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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공개한 전직 대통령 통치사료

Joyfule 2020. 7. 29. 04:09



1월 9일 청와대는 1302점에 달하는 전직 대통령들의 통치사료(史料)를 공개했다.  
 

 
이 자료들은 지난 반(半)세기 동안 각 대통령과 영부인이 세계 각국의 정상들과 주고받은 공식 서한과 사신(私信)들이 많았고, 그때그때의 주요 사안에 대한 대통령 및 우리 정부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보고서나 구술기록 등도 포함돼 있다. 대통령들의 공식 행사 녹음테이프도 719점 포함됐다. 이 자료들은 그동안 청와대 동(東)별관 의전비서실의 사물창고에 방치되어 있다가 청와대 통치사료비서관실이 대통령 자료관 설립을 위해 각종 자료를 모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 사료들의 검토작업에 참여한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가 그 가치와 의의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방치되어 있던 전직 대통령 통치사료 이번에 공개된 사료(史料)는 2만여쪽에 달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국가원수들이나 영부인들 사이에 오간 지극히 의례적인 서한들이었고, 또 그동안 연구자들이 발로 뛰어 자료를 찾고 연구한 결과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이 많이 포함돼 있어 모두가 다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도 있었고, 그동안 연구자들이 미국측 자료를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우리측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된 경우도 적지 않아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것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당시의 문서들은 크게 네 종류가 있었다.


째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오고간 공식적인 서한들이다. 여기에는 국가원수들(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사이에 오간 서한들과 이승만과 미국의 군부 고위 인사들 간에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외교담당자들(예컨대 한국 외무장관과 로버트슨·W Robertson·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사이에 오간 공문들이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비밀 해제된 미국 공문서(국무부가 발간하는 외교문서집·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를 통해 이미 알려진 것들이어서 내용상 새로운 것은 별로 없었다.


두 번째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과 주고받은 사신들이다. 이중 이 대통령이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적 정치고문인 올리버(R. Oliver) 박사와 주고받은 서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자들이 알고 활용하던 자료이다. 이것은 올리버 박사가 저술한 ‘이승만과 미국의 개입(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을 통해 내용의 핵심이 일차적으로 소개됐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한민국사 자료집’을 간행하면서 그것의 28~37권에 ‘이승만관계서한자료집(1944-1965)’을 담았는데, 이 대통령과 올리버 사이에 오간 편지의 대부분이 여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퇴역한 밴 플리트(J A Van Fleet) 장군과 주고받은 서한은 미국의 공문서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주지하듯이 밴 플리트는 미8군사령관을 역임하던 당시부터 한국과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이었으며 한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공로자이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예편한 후에도 한국과 이승만을 위한 일종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는데, 이번에 공개된 서한을 통해 그의 활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벌인 활동 중 특기(特記)할 만한 것은 그가 당시 한국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모아 한국과 이승만을 위해 일하는 로비 집단으로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의 결성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그의 편지에는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면면들과 이것의 결성에 소요되는 비용 등이 자세히 적시돼 있으며, 이승만이 비용의 일부를 대면서 그것의 결성을 지원했음도 나타나 있다.

그동안 프란체스카 여사가 정치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알려져 왔으나 그것을 확인해 줄만한 증거는 거의 없었다. 필자는 프란체스카 서한철에서 혹시 이에 관한 증거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가장 먼저 이것을 꺼내 일별(一瞥)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그녀가 외국의 지인들과 주고받은 사적인 편지들이었다. 그녀는 외국의 지인들에게 주로 한국을 위해 기고와 강연을 지속적으로 할 것을 부탁했으며, 그들은 그녀의 요청에 부응해 자신들이 벌인 활동을 보고하는 것이 이 서한철의 주된 내용이었다.


셋째는 각종 정책 현안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구술하고 그것을 받아 적은 문서들로서 양적으로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문서들은 주로 1957년에 작성된 것들이었는데, 이 무렵의 대일정책이나 반공정책 등에 대한 이 대통령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문서들조차도 모두 영어로 작성돼 있다는 점이다.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에 익숙해져 있던 이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구술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 보고용으로 만들어진 영문보고서들 


마지막으로 역시 1957년 영문으로 작성된 정부 보고서들이 있다. 그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남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한 보고서와 한ㆍ일관계와 일본의 아시아정책에 관한 한국측의 견해를 정리한 보고서 그리고 한국 경제의 현황을 분석한 보고서이다. ‘남북한 군사력 비교보고서’는 대외비로 분류되어 붉은 글씨로 ‘SECRET’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으며 작성자가 누구인지 명기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용이나 작성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보고서는 한국의 국방부나 군부가 한국군을 줄이려는 미국의 의도를 반박하기 위한 자료로 만든 것 같다.

휴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은 약 72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 들어 미국은 한국에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군대의 수를 감축할 것을 요구했다. 이 보고서는 이 점을 반박하기 위해 북한에 비해 한국이 군사력 면에서 턱없이 열세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북한이 핵이나 유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제기하고 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산군은 휴전 이후 19만4000명을 증강하여 총 80여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남한 및 유엔군의 병력을 합한 것보다 5만여명이 많은 수이다. 북한에는 2개 포병사단의 지원을 받는 33개 사단이 있는 반면 남한에는 23개 사단밖에 없다. 북한은 공군기지 건설, 초현대식 제트기와 포대의 건설, 박격포·대공포 및 탱크 도입 등으로 휴전협정을 어기고 있다.

더욱이 공산군은 핵 및 유도미사일 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군은 한국전쟁 이후 공군력의 우위 확보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북한군은 한반도 전역을 10~30분 이내에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의 공군력을 확보하고 있다. 해군력은 외형상으로는 한국이 앞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련의 극동함대가 150기의 잠수함을, 중국이 50여기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반도 해안 전역이 사실은 이들 공산 해군력에 의해 항상 위협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다른 두 보고서는 작성자와 시기가 적시돼 있다.

한ㆍ일관계와 일본의 아시아정책에 관한 한국측의 견해를 정리한 보고서와 한국 경제의 현황을 분석한 보고서는 모두 1957년 9월 초 외무부와 부흥부가 각각 작성한 것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우리가 처한 급박한 경제 및 안보상황에 관한 미국측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한국의 현황을 담은 여러 가지 영문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에 보내는데, 이 두 보고서도 그것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한국의 경제적 필요에 관한 간략한 분석’이라는 제목이 붙은 경제 현황 분석보고서는 당시 한국 경제가 전후 피폐 속에서도 미국의 도움으로 어떠한 성과를 냈는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도 미국의 지속적 원조가 절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는 1957년 3억 8200만9000달러를 고비로 1958년 3억2100만 3000달러, 1959년 2억2200만 2000달러로 급속히 줄어들었고, 이것이 1950년대 말의 경제위기를 몰고 와 결국 이승만 정부의 붕괴를 가져오는 원인(遠因)으로 작용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ㆍ일관계와 일본의 아시아정책에 관한 한국측 견해’라는 제목이 붙은 보고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1953년 이후 진척이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956년 봄부터 한국 정부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측과 비공식적인 접촉을 가져왔으나 그 역시도 일본측의 무성의하고도 무반성적 태도로 인해 전혀 진전이 없다고 쓰고 있다. 이 보고서는 아마도 한ㆍ일관계의 조속한 개선을 요망하는 미국에 그것이 왜 이루어지지 못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문보고서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