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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Joyfule 2015. 11. 10. 08:06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글쓴이: ㄱㄱㅏ ㅊㅣ™ 번호 : 61조회수 : 02007.08.22 10:58

 

 

2.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세워진 선교사 귀츨라프 기념비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가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우리가 고대도를 방문하기 전에 사전에 예비 조사한 자료 중에서, 김양선의 ?한국기독교회사연구?와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에는 분명히 귀츨라프 선교사의 방문지가 고대도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행업 학장은 ‘중부권에 속하는 고대도가 개신교 선교 성지인데 그 곳에 귀츨라프 선교사를 기념할 만한 기념비나 사표(사표)가 없다면, 중부권에 속한 우리 대전신학교가 주축이 되어 기념비라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하는 희망을 여러 번 피력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념비가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세워진 연유가 너무나 궁금하였고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를 답사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었므로, 우리는 서둘러 원산도로 가기로 하였다. .


원산도는 고대도에 비해 꾀 큰 섬이라고 한다. 그래서 섬 어느 곳에 기념비가 있는지 알아보아야만 하였다. 이인환 목사도 그 기념비가 원산도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이진수 전도사가 원산도에서 목회 하는 몇 분 목사들에게 수소문하여 기념비의 소재지가 원산해수욕장 언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원산도에 장로교 통합측 교회가 있는지 알아보아 달라고 하였다. 초전교회를 담임하는 박석기 전도사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박전도사에게 연락하여 원산도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알리고,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박전도사도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에 가 본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수소문하여 그 곳 위치를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벌써 점심 때가 다 되었다. 고대도에서 보면 원산도는 바로 건너 보이는 섬이지만, 여객선이 다니지 않아 사선(사선)을 구하기로 하였다. 마침 김영식 씨가 자신의 배로 우리 일행을 원산도로 건네주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고대도교회의 김진수 전도사 내외와 하옥희 권사가 따라 나선 것이다. 그들도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를 이번 기회에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것이 왜 고대도가 아닌 원산도에 있는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의 수가 배나 늘어났고, 모두들 마치 무슨 큰 비밀을 파 해치러 가는 사람들처럼 흥분에 들떠 있었다.


원산도에 도착하여 박석기 전도사에게 연락하니, 우리가 도착한 선착장에서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가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가기에 힘든 10리가 넘는 길이라고 한다. 그래서 차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한 참 만에 박전도사는 타이탄 트럭 하나를 구하여 직접 몰고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우리 일행은 타이탄 짐칸에 올라타고, 험한 길을 30여분 달려가면서 길을 묻고 물어 마침내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비가 있는 언덕에 토착하였다. 기념비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160여년전 프러시아 시골의 한 가난한 혁대 제조공이 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극동의 작은 섬 이곳까지 왔다니. 하나님의 섭리와 선교의 위대한 열정에 숙연하였다.
정행업 학장의 인도로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기념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M. D) 기념비
(화란선교협의회 소속, 독일신교 선교사)
1803년 피릿즈 / 포다라니에서 출생
1851년 홍콩에서 소천

카알 귀츨라프(의사) 선교사는 1832년 7월 17일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함. 그의 전기에는 그는 확신을 가지고 “보다 훌륭한 여명의 날이 한국에 빨리 오기를 바람”이라고 언급함.

-그가 오셨든 150주년을 기념하여 1982년 7월 17일 이를 세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의회(KCMEA)
주한서독대사관
주한화란대사관
학교법인 송죽학원
지역사회개발위원회

귀츨라프 선교사가 방한 한지 150년이 되는 1982년 7월 17일 이를 기념하여 고대도 건너편에 있는 원산도(원산도) 남쪽 해수욕장 동편 언덕에 역사적인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기념비 뒷면에는 영문과 독문으로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념비를 보더니 하옥희 권사는 연신 고대도에 세워져야 할 비가 이곳 원산도에 세워졌다고 푸념하였다. 우리는 기념비에 세겨진 송죽학원의 설립자나 이사장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박석기 전도사에게 물어 보았다. 남장(남장) 여인으로 유명한 전 국회의원 김옥선 였다고 한다. 김옥선 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원산도에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고 학교도 세 곳이나 세웠으며,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를 쓴 분으로 주민들의 신망이 높다고 하였다. 원산도에 세워져야할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을 확인하고 놀라고, 그것이 원산도의 유지 국회의원 김옥선 씨의 주도로 세워졌다는 데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기념비를 꼼꼼히 살피고 비문과 기단(기단)과 둘레를 실측(실측)하고 몇 장의 사진도 찰영하였다.


다시 한번 비문을 살펴보니 기념비를 세운 이들의 실명(실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보아온 기념비에는 반듯이 그것을 세운 사람의 실명(실명)이 적혀 있었던 것 같은 데, 이 비에는 실명이 전혀 없다는 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정도의 기념비를 세우려고 해도 그 경비가 수월찮을 터인데, 그만한 경비를 들여세우고 실명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세운 이들이 너무 겸손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싫어서 그랬을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것은 비문의 내용이었다. 비문의 내용처럼 귀츨라프 선교사가 정말 이곳 원산도도 방문하였는지 그리고, 그날이 1832년 7월 17일이 맞는지,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한 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를 학문적으로 고증해야 할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되었다.


원산도에서 다시 사선(사선)을 빌려 타고 오후 3시가 넘어서 고대도롤 돌아 왔다. 대천으로 가는 배가 4시 30분이어서 김진수 전도사 내외가 급히 점심을 마련하여 대접하여 주었다. 시장하던 차라 늦은 점심이 꿀맛 같았다. 고대도를 떠나기 전에 김종익 이장을 만났다. 고대도 주민들이 지금도 감자를 재배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장은 고대도가 어촌마을이며 예로부터 부도(부도)이어서 감자를 제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뒷동산에 돼지감자가 자생(자생)하는 것을 보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는 귀츨라프가 심어 두고 간 감자가 항해 중 식용으로 쓰던 것이었으므로 돼지감자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대전으로 오는 길에, 오전에 약속한 대로 청라면 향촌교회의 이인환 목사를 방문하였다. 그는 서제에서 리진호 장로가 지은 “귀츨라프와 고대도-최초로 내한한 선교사와 고대도 전도”라는 책을 보여 주었다. 고대도를 네 차례나 방문한 리진호 장로가 책이름을 “귀츨라프와 원산도”라고 하지 않은데서 큰 안심이 되었다. 원산도에 관한 사항이 제일 궁금하여 책을 이리 저리 살펴보니 81-83 쪽에 이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귀츨라프의 “조선서해안 항해기”를 번역한 리 장로 역시 8월 10일자 일기와 고증을 통해, 귀츨라프가 원산도를 둘러 본 것으로 추측 할 수 있지만, 기념비 내용처럼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한 기록은 없다고 하였다. 원산도의 기념비에 대한 의구심의 일단이 드러난 것 같았다. 어쨌든 이번 답사는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아주 중요한 연구 과제 즉, “원산도 소재 선교사 귀츠라프기념비의 역사적 고증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큰 소득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득도 있었다. 동행한 황순환 교수의 고향이 대천이어서 오는 길에 부모님이 손수 재배한 감자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귀츨라프 선교사가 고대도의 좋은 땅을 골라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어 주고 그 재배법을 한문으로 종이에 써 주었다는 데, 그 감자가 후손(?)이 이 감자는 아닐까 생각 하니, 그 감자들이 모두 귀해 보였다.
고대도와 원산도를 답사하고 돌아 온 후 필자는 귀츨라프에 관한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다. 리진호 장로가 보내준 책과 자료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