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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민주주의 국가 만들 것” 꿈 이뤄

Joyfule 2020. 7. 29. 04:02



이승만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민주주의 국가 만들 것” 꿈 이뤄
미래연구원 우남리더십과정 강연 (2/14)    

1919년 필라델피아서 최초로 ‘한국의회’ 소집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공산침략 저지


1950년대 서울대 학생 시절 개인적으로 이승만에 대해 대단히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중 부산피난 시에는 국민방위군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 대통령에 대해 분개했고 이후 4·19를 주동했던 후배들을 격려하고 도왔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연구하게 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유학 시절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서 9년간 책을 읽었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인이 쓴 책 중 이승만의 ‘독립정신’이 가장 잘 쓴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동아시아의 근대사적 측면에서 이승만을 연구하면서 이승만의 ‘전도자’가 됐다.

한반도 역사상 이승만 만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전주이씨 양녕대군의 17대손 왕족이었던 소년 이승만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 영어학부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승만은 배제학당 졸업식에서 정부 대신과 외국인 등 800여 명 앞에서 졸업생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주제로 영어 연설을 했는데 원고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윤치호의 일기 등에 평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영어 연설이 훌륭했다고 전해진다.

당시로서는 과격한 정치체제 개혁을 주장한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에서 활동했고 ‘조선 최초의 근대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했으며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시위 연설에 나서는 등 맹렬한 정치활동을 펼쳤다.

박영효와 쿠데타를 모의하고 청년동원 책임을 맡았다가 발각돼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쿠데타는 시의적절한 것으로 만약 성공했다면 한일합방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은 조선의 기독교화를 생애의 목표로 삼게 된다. 이후 고종의 배려로 5년 8개월만에 석방돼 고종의 측근인 친미파 민영환, 한규설의 밀서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개인자격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10여분간 면담했다. 1882년 체결된 한미조약의 1, 2조 조항에 입각해 현재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해 있으니 미국이 거중조절을 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자 이승만은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됐고 조지워싱턴대를 2년만에 졸업하고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3년만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신이 하루빨리 조선에 돌아가 중요한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대학당국에 설득했던 것이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내각제 국무총리직을 통보 받은 이승만은 그해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최초의 한국의회를 소집하고 국가건설의 청사진을 제시했는데 그 회의록이 아직 남아 있다. 이승만은 1925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이동휘의 공산세력과 안창호의 서북파에 의해 탄핵될 때까지 탁월한 외교활동을 펼쳤는데 그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모두 영어로 돼 있어 그동안 제대로 연구되고 평가받지 못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한 시기가 또한 12년간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이다. 한국의 초대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승만은 우선 헌법의 핵심내용을 기초했다. 제헌국회 의장으로 유진오를 임명했으며 한민당 창립멤버인 유진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제를 채택됐고 한민당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는 농지개혁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소작민이 대부분이던 농민들이 자작농을 하게 되고 동등한 기회를 갖는 국가의 주인이자 국민이 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는 ‘교도 민주주의’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흥미롭게도 1919년 필라델피아 한국의회 문서에 명기된 조항 ‘적어도 처음 10년간은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을 따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교적으로는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의 영유권을 확보했고 최강국 미국을 압박해 미국과 동격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뤄냈다.

군사적으로는 전쟁을 거치면서 70만 대군을 양성했고 종교·문화적으로는 한글전용 정책과 함께 영어교육을 장려했고 재임중 한국을 기독교인구 200만의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국가로 만들었다.

1919년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된 뒤 한 외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꿈을 이뤘던 것이다.

정리 / 김범수 전문기자  bskim@future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