
그는 허탈한 감정으로 하늘을 보면서 웃는다.
“선생님 오늘 기쁜 일이 있으신가 봐요”
옆에서 한 아가씨가 방긋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다. 손에는 모금통을 들고 있다.
“그래요, 이제 휴식을 선물 받았어요.”
그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휴식이었다.
“어머, 좋으시겠어요. 그러면 어린아이들을 위한 모금에 조금이라도 기부해 주시죠.”
모금통을 들은 아가씨가 말했다.
“그럽시다.”
그는 졈퍼 주머니에 있던 돈을 꺼내 모금통 속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그는 악기점 쇼윈도우 안에 있는 클래식기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영혼이 어느새 기억 저편의 벌판에서 떠돌고 있는 중국음식점 배달 소년을 보고 있다. 짜장면 배달을 갔던 음악실에서 한 남자가 클래식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허공에 흐르는 선율을 듣는 순간 그는 황홀했다. 클래식 기타를 꼭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고된 현실에서 그는 좋아하는 걸 할 수 없었다. 조그만 사업을 하고 평생 아이들을 키우고 가족을 벌어 먹이느라고 허덕댔다.
이제 그는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악기점으로 들어가 기타와 악보를 샀다. 그리고 산동네 연립주택의 초라한 자기 방으로 돌아가 악보를 보면서 기타 줄을 튕긴다. 그의 내면을 모르는 아내와 퇴근하고 돌아온 아들이 그를 보면서 입이 튀어 나와 이렇게 불평을 했다.
“당신 결혼할 때 평생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예요? 나이 먹고 이렇게 비참하게 될 줄 몰랐어.”
“여보 정말 미안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그런데 난 당신의 보호자만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게 아니야.
나를 그냥 내버려 둬. 이제부터 혼자 사는 연습을 해. 자식한테 기댈 생각 말고.”
옆에 있던 아들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정말 요즈음 이상하시다.”
“이상하냐? 나는 부도가 나기 전까지는 그래도 애비로서 최선을 다했어. 고등학교 시절 국영수 특별 과외도 시키고 대학까지 잘 가르쳤다고 생각해. 애비가 부도가 난 이후에 네가 취직을 해서 가족을 끌고 가느라고 고생을 했다만 나도 기본의무는 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죽음을 앞둔 남자는 나보다도 세 살이나 어린 것으로 나오고 있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었다. 이제는 싫은 자리엔 가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안 해도 될 때가 온 건 아닐까. 그 남자가 평생 하고 싶었던 건 클래식 기타를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골방에서 혼자 하얀 모니터를 보면서 일기를 쓰듯 글을 쓰고 있다. 어려서부터 내가 하고 싶던 일이다. 이만하면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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