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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두 개라는 법관의 위선

Joyfule 2018. 4. 11. 11:13

 

 [엄상익 칼럼]

 

진실이 두 개라는 법관의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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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법관생활을 해 온 이웃의 선배변호사와 점심시간 법률사무소들이 들어있는 빌딩 지하의 작은 밥집에서 만났다. 얼큰한 동태탕과 오징어 볶음을 시켜 밥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판사를 하던 시절은 변호사가 한번 찍히면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었지. 예를 들어 기피신청이라도 한번 했다간 그 변호사는 죽는 거지. 판사끼리 서로 그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괴롭히니까 말이야.”

판사가 편파적이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면 의뢰인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그 판사의 재판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 제도가 기피였다. 그러나 그런 기피신청은 30년 변호사생활을 하면서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검사나 수사관의 경우도 오히려 기피신청을 하면 은근한 보복이 오곤 했다.

칠팔십년대 내부적으로 법관들의 의식이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좋은 분들도 있었지만 권위의식으로 법정 안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 판사도 있었어. 당시 내가 모시던 부장판사 중 한 분은 하루에도 법정구속을 여러 명 하는 거야. 보통 판사들은 평생 한번 할까 말까 한 걸 말이야. 법정구속을 하면 그 법정은 순간 공포로 얼어붙은 거지. 그렇게 여러 명을 지옥으로 던지면서 아무렇지도 않아했던 분이었지.”

그런 분의 경우 다른 판사에 대한 태도는 어땠어요?”

그것도 차별이 심했어. 그때는 한 방에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두 명 그리고 여직원까지 같이 있었어. 그런데 사법연수원에서 판사실무교육을 받기 위해 시보가 와서 같은 방에 있었던 적이 있어. 그때 커피는 법원 앞 다방에서 시켜 먹었는데 한번은 부장이 커피를 시키라는 거야. 여직원이 판사 실무를 배우기 위해 온 시보의 것까지 포함해서 네 잔을 시켰더니 불호령이 떨어지는 거야. 세잔을 시키라고 그랬지 언제 네 잔을 주문하라고 그랬느냐고 말이야. 수습기간만 지나면 시보로 온 사람도 판사로 임관되던 때인데 말이야. 그 사람은 아직 판사가 아니니까 차를 마실 자격이 없다는 의미였지. 그 다음부터 차를 마실 때면 실무를 배우러 온 그 사람은 자리를 피해서 판사실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런 권위의식을 가진 분이 있었어. 그 권위의식은 아마도 일제시대 부터의 흘러온 악습이었던 것 같아.”

그런 분의 인생 후반부는 어땠습니까?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모두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으니까 직접 보셨을 거 아닙니까?”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부부사이의 불화로 가정이 편안하지 않고 나중에는 병들고 고독해지고 불행해 지는 모습이었지.”

한번 높은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은 평생 그렇게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선배변호사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이 그런데 얼마 전에 대단한 젊은 변호사를 봤어.”라고 말했다. 순간 얼굴에 감탄하는 표정까지 떠올랐다.

어떤 변호산데요?”

담당판사가 재판을 잘못하니까 그 판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거야. 우리 때 같으면 찍힐까봐 생각도 못했을 일인데 대단해. 앞으로 변호사생활을 할 날이 많은데 말이야.”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저질렀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법정을 다녀보면 좋은 판사와 나쁜 판사가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판사들은 자신의 모습을 거의 자각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십년동안 보고 메모를 해 왔던 좋은 판사와 나쁜 판사들의 재판광경을 백매의 원고지에 묘사했다. 그리고 그 원고를 월간조선에 기고했다. 정확한 재판시각과 장소까지 나오니까 그 판사가 누구인지 바로 드러났다. 의외로 파장이 큰 것 같았다. 대법원 공보관이 잡지사에 항의 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부터 나는 법정이나 검찰조직에서 이단아가 되어 버렸다. 법정에서 만나면 판사들은 정중하고 아주 매끄럽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번은 업무적으로 한 법원장을 만났다. 그는 내게 판사사회에서 엄 변호사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의뢰인의 고소로 나 자신이 피고인이 된 적이 있었다. 죄인자리에 선 나의 존재 자체가 그들을 너무나 기쁘게 하는 것 같았다. 주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살자니 문제가 많지 죽자고 마음먹으니까 고민이 크지 않았다. 내가 지는 십자가가 무겁고 괴로웠다. 나를 단죄하는 판결문의 그럴듯한 논리의 문장과 문장의 행간에서 그들의 잔인한 미소를 느꼈다. 잘못된 판결을 받는 고통은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은 살인현장을 지나가던 중국음식점의 열여섯 살 짜리 배달 소년을 경찰과 검찰이 억지로 살인범으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증거로 제출된 공구함의 칼에 혈흔도 없었고 피해자의 상흔과도 맞지 않았다. 인권의 보루인 판사들이 기초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안이었다. 법원은 소년에게 징역 십년을 선고하고 그 소년은 억울한 감옥생활을 다 했다. 그 소년은 저항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였다.

변호사생활을 하면서 그런 사건을 여럿 목격했다. 살인사건이 나면 그 부근의 걸인 하나를 잡아 살인범으로 만든 경우도 봤다. 법원의 판사에게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고문으로 만든 기록과 조작한 증거물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도 판사들은 법이 보는 진실과 실체적 진실은 다를 수 있다고 한다. 진실이 두 개라는 소리다. 그건 오판을 합리화하는 위선이다.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한 분은 내게 판사들의 오판이 많아요, 우리도 이제 다른 나라들 같이 판사들의 잘못을 따지는 소송을 거는 시대가 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국민들은 판사들이 기록이 아니라 진실을 보기를 원한다. 그 여망에 부응하지 못하면 책임을 지게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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